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속보입니다. 현재 블룸 스트리트 3에 위치한 시티 스타디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습니다. 인근 거리에 계신 시민분들은 모두 현장으로 다가가지 마시고 같이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현재 시티 스타디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해당 스타디움에서는 오늘 오후 4시, 골든 피닉스와 레드 로버스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약 3천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화재 때문에 시 당국에서는 현재 이용 가능한 소방차와 화재진압 팀을 모두 보내고 있으며, 인명 피해는…’
‘제가 봤어요, 분명 봤다구요! 어떤 미친 남자가 갑자기 난입하더니, 주변 좌석과 사람들에게 통에 든 액체를 뿌리고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애들하고 겁에 질려서 나가려고 했는데, 그때 사이렌이 울리면서…’
재희는 리모콘을 들어 시끄러운 속보와 인터뷰가 쏟아지는 화면을 꺼버렸다. 모두 앞다투어 현장의 상황과 위험성을 극대화해 보도하기 위해 속보에 속보를 덧대는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 원인인지, 어디서부터 불길이 시작되어 어떤 식으로 번졌는지, 인명 피해는 얼마나 되고 현재 진화 상황은 어느 정도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재희는 TV를 껐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열두 번째로 해강에게 부재중 메시지를 남기며 재희는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나야. 메시지 들으면 전화해. 아니면 집으로 와. 당장.”
***
제이크는 거친 솜씨로 급정거를 해 가까스로 스타디움을 지나치지 않고 앞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여전히 라디오를 크게 틀은 채 빈자리를 찾아 아무렇게나 주차를 한 뒤, 날짐승처럼 우르릉거리던 제이크의 빨간 스포츠카의 시동이 그제야 꺼졌다. 해강은 조심성 없는 친구에게 가벼운 욕설을 날리며 조수석에서 내렸다. 사람 잡을 일 있냐, 운전 좀 얌전히 해! 해강이 혀를 차며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털자 제이크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쾅 소리 나게 운전석의 문을 닫았다.
“너 면허 딴 거 맞아? 두 번만 네 차 탔다가는 골로 가겠다.”
“나 정도면 우리 학교 베스트 드라이버지.”
어울리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내려쓰는 친구를 보며 해강은 코웃음을 쳤다. 오후의 햇살을 어느덧 길어져 머리칼과 피부를 적당히 건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내 선루프를 연 채 달려왔더니 정수리가 뜨끈뜨끈한 기분에 머리를 털며 경기장 입구로 향했다.
“오, 죄송합니다.”
한 남자가 주차장 입구를 나오는 해강의 옆으로 지나가려다 주머니에 든 것을 떨어트렸다. 재빨리 해강이 사과를 하며 몸을 굽혀 남자보다 먼저 물건을 주웠다.
“…고마워요.”
남자는 걸걸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대답한 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해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피해주었고,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자동차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야, 저 남자 뭐야?”
“별거 아니고, 뭐 떨어트려서 대신 주워준 거야.”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음침해 보여. 뭔가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너한테서 나는 냄새겠지. 좀 씻어라.”
“뭐? 야, 나 땀 냄새나냐? 데오도란트 바르고 왔는데.”
해강이 혀를 차며 먼저 성큼성큼 앞서나가자, 제이크가 그 뒤를 허둥지둥 따라갔다. 표는 나한테 있잖아, 바보야! 두 친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을 치며 경기장 입구로 향하는 동안, 남자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눈으로 그 둘을 지켜보았다.
“이야, 멋진데! 야, 우리 좌석 어디냐?”
“잠깐만, G-11, 12… 입구에서 오른쪽이네.”
소다와 칩스를 양손에 가득 든 해강이 소다를 제이크에게 넘기며 입에 물고 있던 티켓을 확인했다. 다행히 입구에서 멀지 않은 방향이었다. 관객석은 이미 3분의 2 정도가 차 있었고, 해강과 제이크처럼 이제 막 들어오는 관객들로 복도와 입구는 붐비고 있었다. 경기장을 메운 많은 인파와 따사로운 햇빛, 이미 자리를 잡고 응원하는 팀의 휘장과 마크가 새겨진 수건을 흔들며 응원가를 부르는 치어리더와 팬들을 보니 해강의 기분도 덩달아 들뜨고 있었다.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자리를 찾아간 해강은 무릎에 음료수와 간식들을 잔뜩 부려놓고 편하게 앉았다. 내리쬐는 햇빛의 정도를 보니 오히려 선글라스를 챙겨온 제이크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아 살짝 후회하려는 찰나, 제이크가 휴대폰을 만지작대다 말고 그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저기 봐, 저 아래쪽! 조시가 널 보고 있어!”
“뭐? 왜?”
음료수를 마시던 해강이 눈썹을 찡그린 채 되묻자 제이크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흔들었다. 얼마 전 새로 샀다던 아이폰의 화면에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름을 확인하니 메시지의 주인공은 조시 캐롤라인이었고, 제이크는 재빠르게 이제 막 도착했다며 어디냐고 묻는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가리키는 대로 밑 쪽을 내려다보니 휴대폰을 들고 뭔가를 입력하는 조시의 뒷모습과 답장을 하는 중이라는 알림이 그녀의 프로필 옆에 떠 있었다.
“제이크!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뭐? 같이 놀면 더 재미있지, 너야말로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냐? 사귀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데이트 한 번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조시의 풍성한 금발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해강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에 슬쩍 손을 흔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조시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 옆에 앉아있던 여자애들 무리가 한꺼번에 뒤를 돌아보았고, 해강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조시 같은 애가 헤일리하고만 올 리가 없었다. 그 애는 언제나 최소 네 명 이상의 친구들과ㅡ물론 헤일리 블러섬은 제외한ㅡ무리를 지어 다녔고, 딱히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녀와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은 발에 치이도록 많았다. 남자애들은 차마 대놓고 들이대지는 못했지만 조시는 언제나 여학생들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아이였다. 물론 그 애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조시의 미소 앞에서는 자신도 바보 같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곤 했다. 해강은 조시 캐롤라인과 몇 번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이렇다 할 만큼 사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었다. 예쁘고 멋진 애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해강에게 있어 사람을 사귀는 데에 그게 전부는 아니었고, 오히려 해강에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외모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여자애들하고 그렇게 자주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고… 그러나 여기서 계속 뺀다면 오히려 내가 조시를 싫어하는 줄 알 거야. 조시에게 정도 이상의 호감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애한테 대놓고 거절을 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시 캐롤라인은 그런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되는 애니까.
그렇게 누군가에게 순수한 애정을 품은 눈동자를, 실망으로 얼룩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거울을 볼 때만으로도 족했으니까 말이다.
……왜 또 이럴 때 재희가 떠오르는지는 해강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애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제이크와 해강을 흘깃거리며 속닥거리는 것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지만, 해강은 용기를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보아하니 여자애들 무리가 앉은 곳 바로 뒷자리는 주인이 없는지 아직까지 비어있었다. 나중에 주인이 나타나면 다시 돌아오지 뭐. 제이크가 어깨를 툭툭 치며 먼저 계단으로 내려가자 해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와 과자를 챙겨 그 뒤를 따라갔다.
“헤이, 얘들아! 여기서 다 만나다니, 우연이다!”
“뭐야, 펄먼. 나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 했지?”
“샐리, 항상 말하지만 난 너한테 관심 없거든. 너희 집 강아지라면 모를까.”
“뭐야, 어이없어!”
그러나 샐리는 정말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깔깔 웃으며 제 옆에 앉은 헤일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헤일리는 아까부터 애매한 웃음만 지은 채 조시의 팔짱만 끼고 있었다. 조시가 환하게 웃으며 해강에게 물었다.
“여기서 다 만나네. 학교 밖에서 보니까 좋다. 제이크랑 온 거야?”
“아, 응. 너도 농구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작은 삼촌이 농구 선수셨거든. 그래서 솔직히 어려서부터 농구를 더 좋아했어. 아빠 등쌀만 아니었어도 풋볼이 아니라 농구팀 매니저로 들어갔을 텐데.”
농담인가? 하지만 해강이 알기로 조시는 그런 걸로 농담을 할 만한 애는 아니었다. 의외라는 듯 해강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자, 옆에 있던 헤일리가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조시 따라서 농구부에 갔을 거야. 우리 부는 남자 선배들이 너무 짜증 나. 연습 시간에 자기들 연습이나 할 것이지, 자꾸 치어리딩 연습하는 거 구경한다고 쳐다보고.”
“뭐? 나도 풋볼 부에나 들어갈 걸 그랬다.”
제이크가 농담을 던지자 헤일리는 어색한 웃음을 흘린 뒤 고개를 돌렸다. 친구야, 아무래도 역시 너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 눈치 없는 자식… 해강이 속으로 혀를 차며 제이크에게 눈치를 주려 했지만, 그런 건 개나 줘버린 제이크는 여전히 헤일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바보 같은 말이나 툭툭 던지고 있었다. 자꾸 그럴수록 멍청해 보이기만 한다는 걸 알까. 친구의 지대한 착각에 심심한 애도를 보내며 해강은 곧 경기가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의 찌르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저리 가, 도와줘요!!”
“닥쳐!! 모두 제자리에 앉아!”
“이봐 거기! 조심해!!”
“밀지 마요!”
“뭐야, 무슨 소리야?”
제이크가 놀라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 그들에게서 약 50미터쯤 떨어진 제 4 입구 쪽이었다. 조금 전 해강과 제이크가 들어온 입구기도 했다. 웬 남자가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멱살을 잡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든 투명한 액체를 뿌려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남자를 밀쳐낸 소녀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며 허우적거리자, 옆에 있던 어떤 부부가 소녀를 받아주다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휘발유잖아! 이런 미친!”
“저 남자 잡아요!!”
그러나 누군가가 손을 쓸 새도 없이 그 남자는 커다란 휘발유통을 휘둘러대며 복도와 계단, 주변에 앉아있던 관객들에게 휘발유를 뿌려댔다. 한 건장한 남자가 달려들어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주변은 휘발유로 다 젖어 있어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 가만 안 둘 거야! 다 죽여 버릴 거라고!!”
“꺄아아악! 누가 경찰 좀 불러요!!”
추레한 차림의 남자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치켜들었다. 그것을 본 해강의 눈이 커졌다.
“저, 저 남자는 아까…”
“오오! 사탄의 마구니들아,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을 불태울 심판의 날일지니! 모두 여기서 같이 불타 죽을지어다!!”
남자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작은 라이터였다. 네모난 은색의 작은 지포라이터. 그러나 그것은, 아까 해강이 부딪혔던 남자가 떨어트리는 바람에 대신 주워준 물건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순간, 라이터의 부싯돌이 찰칵, 하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