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04화 (104/166)

104화

“도령님, 이도가 예전에 얘기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무슨 얘기?”

“…아주 옛날이기는 합니다만… 이도가 차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잖습니까.”

“아, 그때. 엄청 파고들어서 귀찮았었지. 분명 그런 법은 세상 천지에 없다고 해도, 결국 끈질기게 알려고 들어서 그분에게 찾아가 보라고 했다가 된통 혼났는데.”

은령은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칼을 귀 뒤로 꽂으며 잠시 사색에 잠긴 모양이었다. 강림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북악산과 한옥 집성촌의 모습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찻집의 푸근한 주인장이 내어준 다과를 와삭와삭 베어 먹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끝까지 숨기는 편이 나았을까요, 저는 종종… 그 애가 걱정됩니다. 지난번 일도 도령님이 무릉에 갇히시는 일로 끝났지만,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상제께서 무슨 벌을 내리실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지난번보다 왠지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뭐야, 네가 이도를 걱정하는 일도 다 있고, 역시 오래 살아봐야 한다니까. 천년 넘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도령님. 그러는 도령님도 후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렇게 인간도에 나와 있는 것도 정말로 상제께서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은령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강림은 태연한 얼굴로 다과를 다 먹고는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들 사이로 북악산을 거쳐 오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분께서 모르실 리가. 애초에 나를 다시 무릉에서 꺼내준 것도 상제께서 하신 일 아니냐.”

“…하지만 분명 빠져나오신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신선 영감탱들 눈을 어떻게 속이고 내가 빠져나온단 말이냐? 사방 천지 구름이며 땅이며 전부 그놈들 눈이 달렸는데.”

강림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어깨를 떨며 차를 마셨다. 은령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강림은 빈 찻잔을 달칵,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나도 끝까지 그분 손바닥 안이라 이거지. 나 원 참, 서역으로 여행을 떠난 원숭이도 아니고,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도착한 곳이 인간도야. 내 죗값은 스스로 씻으라 이건지, 뭔…”

“도령님…”

“이도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아직까지는 눈감아줄 필요가 있어. 그 녀석이 본심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 현장을 잡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전에 그분께 도움을 청하러 다녀오는 수밖에.”

“그분… 이라면, 하지만, 아직 알려주셨던 때가 되지는 않았잖습니까?”

“무슨 소리. 이미 딱 좋을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는데.”

강림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은령이 사다 준 옷의 품이 조금 컸던 지라 마른 듯한 소년의 몸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강림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갈까나.”

***

영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자신의 방과 침대였다.

여기는… 내 방이잖아. 분명 아까…

아득한 정신을 더듬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영서의 앞에,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정확히 영서의 책상에 팔을 괴고, 영서의 의자에 앉아, 영서의 책장에서 앨범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 미미하게 머물러 있는 피곤함과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위협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이 든 영서는, 지금 자신이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던 것과,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방에 태연히 앉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제 깼구나. 생각보다 몸이 약한가 봐.”

남자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앨범을 한 장 넘기며 말했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의 길고 마른 손가락이 잡고 있는 앨범은, 다름 아닌 영서의 중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책장에서도 제일 손이 잘 닿지 않는 맨 위 칸에 꽂아둔 앨범이었다. 먼지까지 가볍게 앉아있을 게 분명한 앨범을 굳이 꺼내다니, 그것도 왜 중학생 때 앨범을…? 영서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간신히 침착하게 가라앉히며 경계 어린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 누구야.”

“글쎄… 나는 누굴까.”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할 때냐고! 묘하게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남자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와 있는 거지. 게다가 아까 나는… 영서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고 앉았다. 앉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빙빙 돌았다. 남자는 앨범을 탁, 소리 나게 덮고는 책상에 내려놓았다. 꼰 다리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린 남자는 상냥한 웃음을 지은 채 영서를 건너다보았다.

“어렸을 때는 키가 작은 편이었네. 지금도 그렇게 큰 건 아닌가?”

“당신 누구야. 누군데 우리 집에 있어. 엄마랑 아빠는…”

“사진으로 미리 봐서 생김새는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 어리게 생겼네. 이 정도로 애새끼일 줄은 몰랐는데.”

남자가 쿡쿡 웃으며 영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벼운 수치심과 모멸감이 영서의 몸을 타고 올랐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영서는 잠시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 비뚤어지게 웃었다.

“…그래, 당신이구나. 주민이한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주민이? 그게 누구더라…”

누굴 속이려고. 영서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주변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남자는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죽은 자와는 다른 기가 흐른다. 영서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고, 그보다 곱절은 되는 영혼들과 귀신들을 봐왔다. 죽은 것들은 의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보통 산 기운을 쫓아 따라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영서에게는 그런 것들이 지긋지긋할 만큼 보였고, 굳이 자잘한 혼백들은 손대지 않고 놔두고 지나치곤 했기에 영서는 주변에 무해하면서도 딱 신경이 쓰일 만큼의 영혼들이 떠다니곤 했다. 그것은 영서의 집 주변은 물론 방 안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시끄럽게 굴거나 영서를 놀라게 하지만 않는다면 영서는 굳이 그들은 퇴마하거나 없애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멍한 얼굴로 영서의 방 안을 떠돌고 있는 것이 평범한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영서의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있었다. 대체 왜? 내가 그들을 그냥 놔두었는데, 대체 누가?

답은 눈앞에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남자가 알고 있을 터였다.

“…역시 소문 대로구나. 네 앞에서 거짓말은 못 하겠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무 많이 해서 하나하나 말해주기 곤란할 정도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영서는 이를 뿌득 갈았다. 간신히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다. 또 이상한 것들이 자꾸만 내 인생에 꼬여 든다. 나는 그저 일직차사와의 약속을 지키고 명부를 채워 자유로워지고 싶을 뿐인데. 그저, 나는…

“자유로워지는 건 어렵지 않아. 대가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니까.”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했지?

영서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던가, 하고 스스로를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남자는 싱긋 웃었다.

“특별한 건 너뿐만이 아니거든. 권영서.”

남자의 가느다란 눈이 아름답게 휘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영서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발밑이 푹 꺼질 것만 같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숙적이자 천적일 수밖에 없는 뱀 앞에 무방비하게 놓인 쥐의 심정과 비슷했다. 영서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해강을 구해주었을 때도, 주희의 꿈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때도, 폭우가 쏟아지는 산속에서 범의 숨통을 끊어야 했을 때도.

위험해.

머릿속에서 비상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남자는 위험해.

“이제야 우리가 동등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했는데. 너무 놀랐니? 아니면 아직도 기가 다 풀리지 못했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영서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난 걸지도 몰라.

남자는 여전히 아름답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영서는 무럭무럭 자라는 공포감을 무력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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