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재희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슬프기는 했으나 눈물이 날 만큼은 아니었다. 사실 재희를 키운 것은 그의 부모가 아닌 재희의 할머니이자 가문의 주인이었던 임진희였으므로, 오히려 제 할머니가 흘리는 눈물에 덩달아 슬퍼진 것뿐이었다. 낳아준 것은 재희의 부모였지만 재희와 그들의 연결고리는 그것이 끝이었다. 기억이 시작할 때부터 재희는 항상 그의 할머니와 그녀의 딸인 이모들, 사촌 누나들과 함께였다. 어머니의 기억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기는 했다. 재희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미 사라지고 없을, 태어날 때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크면서 점점 흩어져서, 자신의 두 눈으로 본 부모의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자신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을 안고 본가로 돌아온 부모의 얼굴은 기억이 났다. 아마 지금의 내 나이쯤 됐을 때려나.
임수희.
재희의 어머니이자 임진희의 막내딸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아버지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나는 편이었다. 사진으로 본 그녀의 유년 시절은 어렸던 재희와 많이 닮아있었고, 흐릿한 기억 속 막연했던 어머니의 얼굴과 일치하는 사람을 발견해 조금 놀랐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재희와 같은 나이에 재희를 낳은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 재희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런 행동들을 하고, 절대로 어기지 않았을 할머니의 말을 어기며 살았다. 결국 정해진 수순대로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남편과 함께 명을 달리했고 재희를 홀로 남겼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재희가 할머니의 밑에서 자라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부모가 사고사 했다는 것도 나중에 장례를 치를 때서야 알게 되었다.
임진희.
재희의 할머니이자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사람.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그 자신보다 더 주축이 되어버린 사람.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운동도 하며 자신의 사업을 끝도 없이 불리던, 그러나 그녀의 성공에는 단지 뛰어난 사업 수완과 똑똑한 머리가 전부는 아니었던 사람. 재희는 아직도 그녀의 그림자를 본다.
아직도 자신의 할머니, 임진희의 그림자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다.
처음 재희의 능력이 탄생이 나타난 것도 열두 살 무렵이었다.
아니, 발견했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임진희의 의견에 따르면, 그 가문의 ‘능력’들은 저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니까. 그걸 얼마나 때맞추어 갈고닦아 피워내는지, 아니면 그저 그대로 썩혀버려 묻어두고 사는지는 저마다의 팔자소관이라며 그녀는 호탕하게 웃곤 했다. 사실 임진희는 꽤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화도 잘 내고 괄괄하고 다혈질인 성격이라서 문제가 되곤 했지만.
“옷차림이 그게 뭐냐? 이제 넌 어린 아기가 아니야. 집 안에서라도 격식 있고 예의 있는 차림으로 다니도록 해.”
“또 그 더러운 흙장난이나 하는 거냐? 장난감이라면 충분히 있잖아. 밖에서 놀 거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씻어. 그렇지 않으면 저녁밥은 없다.”
“임재희, 우리는 보통 사람처럼 살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걸 못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뭐든지 완벽해야 해. 그게 우리 집안사람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고작 네 또래 초등학생 수준의 공부도 완벽하게 못 해내서야… 쓸모 없는 녀석. 박 선생에게 벌로 과제를 더 내라고 해야겠군.”
어느 날은 어린 조카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은은한 경멸을 참지 못했는지, 미희가 살짝 굳은 얼굴로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마, 밥 먹을 때는 그만 좀 잡으세요. 애가 식사 때마다 체하겠어요.”
“조카라고 두둔할 거 없다. 미희 너는 애들 관리나 똑바로 해. 도희 SAT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니? 올해 안에 못 붙으면 끝인 줄 알아.”
옆에서 밥을 먹던 도희가 입을 삐죽거리며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굴렸다. 괜히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밥을 깨작거리는 손녀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진희는 나이프를 들어 익힌 채소를 썰었다. 최근 들어 그녀는 칠순을 넘겼고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고기와 탄수화물을 줄이고 채소 위주의 식단으로 교정 중이었다. 그래서 더 예민해진 걸지도 모른다. 어린 재희는 제 나이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한 할머니가 ‘나이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꽤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재희가 아는 사람 중 그녀만큼 똑똑하고 건강하고 강단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이 먹는다는 건 그렇게 괄괄하고 무서울 게 없는 할머니도 조심스러워지게 만든다는 것인가. 재희는 진희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전혀 서럽거나 무섭지 않고, 오히려 내일 해야 할 숙제들을 떠올리며 남은 밥을 먹었다.
“재희야, 숙제하니?”
“네.”
불편했던 저녁식사 후, 잠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재희의 방에 노크한 것은 열 살 터울의 막내 사촌누나인 도희였다.
임도희. 그녀는 진희의 죽은 둘째 딸이 낳은 외동딸이자 손녀 중 제일 어린 막내였다. 물론 그것은 손녀 중에서였고, 재희가 들어옴으로써 실질적인 막내는 아니게 되었으나 식구들은 여전히 도희를 막내로 취급했다. 그것은 은연중에 재희가 아직까진 정식으로 자신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함의를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었다.
재희는 유일하게 진희의 핏줄 중 '살아남은' 남자아이였으니까.
“어휴, 나 여기서 좀 쉬다가 가야겠다. 내 방에 있으면 내 방인데도 편하지가 않아. 아까 할머니가 밥 먹는데 나 눈치 주는 거 봤니? 안 그래도 요즘 공부하느라 너무 힘든데 내년부터 나도 미희 이모 따라서 일 도와야 한다고 해서 부담스러워.”
“하지만 저는 누나가 부럽습니다. 저도 얼른 커서 할머니의 인정을 받고 가문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싶어요.”
“…얘, 너는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애늙은이 같니?”
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다리를 꼬고 침대 헤드에 기대 누운 도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편안한 홈웨어를 입은 도희는 더 이상 새하얀 원피스 잠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보수적인 면이 있는 진희는 다 큰 손녀가 다리와 목덜미를 훤하게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에 항상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다른 손녀들에 비해 당돌하고 애교스러운 도희의 화술에 언제나 넘어가버리곤 했다. 그런 도희에 반해 다른 사촌 누이인 서희는 언제나 할머니의 말이 하늘이고 모든 것의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창백한 안색인 서희는 병약한 미인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곤 했지만, 그만큼 예민하고 몸이 약한 구석이 있어 방 밖으로 나다니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제 할머니의 눈밖에 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모순적으로 그녀의 눈에 띌까 봐 집 안에서도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다니는 사람이었다. 도희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을 뿐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그녀는 이미 진희의 손녀들 중 제일 먼저 가업을 잇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재희는 언젠가 누나들이 받는 그 ‘교육’이라는 것을 자신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남자아이지만, 나 외에 한 명도 남자아이가 가업을 이은 적은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언젠가…
“…누나. 저는 언제쯤 누나들이나 이모들처럼 할머니의 일을 도울 수 있게 될까요?”
“…그런 거 안 하는 게 좋아. 뭐가 좋니?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해. 싫은 사람들하고도 웃으면서 어울려야 하고, 게다가 머리는 좀 좋아야 하니? 차라리 학교 성적 잘 받으라고 할 때가 좋은 거야. 적어도 공부는 정해진 답이 있고, 노력하면 보이는 실적이 있잖니.”
“하지만… 저는 제 능력을 언제쯤 발견할 수 있을까요?”
“글쎄다… 서희 언니가 열여덟에 발견했는데 빠른 편이라고 했으니까. 나도 사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누나는 조급하지 않으세요? 얼른 당당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가업을 잇는 게 좋잖아요?”
“그거야 어른들 사정이지. 솔직히 말하면… 얘, 너 이거 어른들 앞에서 말하면 안 된다? 서희 언니나 예희 언니 앞에서도 안 돼.”
“네.”
재희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도희는 주변을 살핀 뒤, 방문이 제대로 닫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낮춰 속삭였다.
“있지, 나는 할머니의 대를 이을 생각 없어.”
“네? 하지만…!”
“쉿! 조용히 말해. 예희 언니 귀 밝은 거 알잖아!”
도희는 어린 사촌동생의 입 앞에 검지를 세워 주의를 준 후,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직은 그냥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 할머니는 내가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걸 쓸모없는 일이라고 하시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정해준 대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요즘은.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오히려 나는 아직까지 내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보통 사람처럼 살 거니까.”
재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사람들은 모두 같은 수순을 밟아 자라서 같은 일을 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았다. 모두 할머니처럼 자신의 능력을 개화시키고, 어른들의 지도대로 교육받고, 할머니를 도와 가업을 잇고 더욱더 부흥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라고 배웠는데. 재희는 갑작스러운 궁금증들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풀던 수학 문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집을 슬쩍 덮은 재희는 아예 몸을 돌려 누이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는 지난주부터 큰 이모님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죠?”
“응. 아직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모도 내 능력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교육보다는 전반전으로 기초를 다져놓는 게 좋다고 하셔서. 별다른 건 없어.”
“그럼…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확히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누나는 곧 알 수 있겠네요?”
도희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가 재희를 돌아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직은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하지만 저는.”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나 보다. 숙제하던 거 해. 나도 이제 시험공부하러 갈 테니까.”
도희는 벌떡 일어나 어린 동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재희는 뭔가 마뜩잖은 기분에 입맛이 썼지만, 다시 고개를 떨어트리고 문제집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