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10화 (110/166)

110화

“현장에 나와 있는 리포터의 상황 전해 듣겠습니다. 에밀리, 화재 현장은 얼마나 진압된 상태인가요?”

-에밀리 쿠퍼슨입니다. 블룸 가에 위치한 시티 스타디움에서 일어난 화재는 이제 막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관객들은 대부분 대피한 상황이지만 테러범의 가까운 곳에 있던 시민들은 인명 피해를 입어 병원에 이송 중입니다.

“에밀리, 경찰과 시 당국은 현재의 테러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나요?”

-조금 전 도착한 메시지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근처 지역에서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던 국제 테러 단체의 잔당들이 자체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합니다. 경기장과 주차장, 관객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범인은 방금 전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테러 단체의 특성상 다른 곳에서 그에게 지시를 내리던 공범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 중에 있습니다.

“참 끔찍하고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이번 테러 사건은 지난 2006년에 있던 위스콘신 주의 백화점 화재 테러 사건 이후로 역사상 큰 재물과 인명 피해를 냈는데요. 그에 대해 당국은…

“…사장님, 도련님 현재 위치 확인되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세인트 필립 병원에서 비슷한 인상착의의 동양인 소년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출발할까요?”

재희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로 10분 후에 시청에서 관계자를 만나 예정된 계약에 대한 잔금을 치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답지 않게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먼 곳만 응시하던 재희에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수행원이 전화를 끊은 뒤 전달사항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도 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사장님?”

“정확히 어디서 목격된 거지?”

“그게… 중환자실이라고 합니다.”

“입원 기록 살펴봐.”

“예.”

수행원이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재희의 시선은 여전히 밖으로 고정된 채였다. 계약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정각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올라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입원한 환자 중 도련님의 이름은 없다고 하는데요.”

재희는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 돌려. 병원으로 간다.”

“네.”

***

응급실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더 넓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이구나. 해강은 치료를 받으며 망연히 생각했다. <그레이 아나토미>같은 드라마에서 보면 머리가 박살 나고 몸 어디 한두 군데는 잘린 환자들이 나오곤 했는데. 세인트 필립 대학병원의 응급실은 근방에서 제일 큰 응급실과 좋은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었는데, 그만큼 의료진의 수와 병실, 침상의 수도 많은 곳이었다. 대량의 환자들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스타디움 근처에 그곳 밖에 업었으므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모두 세인트 필립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피해자들의 부상 상태는 저마다 각자 달랐는데, 작게는 단지 불에 그슬려 옅은 화상만 입거나 기도에 가스가 들어가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사람들부터, 크게는 온몸에 큰 화상을 입거나 정신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해강은 다행히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정도였다. 오히려 화상도 아니라, 떨어지는 자재를 등으로 맞아 살짝 찢어진 것뿐이었다. 간호사의 지시대로 상의를 벗고 지혈을 받으니 피는 금방 멈췄고, 뼈나 다른 곳이 다쳤을 수도 있으니 일단 검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강과 함께 있던 다른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더 큰일을 당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많은 인파와 사방에 불이 붙은 사건 현장에서 온전히 나오기는 힘들었다. 제이크는 물론 가까이 있던 조시와 다른 학생들도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저 나오는 길에 한 어린아이가 혼자 울고 있어 급한 대로 그 애를 안아서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때 불길이 삼킨 천장에서 마감재가 떨어지면서 해강의 등을 내려찍었고, 도망치는 인파에 밀려 쓰러지려던 찰나 소방대원이 그를 부축해 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린아이는 가스를 조금 마신 것 외에는 다친 곳이 없어 금방 부모를 찾아갔지만, 해강은 등에 입은 부상 때문에 침상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겉으로 번진 피에 비해 상처 자체는 심각하지 않아 해강은 속도 편하게 그저 엎드린 채 주변을 구경하고 있던 것이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나요? 호흡이 어렵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괜찮아요. 등말고는. 저기, 그런데 혹시 저랑 같이 왔던 친구들이 있는데, 그 애들도 여기 있나요?”

“친구들 이름이 뭐죠?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은 우선적으로 중환자실에 배치되고 있어서, 여기에 없고 중환자실에 있을 수도 있어요.”

한 간호사가 다가와 해강의 등을 체크하자, 해강이 친구들의 행방을 물었다. 친구들이 중환자실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열여섯의 해강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심하게 다친 거면 어떡하지. 역시 나올 때 다 같이 나왔어야 했는데. 하지만 눈에 들어왔던 그 어린 소년을 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 애는 인파에 깔려 크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급한 대로 눈에 먼저 들어온 이부터 살리는 것이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해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친구들의 이름을 쭉 읊자, 간호사는 잠시 옆구리에 끼고 있던 리스트를 검토하더니 대답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아, 여기 한 명은 현재 중환자실에 있네요. 조시 캐롤라인.”

“네?! 조시 캐롤라인이요?”

“제이크라는 분은 중환자실에는 없어요. 아마 다른 침상에 있을 테니 나중에 찾아보세요. 휴대폰 아직 가지고 계시면 직접 연락하시고.”

해강이 뭐라 더 물을 새도 없이 간호사는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마 더 들이닥치기 시작하는 환자들을 맞이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해강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시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말은, 지금 이곳 응급실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게 다쳤다는 말인데. 믿을 수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쯤은 해강도 알고 있었다. 점점 몸이 떨려왔다. 자신과 사람들을 덮쳤던 화마와 그 끔찍했던 순간들이 이제야 해강을 쫓아와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이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다른 친구들도 무사할 거라 믿다니.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자신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지금도 옆 침상에서는 신음을 토해내며 화상을 입은 팔이나 다리, 어깨 등에 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해강은 떨리는 오른손을 다른 쪽 손으로 꾹 잡았다. 당장 다른 친구들을 봐야 이 불안감이 조금은 해소될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형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해강은 단호했던 재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확신에 찬, 아니 그 스스로의 존재가 확신이 된 것처럼 당연한 얼굴로 충고했었다. 제이크의 차를 타지 말라고. 해강은 그 말을 무시하고 친구의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미친 남자가 경기장에 불을 질렀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두 사건의 연관관계는 이런 상황들을 설명하기에 극히 빈약하지 않은가.

대체 내가 제이크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고 해서 오늘 경기장에 테러가 일어난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제이크가 차를 운전한 것과 그 남자가 테러를 저지르는 것, 둘 사이에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채 해강은 막연한 기분에 침대에 주저앉았다.

“주해강.”

해강은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온통 영어와 외국어로 가득한 병원 응급실의 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해강의 모국어의 억양이 두드러지는 음성이었다. 그런 식으로 해강을 부를 사람은 단 한 명이었기에, 해강은 내려앉은 가슴을 안고 뒤를 돌아보았다.

“…결국 내 말을 안 들었구나, 너.”

정장 차림의 재희가,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싸늘한 얼굴로 해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을 하다 온 차림 그대로,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해강을 쳐다보다가 옆에 선 비서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형.”

지금 이 감정을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공포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나 지금 해강이 구하고자 하는 답이 재희에게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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