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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06화 (106/166)

106화

해강은 뭔가 어색한 얼굴로 눈앞에 놓인 종이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던가.

해강은 이제 막 열 살이 되었다. 얼굴도 모르던 친척이라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벌써 세 달째가 되었다. 처음 한 달은 아무것도 몰라 그저 눈칫밥을 먹으며 지냈고, 그다음 한 달은 낯선 환경에 어쩔 줄 몰라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또다시 한 달이 되자 해강은 이제야 주변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울지 않고도 잠들 수 있게 되었으며, 친척 어른과 마주 앉아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은 임재희라고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더욱이 제 친척이라니 해강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원장수녀님은 해강이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 부모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얼마간은 먼 친척의 손에 맡겨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 먼 친척이라는 사람들도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데다 그마저도 어린 해강을 키울 수 없다며 손수 고아원에 갖다 버린 사람들이었다. 죽은 부모의 알량한 유산이 목적이었던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원장수녀는 치를 떨며 해강을 측은하게 쳐다보곤 했다. 해강은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 정작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이제 열 살이라고 했던가?”

남자의 가느다랗고 우아한 손가락이 나이프를 쥐고 고기를 썰었다. 내리뜬 눈에 매달린 속눈썹이 길어 그림자까지 드리워질 정도로, 선이 곱고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러나 어딘가 서늘하고 기분 나쁜 사람. 해강은 본능적으로 재희를 보면 왠지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해강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구해주고, 처음 자신의 집에 해강을 데려왔을 때는 직접 손을 잡고 이 방 저 방을 소개시켜주고 설명해 주며 퍽 다정하게 굴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지내는 세 달 동안 처음에 해강은 임재희라는 남자가 혹시 쌍둥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자주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직 넓은 집 안이 어색해 방이나 화장실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할 때였다.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쭈뼛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온 해강의 귀에 낯선 신음이 들려왔다. 그건 애써 비명을 억눌러 참는 것 같기도, 고통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리가 나는 곳은 응접실 곁에 딸린 작은방이었다.

“……저, 저기…”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의자 위에 웅크려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항상 보던 것과는 달리 창백하게 질린 데다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열 살짜리 해강은 이해할 수 없을, 복잡하고도 기괴한 감정들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울고 있었던 걸까. 해강은 우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정을 가진 터라, 항상 학교에서도 누군가 울고 있으면 먼저 가서 위로를 해주곤 하는 아이였다. 남자에게 한 발, 두 발 다가서 손을 내밀고 위로의 말을 전하려던 찰나였다.

“…너는 누구지.”

“…네? 저는…”

“누군데… 왜 내 집에…”

남자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해강을 보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의자가 덜컹, 하고 쓰러질 정도로 급히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어린 해강을 무서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가!!! 당장 나가!!”

“저, 저는… 그러니까…”

“네 방으로 가!! 누가 여기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 네 방으로 가! 어서!!”

남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와 해강의 팔을 잡아챘다. 혹시 따귀라도 맞을까 싶어 눈을 질끈 감으며 목을 움츠렸지만, 손이 날아오는 대신 남자의 손을 해강을 질질 끌듯이 잡고 문밖으로 던져버렸다. 게다가 쾅, 소리가 나게 닫힌 문 앞에서 해강은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듣고 뒤늦게 달려 나온 유모가 해강을 안아 들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아이의 잠옷은 소변으로 젖어있었다.

그 뒤로 해강은 다시 재희를 경계하게 되었고, 경계하다 못해 오히려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낮이 되면 재희는 다시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었고, 밤에 가끔 마주치는 재희는 마치 넓은 저택을 떠도는 유령 같았다. 때로는 잠옷을 입은 채, 때로는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제대로 여미지도 못한 채, 손과 고개를 떨어트리고 발을 질질 끌면서, 몽유병에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것도 아니면 창가에 의자를 두고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몇 시간이나 중얼거리다가 욕을 지껄이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고, 허공을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실로 미친 사람의 행태였다.

그러나 어린 해강이 그런 괴이한 광경을 목격하고도 계속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해강을 도와주는 다른 고용인들 덕분이었다. 재희는 사실 해강을 데려온 후 집만 소개시켜주고, 직접적으로 해강과 마주치거나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해강을 맡아 돌봐주는 유모의 말로는 ‘임 사장님’은 너무 바쁜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유모는 좋은 사람이었다. 딱 그 정도의 감상이 어울리는 무색무취의 사람이었지만. 해강은 이제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봐준 그녀의 얼굴이 흐릿할 정도로 그녀를 조용하고 특징 없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단지 그뿐. 계약한 3년이 지나자 그녀는 군말 없이 해강을 두고 그 집을 나갔고, 해강은 중학생이 되었다.

사실 해강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홈스쿨링을 했다. 나래초등학교 2학년 1반이던 해강은 3학년으로 진학하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재희가 와서 그렇게 말했다. 초등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고, 당분간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고. 중학생이 되면 다른 학교에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겨울 방학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해강은 풀이 죽었지만, 곧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새로운 반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건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재희의 집은 어린 해강의 순수한 욕구를 만족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장난감은 물론 옷이나 신발, 책, 원하는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먹고 싶어 했던 것들은 뭐든지 다음 날이면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그동안 고아원에서 정해진 식단과 정해진 일과대로 살아야 했던 어린 해강은 새 생활에 한 달 만에 적응했고, 밤마다 흐르던 눈물도 곧 멈췄다. 재희는 이중적이고 괴팍한 면이 있었지만 그만의 규칙이랄까, 해강은 갈수록 그의 성격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낮에는 폭력적으로 굴지 않았기에 해강은 가끔씩 집에 재희가 일찍 들어온 날이면 먼저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종알거리기도 했다. 재희는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소파에 턱을 괴고 기대앉아 고개만 끄덕이곤 했다. 그 정도가 둘 사이의 유일한 평화적인 친목의 시간이었다.

“…제가… 아저씨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저씨라니, 나 아직 20대인데 너무하네. 형이라고 해줘.”

“아, 네… 형…”

“더 예전부터 얘기해 줬어야 하는데 내가 일이 바빠서. 새 집에 잘 적응은 한 모양이던데. 부족하다거나 하는 건 없지?”

“네. 다 좋아요. 아줌마도 아저씨들도 잘해주시고…”

“주해강… 해강이라. 좀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낮에 새로 네 호적을 옮겼거든? 갖출 해에, 편안할 강. 부모가 그래도 이름 하나는 잘 남겨줬구나.”

해강은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소시지를 찍은 포크를 입에 넣으려다가 말았다. 밥을 먹다가 말고 별안간 꾹 입을 다물자, 재희가 심상한 얼굴로 해강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작은 고기 조각을 입에 넣은 재희는 피식 웃었다. 꼭 잠에 취한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기분 나빠하지는 마. 칭찬이니까. 해강이 네 부모님, 그래, 나한테는 친척 어른이셨지. 얼굴은 한 번씩 뵌 적이 있어. 내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때 할머님께서 크게 자리를 마련하셨으니까, 그 인간들도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생전 오지 않던 본가를 찾아오더구나. 할머님께서는 불쾌해 하셨지만 아량 넓은 내가 그분들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었지. 참, 할머님은 나중에 한 번 뵈게 될 거니까 잘 기억해두렴. 엄한 분이셔서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싫어하시거든. 아무튼…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너희 엄마는 할머님의 동생의 자식이었어. 할머님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자식까지 몽땅 할머님이 뒷바라지를 해주셨거든.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족함 없이 길러주겠다, 대신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라. 그게 그분의 뜻이셨지.”

해강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재희가 일찍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하더니, 얼굴도 모르는 부모의 일을 들먹이지 않나, 할머님이라는 분은 또 누구야? 게다가 가주? 가문? 할머님이란 건 나에게도 할머니가 있다는 건가? 복잡한 가계도를 그려보기에 열 살짜리의 머리는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으므로, 해강은 열심히 알쏭달쏭 한 재희의 이야기를 뒤따라가기 바빴다.

“네 엄마는 나한테 당숙 이모쯤 됐으려나… 아무튼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제. 그분도 어지간히 할머님의 속을 썩이셨나 봐. 너를 낳은 직후였던 것 같지. 할머님이 화를 내면서 염치도 없이 아들을 낳은 주제에 이름을 지어달라고 왔다며, 매우 크게 노하셨으니까. 어쨌든 그날은 나를 위한 자리였으니 큰 소리는 낼 수 없으셨던지, 평소보다는 덜하셨어. 금방 당신 방으로 들어가 내내 나오지 않으셨으니까. 네 부모도 욕만 잔뜩 얻어먹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거든. 네 생일이 언제지?”

뜬금없는 물음에 해강은 포크를 아예 식탁 위에 내려두고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해강의 접시 옆에는 아직도 재희가 내민 서류가 놓여있었다.

“…5월 16일이요.”

“그래, 그때가 여름이었으니 아마 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겠구나. 그래… 그랬었어.”

재희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잘린 고기를 찍어 다시 입으로 넣었다. 별로 턱을 움직여 씹는 것 같이는 안 보이는데. 재희는 천천히 접시 위에 담긴 고기를 다 먹었고, 해강은 불퉁한 얼굴로 시위하듯 손을 내리고 앉아있었다. 중간에 한 번,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좀 더 드세요,라고 채근했지만 해강은 무시했다. 열 살이라도 열 살만의 고집이 있는 법이니까.

“다 먹었니? 그럼 네 방으로 올라가서 씻고 잘 준비를 하렴. 숙제 있으면 하고. 나는 다시 나가야 하거든.”

누가 봐도 해강이 자신의 몫을 다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희는 자신의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했는데도 오히려 밥을 먹기 전보다 더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재희가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성큼 나와 그의 어깨 위에 코트를 얹어주었다. 소매에 팔을 넣지도 않고 그대로 걸친 채 재희는 하품을 하며 부엌을 빠져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아 참, 이번 주 내내 일 때문에 안 들어올 거야. 밥은 아줌마가 챙겨줄 거고, 어차피 선생님들이 와서 수업은 계속해 주실 거니까 숙제 밀리지 말고 해. 밤에 일찍 자고.”

재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거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그와 그를 따라 수행원들이 따라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집 안의 고용인들은 마치 한숨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더 활발한 몸짓으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조금 더 먹으라며 눈치를 주던 하녀가 다가와 해강의 옆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그녀는 항상 창백한 인상에 조용한 하녀지만, 어린 해강과 제일 잘 놀아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도련님, 왜 더 드시질 않으세요?”

“……별로 먹고 싶지 않아요.”

“드시고 싶다던 걸로 준비했잖아요. 봐요, 사장님도 다 드셨는데.”

“…누나, 이번 주에… 형은 집에 안 와요? 저 혼자 있어요?”

해강의 물음에 하녀는 허를 찔린 듯 애매하게 웃었다.

“…저희가 있잖아요. 혼자가 아니죠, 도련님.”

“…그렇지만…”

“도련님.”

하녀는 해강의 머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해강의 커다란 눈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이제 갓 열 살이 된 어린아이였다. 하녀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저랑 같이, 생일 케이크 만들까요?”

하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로 향했다. 시계는 시간과 초 단위, 날짜와 달까지 표시되는 신식 물건이었다. 작은 시곗바늘은 어느새 8에 닿아있었고, 날짜는 5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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