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재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할머니 임진희에 대해 주변인들의 평판이 어떠했는지는 항상 변함이 없었던 걸 기억한다.
"임 사장? 아아, 아주 굉장한 사람이지. 사업 파트너로서 아주 완벽한 사람이야.”
“임 사장님이요? 원하신다면 소개해 드릴 수는 있지만, 그분은 고객을 가려서 받거든요. 그분 마음에 들어야지만 계약을 맺는 타입이시라…”
“적어도 그 여자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은 없지. 무슨 일을 하냐고? 글쎄… 거의 모든 일?”
“임 회장님은 아주 귀하신 분이야. 듣기로는 그분이 후계자 양성을 위해서 자식들과 손녀들을 모두 손수 가르치신다는데… 그 분만한 인재가 또 있다면 엄청난 일이지.”
“임 회장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제발, 아아악…!”
임진희.
그녀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의 진의 여부를 가리기는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한 번이라도 그녀를 직접 대면한다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자, 정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그녀와 함께 일했던, 또는 일하는, 또는 앞으로 일할 예정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두고 입을 모아 말한다.
임진희의 눈을 보면 거짓말 따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모든 일은 그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
…그래. 모든 것은 그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그들의 기대와 염려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미묘하게 틀린 점이 있다면 바로 그 순서일 것이다.
임진희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는 것뿐.
임진희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당시 분위기상 아이의 성별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의사는 웃음을 지으며 ‘아버님을 많이 닮겠네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닮을 것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아무리 순진한 산모들이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는 힌트였다. 그 당시에는 딸보다 아들을 원하는 극성 부모들 때문에, 또는 그러한 부모 스스로의 선택 때문에, 병원에서는 직접적으로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일찍 포기할까 걱정되는 의사들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곤 했다. 하지만 의사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얼굴로,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진료실을 나설 때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까지, 진희는 멍한 얼굴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곧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게다가 첫아이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겹경사에 연신 벙글벙글 웃으며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어떤 얼굴로 배를 쓰다듬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우리 아이 낳으면 이사도 가야겠다. 그렇지, 여보? 애가 커 가면 지금 사는 집은 앞으로 작을 텐데, 자기도 내 직장 동료 김 대리 알지? 그 사람이 그러는데 지금 서울 부지가 앞으로 많이 개발될 거래. 그전에 미리 땅을 사서…”
“…여보.”
“응?”
병원에서 나온 진희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딱 하나였다.
“나, 이 애 지울 거예요.”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아내가 지금 한창 조심해야 할 시기의 산모라는 것도 잊은 채 남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여보, 당신 갑자기 왜 그래? 안 그래도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고, 산모답지 않잖아. 기쁘지 않아? 우리 아이가 아들이라는데, 응?”
“그러니까, 아들이라잖아요.”
“그게 뭐?”
“난 아들은 낳을 수 없어요.”
진희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꿈결같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마치 멀고도 먼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듯한 눈이어서, 남편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제 옆에 앉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낳아봤자 죽는대요.”
그것이 진희가 처음 받은 계시였다.
스물셋, 임진희는 처음으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라기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희미한 광경을 보았고, 내가 선 채로 꿈을 꾸나 싶어 고개를 내저으려던 찰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안 돼.
무슨 소리지? 분명 옆에는 남편이 앉아있고, 앞에는 의사가 앉아 진희의 초음파 사진을 두고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을 때처럼 귓가가 멍멍한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홀로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기분. 그 사이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어차피 낳아봤자 죽어. 그러니 아직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아직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을 때, 손쉽게 없애버리는 거야. 그게 나아.
무슨 헛소리야. 내 아이라잖아. 절대 그렇게는 못해.
-아들은 안 돼. 네가 아들을 낳으면 네 남편은 죽을 거야.
그 말에, 진희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그녀의 멍한 눈에 빛이 돌아오자 그제야 주변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병원이었는데 어느새 차 안에 타 있는 자신을 보며 의아해하던 진희가, 옆에서 즐겁게 종알거리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남편이 죽을 거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진희는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의 집을 떠나 모든 연을 끊고 홀로 살던 사람이었다. 인생은 혼자라고 믿던 진희에게 유일하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얘 못 낳아요.”
진희는 바로 다음 주에 다시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진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낙태를 위해서였다.
그 이듬해 진희는 다시 임신을 했다. 이번에는 딸이었다. 예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고, 진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열 달은 괴롭고 지루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첫아이를 품에 안은 기쁨에 남편은 병실 안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 우리 가족을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진희는 첫 딸아이의 이름을 미희라고 지었다. 윤미희.
그렇다. 임재희의 큰 이모이자 진희의 장녀의 이름은 원래 윤미희였다. 지금의 임미희가 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다 있었다.
미희가 첫돌을 넘기기도 전에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남편의 추락사로 진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과 누군가와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살다가 다시 혼자로 남는 것은 큰 차이점이 있었다. 먼저 진희는 다시 직장에 다녀야 했고, 그녀의 직업은 원래 은행원이었다. 딸의 돌도 지내지 못하고 남편을 여읜 진희는 아직 20대 중반이었고, 젊은 그녀를 딱하게 여긴 은행장을 그녀를 다시 복귀시키고 이런저런 선 자리를 알아봐 주었는데, 진희는 전부 거절하고 꿋꿋하게 주어진 업무를 끝내면 집으로 바로 돌아갔다. 다행히 그때는 동네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이웃들이 모두 오며 가며 봐주기도 할 시절이었다. 친정과 연을 끊고 나와 남편마저 죽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를 이웃 할머니가 딱하게 여겨주는 덕에 미희는 별 탈 없이 유년기를 보냈고,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미희를 학교에 입학시켰어도 진희는 여전히 서른을 갓 넘긴 창창한 나이였기에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재가를 권유했고, 그러던 중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다니는 은행에 자주 오던 고객이었는데, 듣기로는 꽤 유망한 사업을 굴리는 손이 큰 남자라고 했다. 은행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둘은 사적으로 만남을 가졌고, 진희도 그만하면 우리 미희 힘들게는 안 키우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미희는 막 학교가 끝나 조금 전에 돌아온 참이었고, 토요일이어서 진희는 출근 대신 오랜만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방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든 딸의 고른 숨소리가 이따금씩 들렸고, 집 안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바빠지기 시작한 거래처와의 계약 때문에 주말 내내 지방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진희는 미희의 바지를 개다 말고 갑작스레 시원한 과일이 먹고 싶었다. 새콤달콤한 귤이나 딸기, 시원하고 물이 많은 수박, 달달하고 향기로운 사과, 하다못해 캔에 든 통조림 복숭아나 파인애플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간 진희는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냉장고에 넣어둔 파김치의 냄새가 너무 역하게 풍겨왔다. 분명 이틀 전 스스로 재료를 사다가 담근 것인데도, 이상하게 너무나도 역겹고 불쾌했다.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내고 싶을 만큼.
그 순간 진희는 놀라 굳어버렸다.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음울하고 흐릿하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