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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13화 (113/166)

113화

목소리는 더욱 명확해지고 또렷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진희는 결국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어떤 착각이나 환청 따위가 아님을, 또 다른 의지와 자아를 가진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결국 내가 미쳤구나, 무당집엘 가서 굿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녀의 귓가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따위 것들은 날 당해내지 못하지. 쓸데없는 낭비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넌 탄탄대로야. 그러니 나를 믿어.

참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희는 그 목소리가 일러준 대로 상황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은 우연, 두 번째도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으나, 세 번째부터는 진희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 나를 못 믿겠으면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하면 되잖아? 결과는 네가 직접 확인해.

키득거리는 목소리에 부아가 치민 적도 있었다. 실제로 진희는 목소리가 자신의 환청이라고 여기고 무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목소리는 그날 바로 오후에, 집에서 나가지 말고 있으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걸 무시하고 동네 시장에 나가 장을 보려던 그녀 바로 곁에, 간발의 차로 화물트럭이 돌진해 전봇대를 들이박은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방금도, 그 목소리가 갑자기 자신을 불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저 화물트럭에 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산조각이 난 것은 저 전봇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사고 현장에 놀라 본능적으로 배를 끌어안고 주저앉자, 옆에서 나물을 팔던 노인과 오토바이를 타려던 중년의 남자가 진희를 부축하며 박살 난 트럭 근처에서 끌어내 주었다. 진희의 배는 여전히 납작했지만, 주변인들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젊은 주부가 배를 감싸고 쓰러지자 부리나케 도우러 온 것이다.

“아기 엄마, 많이 놀란 거요? 괜찮은가?”

진희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 살아 있으며, 그 목소리가 자신을 구한 거라며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행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자신을 걱정하는 노인의 말소리들은 이제 바깥쪽의 소리가 되었다.

진희의 안쪽의 소리는, 그날부터 그 목소리가 되었으니.

“…내 남편은… 왜 죽은 거야? 네가 시키는 대로 했잖아. 처음 생긴 내 아들… 네 말대로 지웠어. 그런데 왜 내 남편이 죽었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확실한 건 그때 네가 아들을 낳았으면 바로 남편이 죽었을 거였다는 것뿐. 내 말을 들은 건 잘한 일이지만, 어디 인생사 내다보는 일이 쉽겠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인생은 다 그런 거야.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얽혀있어. 나비의 날갯짓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그때 네 남편이 당장 목숨을 건졌어도, 그 후의 일은 나도 모르지. 네가 나를 무시하고 귀를 닫아버렸으니까.

진희는 밤새 울면서 누군가에게 빌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밤마다 어린 딸이 자신의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소리에 겁먹고 깨는 것도 모른 채, 진희는 며칠을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채로 버텨야 했다. 아니, 오히려 진희는 누구보다도 제정신이었다. 그저 남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게 보일 뿐.

“네 말대로 했잖아, 그런데 왜 그이가 죽은 거야, 어째서, 어째서…”

-사람은 별거 아닌 일로도 죽어. 그리고 너는 새것을 이미 얻었잖아? 더 잘 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 아니야?

“닥쳐!!!”

진희는 어느새 안방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눈물로 젖은 얼굴을 한 어린 딸이 보였다.

“어, 엄마…”

“…미희야…”

“엄마… 왜 그래? 왜 소리를 질러… 아빠랑 싸운 거야?”

진희는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지. 남편이 죽어도 내 곁에는 여전히 딸이 있었다. 그리고 그이도…

“어디 아파? 병원 갈래?”

“…아니야, 엄마 괜찮아. 다시 들어가서 자.”

“…그치만… 그치만 엄마가…”

결국 아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느라, 일하느라, 홀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다시 사회에 뛰어드느라 한 번도 제대로 안아주고 놀아준 적도 없는.

목소리는 미희가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시 조용해진 머리가 살짝 어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진희는 비틀비틀 걸어가 딸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오늘은 엄마랑 잘까?”

“…응.”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딸이 작게 대답하자, 진희는 미희를 안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이 눕기에는 좁은 이부자리 위에 꼭 붙어 누운 채, 두 모녀는 그렇게 젖은 눈으로 잠들었다.

…아니, 세 모녀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이제는 부쩍 자란, 아니 자라다 못해 나이가 든 얼굴의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은 앨범 속에는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이 섞여 있었고, 자신이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그때 당시로서도 비싸고 귀했을 컬러 사진들이 이어져 있었다. 앨범의 맨 앞장으로 가면 작은 꼬까옷을 입은 아기와,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어리고 젊은 진희가 그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사진으로 몇 번이나 봤지만 여전히 미희에게는 남처럼 보이는 얼굴. 오히려 그다음 장부터 등장하는, 역시나 지금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더 낯이 익다. 아버지는 전도유망한 사업체를 굴리던 사업가였고, 어느 날 부도가 난 회사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행방불명이라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성화였지만 어머니인 진희는 단호하고도 쓸쓸한 얼굴로 말했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까.”

갓 스무 살이 되었던 미희는 아직도 아버지가 어째서 자살을 했는지, 그리고 그걸 어머니가 어떻게 아는지, 둘 사이에 자식으로서는 모를 어떤 대화라도 있었던 건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재산을 처분하고 빈 관으로 장례를 치르면서도 미희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들었으므로.

다음 장으로 앨범을 넘기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찍혀있었다.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와 그 옆에 진희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어린 미희, 그리고 다음 장에 교복을 입은 미희와 흰 원피스를 입은 윤희, 또 진희의 품에 안겨있는 갓난쟁이 선희가 있었다. 모두 미희의 동생들이었고, 전부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장에는 대학생이 된 불퉁한 얼굴의 미희와 나이 든 진희, 그리고 또 그녀의 품 안에 안겨있는 수희였다. 제 부모와 언니보다 일찍 죽어버린, 엄마인 진희의 뜻에 항상 반하는 인생을 살면서 자유를 갈망하다가, 결국 운명의 끈에 걸려 죽어버린 나의 막냇동생.

둘째인 윤희와 셋째인 선희도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미희는 여전히 살아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진희의 곁에서, 충실한 딸로 그녀와 그녀의 일을 도우면서. 죽은 동생들도 모두 미희처럼 어머니를 돕고 그녀의 말 잘 듣는 딸 노릇을 했지만, 미희만큼 진희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들조차 그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 모두 중년의 나이에 사고로 죽었고, 슬하에 딸 하나둘씩만을 남겼다. 미희의 조카이자 진희의 손녀딸들은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전부 같은 집에서 같은 옷과 같은 식사,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막내인 수희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딸이 아닌 아들을 낳고 죽었다. 아마 그 애가 일찍 떠나게 된 것도 진희의 말을 듣지 않아서, 멋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아버린 것이 화가 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운명은 말을 잘 듣는 아이라고 해서 특별히 예뻐하는 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구는 아이에게는 철저하게 그에 응하는 벌을 내리곤 했으니까.

나이 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지라 미희는 막내 수희를 거의 조카들과 함께 돌보다시피 했다. 수희도 조카지만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서 같이 자라면서 어머니의 훌륭하고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지. 우리 수희를 꼬여낸 그 더럽고 천한 자식.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우리 수희는 나처럼 엄마 밑에서 큰 영광을 받고 착한 딸로 살 수 있었을 텐데. 미희는 이미 끝나버린 앨범의 마지막 장을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 애가 남긴 그 핏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진희는 그 남자아이에게 재희라는 이름을 주었고, 원래였다면 죽여 버렸을 아들을 자신의 집에 들였다. 그녀들의 집은 금남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미희는 그동안 지켜온 자신들의 규칙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데에 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 규칙을 만든 것도 진희였다. 그러니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칙을 깨버리고 예외를 들인다고 해서 미희가 지적할 수는 없었다. 전부 우리의 어머니께서 뜻하시는 대로. 그녀의 딸들이 해야 할 것은 그것뿐.

수희야. 그곳은 평안하니.

나도 아마 멀지 않아 너를 다시 만나게 되겠지. 윤희도, 선희도.

어쩌면 수희 너는 천국에 갈 테니 우리와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너는 응당 그런 곳이 어울리는 아이였으니, 우리와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당연해. 언니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질 테니까. 그곳에서는 우리의 업의 굴레와 역사를 모두 잊고 행복하기를 바라.

너의 못난 큰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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