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야, 해강! 이제 끝났냐?”
학교 앞 정문에 새빨간 차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덜덜거리며 서 있었다. 100m 밖에서 봐도 제이크 펄먼의 애스턴 마틴이었고,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 그 차의 시동음만 들어도 아, 제이크 펄먼이로군, 하고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구형 모델인 데다 중고품이긴 했지만, 제이크의 아버지이자 전 시장인 에드워드 펄먼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오랜 애마이기도 했으니 제이크는 그렇게 졸라대다 마침내 아버지에게 그 차를 얻어냈을 때는 거의 뛸 듯이 기뻐할 정도였다. 그 차만 있으면 자기도 왕년의 아버지처럼 인기 있고 재치 있는 미남이 된 줄 아는 제이크는, 항상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학교 대문 앞에 큰 소음을 내며 차를 주차하곤 했다. 제이크 펄먼! 주차장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 뒤쪽이야! 오늘도 결국 지나가던 체육 교사에게 한 소리를 들어먹은 제이크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껌을 딱딱 소리 나게 씹으며 창문을 내린 문 위에 팔을 걸치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잠시 후 해강이 책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달려 나왔다. 뒷좌석에 가방을 던진 후 조수석에 올라탄 해강에게 제이크가 놀림조로 물었다.
"이게 누구야? 나랑 한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눈치 없이 일찍 나와 있었나? 데이트 준비하려면 옷 고르는 시간 한 시간은 줘야 해?"
“미안하다니까! 아, 역겨워. 야, 나한테서 비료 냄새나지 않냐?”
“별로. 왜, 그 역사 선생이 뭐라고 혼 내든?”
“몰리 선생님은 나를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체육 시간에 제라늄 화분 하나 깼다고 화단 청소를 시키지 뭐야? 이러다 경기 늦겠다고 불평했더니, 그럼 학교 뒤 텃밭 잡초까지 뽑고 가라는 거 있지?”
“우웩, 그 괴짜 노인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짼 거지, 그냥. 빨리 가자.”
해강이 백미러를 흘깃거리며 재촉하자, 제이크는 풍선 껌을 커다랗게 부풀리더니 낄낄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야, 경기장에 누가 와 있는지 아냐?”
“누구?”
해강이 시큰둥하게 되묻자 제이크가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우리 학교 여자애들도 와 있다고! 이번에 시티 스타디움에서 하는 농구 경기에 연예인 누가 온다고 했었나? 아무튼 그래서 여자애들이 난리였잖아. 다들 티켓 못 구해도 몰래 개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
“나도 미리 알려달라고 할 걸 그랬네. 그러면 한 장에 백이십 달러나 하는 티켓을 돈 주고 사지는 않았을 거 아냐.”
해강이 농담조로 되받아 치자, 제이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거울을 들여다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 해강의 얼굴에 가벼운 펀치를 먹였다.
“멍청아, 그냥 여자애들이 아니라고! 치어리더 부에 잘나가는 애들 무리 있잖아? 너도 헤일리 블러섬이랑 조시 캐롤라인은 알지?”
“조시? 걔는 풋볼이나 따라다니지, 농구는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모르지, 갑자기 관심이 생겼을지.”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빨간 신호등 앞에 차를 정차하며 주위를 살피더니 속삭였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아, 횡단보도를 건너는 지팡이를 든 나이 든 숙녀라면 모를까.
“빌리가 그러는데, 조시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대. 그것도 치어리더 부 내에서 도는 얘기니 아마 맞을 거야!”
“걔가 나를 왜? 반도 다르고, 마주칠 때는 화학하고 체육시간밖에 없는데.”
“짜샤, 우리 학교에서 제일 핫하고 예쁜 애가 너를 좋아한다는데, 그런 반응밖에 못 하냐?”
해강은 코웃음을 치며 조수석에 몸을 푹 파묻었다. 해강은 지난달 신체검사에서 키가 6피트를 넘어섰고,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즐긴 덕인지 또래 소년들 중에서도 신체 근육이 빨리 자리 잡은 편이었다. 동양인치고 드문 체격과 항상 환한 얼굴을 하고 다녀서인지 알게 모르게 해강을 마음에 두는 여자아이들이 부쩍 많아진 참이었다. 그러나 아직 열여섯 밖에 안 된 해강은 아직 마음만은 어린 구석이 있었다. 한창 사춘기다 뭐다 친구들이 동네 여자애들 중 누가 예쁜지, 누구의 몸매가 더 멋진지 토론하는 데에 해강은 관심이 없었다. 운동과 과제에 치여 살다 보면 하루가 다 갔고, 틈틈이 친구들과 놀거나 이런저런 장난을 치다 보면 하교할 시간이 되기 일쑤였다.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전자 상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거나 옆집 부부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는데, 해강도 한때는 자신도 아르바이트를 할까 했으나 재희의 반대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뭐랄까, 아직은 몸의 성장을 정신의 성장이 따라잡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해강은 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이었기에, 이런 속내를 친구 녀석들에게 털어놔봤자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똑같이 머리를 비우고 공이나 쫓는 바보 청소년 흉내를 내며 쏘다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해강은 최근 들어 심해지는 여자애들의 시선을 오히려 감당하기 힘들었다.
해강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멍청아, 조시는 바로 위 학년에 남자친구가 있어. 그냥 여자애들이 남자애들 얘기하다가 내 얘기를 좀 한다고 한 게 와전된 거겠지. 설령 걔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난 별생각 없는걸.”
“이 자식 말하는 것 좀 보게! 너, 걔가 한 달에 한 명씩 남자친구 갈아치우는 건 알고 하는 얘기냐?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남자친구라는 놈, 맥스 보일 맞지? 열일곱 살에. 그 자식 조시 뒤꽁무니만 쫓다가 대차게 까여서 그런 헛소문 퍼뜨리고 다니는 거잖아. 자기가 사실은 조시의 숨겨진 남자친구라느니 뭐라느니. 하여튼 미친놈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해강이 요점을 콕 찌르자 제이크가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
“…아하, 제이크 펄먼. 너, 헤일리 블러섬 좋아하는구나?”
“우린 쌍방이라고, 이래 보여도 걔랑 작년 교내 할로윈 파티 때 파트너까지 했었어. 분명 걔도 그 후부터 나를 계속 의식하고 있단 말이지. 신사 된 입장으로 먼저 자리를 만들어서 데이트 신청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뭐, 나보고 헤일리랑 단짝인 조시를 떼어놓기라도 하라고? 둘은 사귀는 애들처럼 맨날 붙어 다니잖아.”
“바로 그 말이지, 친구.”
“멍청이.”
다시 한번 신호 앞에 차가 멈춰 서자, 해강은 혀를 차며 불량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런 건 그동안 진작에 기회를 봐서 했어야지. 작년 할로윈이면 벌써 반년은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헤일리도 어이없어하겠다.”
“여자 한 명도 못 사귀어본 너한테 듣고 싶지는 않거든?”
“난 안 사귀는 거지, 못 사귀는 게 아니라. 그건 너고.”
제이크와 투닥거리며 낄낄대는 동안,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유달리 오늘은 신호등마다 족족 걸리는군. 해강은 심상히 생각하며 열린 창문에 팔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형이 오늘 제이크의 차를 타지 말라고 했는데. 바쁘게 나오는 바람에 깜빡 잊었다. 뭐 상관없지 않나. 언제 그렇게 나한테 신경을 썼다고. 해강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재희를 떠올렸다. 안 보는 곳에서 메롱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라고. 설명도 없이 그렇게 명령조로 항상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열 살 때하고 취급하는 게 똑같아. 해강은 백미러로 자꾸만 헝클어지는 앞머리를 만지며 생각했다. 어제도 그래. 이번에 얼마 만에 얼굴을 본 거지? 지난번에 밤에 들어오는 소리만 듣고 잠들었던 거 빼면, 한 달 만에 본 건데 별다른 대화도 없이 무작정 자기 할 말만 하고 잠들어버리고.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형은 밤마다 수면 부족에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걸까.
제이크가 휘파람을 불며 핸들을 돌렸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데이트를 할 생각에 신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노래 실력은 나쁘지만, 친구가 설레어하는 모습을 보니 해강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제이크 말대로 어쩌면 누군가를 사귀어보는 것도 좋은 일 아닐까. 나 말고 주변 애들은 다 한 번씩 연애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던데. 꼭 재희의 말대로 살 필요는 없지 않나. 막말로 형이 CCTV도 아니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할 수는 없을 텐데. 지금도 봐, 제이크 차를 타고 스타디움에 가고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날씨는 화창하고 공기는 달콤할 정도로 시원하고 맑았다. 해강도 기분이 좋아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는 제이크와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나 해강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맑고 좋은 날, 기대하던 농구 경기를 끝내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왜 해강은 제이크의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경기가 열릴 예정이던 스타디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재희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