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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07화 (107/166)

107화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더 넓고 크고 멋진 곳이었다. 모든 시설은 다 깨끗하고 학생들을 위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고, 심지어 수업의 질마저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달리 한국에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해강은 재희의 뜻대로 3년 동안 홈스쿨링을 했다. 초등 과목을 가르치는 과목별 교사가 집으로 찾아와 과외를 했고, 장소만 집이었을 뿐 해강은 다른 초등학생들과 비슷하게 시간을 나누고 맞추어 공부를 하고, 학생으로서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외부로 나가는 것은 금지됐지만 집의 뒷마당에는 농구 골대가 있고 작은 수영장까지 있었다. 사실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쉬운 대로 체육 수업은 마당에서만 진행되었고, 그래도 학생이라곤 해강 하나뿐이니 체육 코치와 둘이서 넉넉하게 뛰고 공을 차며 놀 수 있었다. 한 가지 특별했던 것은 또래 초등학생에 비해 많은 영어 공부 양이었는데, 열세 살이 된 해강은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 집을 얻은 재희는 해강의 여권이 발급된 지 하루 만에 그를 미국으로 불렀다. 어엿한 소년의 티가 나는 해강은 특유의 밝은 미소와 다정한 태도로 금방 외국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다. 아마 체구가 큰 외국 소년들 사이에서도 뒤지지 않는 체격과 여러 가지 운동을 즐긴다는 점, 그리고 미리 언어를 익힌 덕에 어렵지 않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홈스쿨링을 한 학생에 대해 한국에 비해 관대한 시선을 가졌기에, 해강은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중학교는 땅도 건물도 커다랗고 넓었으며, 학생들도 많았고, 온통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한국의 중학교는 어떤지 모르지만 해강이 다녔던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합쳐진 형태로, 약 열세 살의 나이부터 열여덟 살까지 반을 올라가는 시스템을 가진 학교였다. 해강은 미국 아이들보다도 영어 성적이 좋았고, 수학은 조금 떨어졌지만 체육과 과학을 좋아하는 활발하고 잘생긴 학생으로 유명했다. 곧 학교에서 해강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그다음은 뭐, 아마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잘 가, 해강!”

“내일 봐!”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늦게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해강은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농담을 하다가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옆구리에 공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덩굴장미가 흐드러진 정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두 걸음씩 현관 계단을 올랐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깔린 노을의 풍경은 언제 봐도 운치가 있었다. 아, 오늘 아줌마가 일찍 퇴근하시는 날이었지. 해강은 커다란 현관문 앞에 서서 공을 반대쪽 옆구리에 끼고 오른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열쇠 가져왔는데, 어디 있더라. 아까 농구한다고 가방에 넣어뒀나. 빠진 건 아니겠지? 그러면 이번엔 진짜 혼날 텐데. 주머니에 담긴 영수증 조각과 사탕 따위들을 하나하나 빼내며 열쇠를 찾던 해강의 앞에, 굳게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

“이제 오니? 꽤 늦었구나.”

이제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보이는, 평소보다 한층 더 푸석하고 피곤한 얼굴의 재희가 현관에 서 있었다. 마른 몸에는 항상 입은 그의 남색 실크 잠옷이 걸쳐져 있었고,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밤바람 때문인지 얇은 가운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쳐진 눈 꼬리에는 여전히 잠 기운이 매달려 있었다. 해강은 놀라서인지, 아니면 그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인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들어섰다. 문을 열어주고 돌아서는 재희의 뒷목이 서늘해 보였다. 왠지 최근 들어 더 마른 것 같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아마 이런 말을 건네면 그는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다는 듯 코웃음을 칠지도.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고 집 안에 들어선 해강은 괜히 목 부근이 간지러웠다. 미국에 온 뒤로 재희는 더욱 바빠진 모양인지, 아니면 해강이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자신이 봐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그나마도 집에 들어오던 횟수를 더 줄였다. 게다가 들어온다고는 해도 해강과는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어쩌다가 한 번, 심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마주칠 때도 있었다. 재희는 그럴 때마다, 빈 미소를 지으면서 볼 때마다 크는 것 같네, 정도의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일찍, 왔네. 형.”

“일찍은. 오늘 사고가 좀 있었어. 어차피 어긋난 계약이어서,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고 오랜만에 집에 좀 왔지.”

“잤어?”

“조금.”

재희는 하품을 하며 슬리퍼를 끌듯이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려는 것 같았다. 해강은 조용히 공을 현관 옆에 내려놓고 욕실로 가 손을 씻었다. 손을 씻으며 거울을 확인하자 바보 같은 얼굴을 한 갈색 머리의 소년이 보였다. 운동을 하느라 땀에 젖었던 지라 곱슬곱슬한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아직 운동복 차림이어서 단정치 못했다. 땀 냄새라도 나면 어쩌지. 들어온 김에 샤워하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던 그때 거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강아.”

“어, 어?! 잠깐만!”

샤워는 포기한 채 해강은 헝클어진 머리를 물기 어린 손으로 대충 정리한 후, 심호흡을 하고 거실로 나갔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자세히 보니 거실 발코니 쪽이었다.

“이리로 와.”

“응.”

쭈뼛거리며 창가에 놓인 재희의 안락의자에 다가갔다. 그는 한국에서도 항상 창가에 흔들의자나 푹신한 해먹 같은 흔들의자를 두곤 했는데, 그건 미국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을 본다고 해서 뭔가 재미있거나 좋은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같은 집 근처 모습이잖아. 해강은 그렇게 생각하곤 했지만 재희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재희가 집에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날 동안 그가 가장 휴식을 얻는 곳은 바로 그 창가 자리인 것을, 해강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어떠니?”

푹신한 의자에 나른하게 기댄 재희가 물었다. 그는 가운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있었다. 성마른 맨발에는 실내용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고, 항상 외로 꼬고 앉던 다리는 아직 잠의 여운에 취한 건지 편하게 쭉 뻗은 채였다. 다행히 오늘 그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 좋아. 괜찮아.”

“성적 보니까 수학하고 물리는 좀 더 열심히 해야겠던데. 선생 하나 붙여줄까?”

“아니, 괜찮아. 학교 선생님들도 충분히 잘 해주셔.”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니?”

응? 해강은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학교생활에 대해 묻는 것도 뭔가 그답지 않다고 느꼈지만, 친한 친구들에 대해 묻는 것은 더더욱 그 다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해강과 재희의 대화는… 글쎄, 그것도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의무적으로 재희가 해강의 생활을 체크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요즘 필요한 것은 없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집 안의 고용인들이 잘 하고 있는지, 학교생활은 문제없는지… 그저 딱 그 정도의 피상적인 질문들이었고, 해강도 깊게 생각하고 답하지는 않았다.

“제일 친한… 음, 여럿 있는데, 오늘은 제이크, 폴, 피터하고 집에 왔어. 피터는 옆집에 사는 앤데, 피터 랜더슨. 알지? 지난번에 걔네 집에서 파티도 했었는데.”

“그 시끄러운 애라면 잘 알지. 그 랜더슨 부부도 나름대로 내 고객이니까.”

해강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깔았다. 딱히 좋은 소리를 하리라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제이크라고 했나. 제이크 펄먼 맞아?”

“응. 혹시 펄먼 부부와도 아는 사이야?”

명백한 비꼼이었지만, 재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마치 해강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은 듯 재희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내일, 제이크가 차를 끌고 올 거야. 너랑 같이 가려고 한 모양인데… 음, 그거 타지 마.”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타지 말라면 타지 마.”

“하지만 내일 시티 스타디움에서 NBA 파이널 경기가 있단 말이야. 제이크가 한 달 전부터 표 구하느라 온갖 고생을 했는데, 그걸 취소하라고?”

그 티켓을 어떻게 잡은 건데! 해강은 전혀 굽힐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재희는 감았던 눈을 뜰 뿐 여전히 차분해 보였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 아직도 잠에 젖은 듯, 꿈에서 깨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누가 경기까지 보지 말래? 그냥 걔 차를 타지 말라는 거지.”

“말도 안 돼. 그럼 그곳까지 걸어서 가기라도 하라는 거야?”

“너야말로 자꾸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하네. 택시든 뭐든 잡아서 타고 가면 되잖아? 돈이 없으면 카드를 써. 뒀다가 뭐 하니? 그저 걔가 차를 운전하게 두지 말라는 거야.”

재희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서기 시작했다. 담뱃재를 재떨이에 툭툭 턴 그가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는 동안 해강은 불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내가 할 소리야, 그건… 갑자기 불러서, 앞뒤 설명도 없이 그런 억지를 쓰면, 내가 그대로 따라야 해?”

“설명해 봤자 어차피 지금은 이해 못 할 거야.”

재희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그대로 잠이라도 잘 모양인지 다리까지 끌어당겨 웅크린 자세였다. 과연, 잠시 후 작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해강은 한참 동안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발소리를 죽여 소파에 놓인 담요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자는 재희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준 후 해강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 밤 그가 같은 집 거실에서 자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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