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재희는 눈을 뜨고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에서 깨긴 했으나 여전히 꿈 속인 것 같아서였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몸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느껴지고, 흐릿했던 초점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재희가 중얼거렸다.
“…별일이네.”
재희가 과거에 있었던 기억을 꿈으로 꾼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언제나 그는 눈을 감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보곤 했으니까. 이미 일어났던 일이 꿈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재희는 한참을 그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꿈 내용은 별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희가 나왔다는 것뿐. 역시나 이른 나이에 죽어버린, 나의 착하고 다정했던 사촌 누이.
임도희.
재희는 아직도 자기를 제일 예뻐해 주고, 자신을 제일 먼저 자신들과 같은 집안의 일원으로 받아주었던 그녀에 대해 종종 떠올린다. 자신과 꼭 열 살 터울이 났던 막내 누나. 집안 특성상 재희에게 사촌 누나는 여럿이었지만, 아마도 누나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그녀일 것이다. 재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도희는 그다음 날, 목을 매 자살했다.
수희와 그녀의 남편의 장례를 치르던 날, 그들의 시신을 화장해 유골 함에 넣던 그날 밤, 도희는 어린 동생의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부정했다. 동시에 그날은 진희가 도희를 불러 그녀가 해야 할, 앞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끈덕지고 지긋지긋한 운명에 대해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스물두 살이었던 그녀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인 진희는 굳이 도희가 공부를 하고 대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딸들은 전부 진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따랐고, 다른 길에 대해서는 궁금증도 품지 않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살 뿐이었다.
그러나 수희는 언니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을 거부했었다. 원하는 사람과 사귀고 원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마음대로 살고 싶어 했다. 명백하게 다른 삶을 살길 바라는 수희를 보고 미희와 그녀의 동생들은 동생이 엇나갈까 두려움에 떨었다. 어머니인 진희의 말을 거스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녀들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건 오직 진희뿐이니까. 그녀들은 처음에는 어린 동생을 달래기도 하고, 나중에는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겁을 주고 협박하기도 했으며, 어느 날 화가 난 진희가 아직 중학생이던 막내딸을 질질 끌고 가 다락방에 가둬버린 일도 있었다. 이미 딸을 낳아 육아에 여념이 없던 미희는 당시 남편과 함께 분가를 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진희가 그 정도로 히스테릭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직 본가에서 사는 미희보다 어린 여동생들은 모두 엄마의 말에 꼼짝도 못 하고 살았기에, 매사에 엄마의 뜻에 반대하고 어깃장을 놓는 수희가 저렇게 혼이 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락방에 갇힌 동생에게 사흘 동안 물도 밥도 주지 말라고 엄포를 놓자,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째 되던 날, 하루 종일 소리치고 울며 빌던 수희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밤, 그녀들은 밖에 나가 사는 큰언니에게 몰래 전화를 걸었다.
‘언니, 엄마가 수희를 다락에 가뒀어. 물도 밥도 주지 말래. 저러다 죽으면 어떡해?’
그 전화를 받자마자 미희는 아직 어렸던 쌍둥이인 서희와 예희를 안고 한달음에 달려왔고, 빗장으로 단단히 잠긴 다락방 문고리를 부수고 힘없이 쓰러진 막내를 구출할 수 있었다. 그때 미희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없으면 이 애들은, 꼼짝없이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나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내 딸이, 내 조카들이, 계속 이런 운명의 굴레에 발목이 묶여 살다가 어느 날 돌연 죽어버리겠구나.
실제로 미희의 불안한 예감이 어느 정도 들어맞기도 했다. 둘째와 셋째가 마흔이 되기도 전에 죽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수희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떼어주고 파문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어린애를, 아직 미희의 눈에는 마냥 어리기만 한 막냇동생을 알아서 살라며 험한 세상으로 내쫓은 것을 미희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니 수희가 명절에도 본가에 잘 오지 못한 것도, 진희의 눈을 피해 몰래 자매들과 안부만 전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 애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남자. 수희가 사랑했다던 그 남자. 그만 아니었다면 진희는 결국 수희를 용서했을 것이다. 번번이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는 딸일지라도, 부모 자식 간은 하늘이 이어주는 사이 아니던가. 심지어 제 배 아파 낳은, 노산이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기어코 생사를 오가며 낳은 막내딸이었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 남자만 아니었어도, 그 염치없고 주제도 모르는 남자만 아니었어도. 분명 엄마는 수희를 다시…
그러나 미희는 생각했다.
어린 조카의 장례를 치르며, 동생 수희의 상을 치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여전히 그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생각했다.
도희는 왜 죽어야 했을까.
그 생때같이 어린애가,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아이가…
왜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니, 왜 스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그 도망의 끝이 죽음뿐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이른 나이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는지. 미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희는 분명 수희와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죽은 둘째의 핏줄이자 자신의 막내 조카딸인 도희. 새콤한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고, 배드민턴 치는 걸 좋아하고, 할머니에게 제일 혼이 많이 나면서도 기죽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을 혼낸 할머니에게 뽀뽀를 하는 것도 서슴지 않던 도희.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던 도희. 수희 이모처럼, 다른 이모나 언니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이 집을 벗어나 살아보고 싶다고 당당히 말하던 도희.
미희는 메마른 눈으로 우는 아이들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우는 서희의 등을 토닥이고,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예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장례식장의 직원들은 그녀들이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나 궁금해하다가도, 여기저기서 속닥이는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박복해도 정도가 있지, 어쩌면 그런…’
‘저기 주인집 할머니 있잖아요? 소문으로는 그 사람이 신기가 있대. 그래서 다 자식들이 업보를 받는 거라고 하더구만.’
‘부평 댁, 그런 소리 하다가 손님한테 들리면 큰일 나!’
‘남자 하나도 없이 다 딸들만 데리고 사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저기 그 뭐냐, 돈도 엄청 많은 어디 회장인가라고 하던데. 돈 많아 봤자 무슨 소용이야. 딸 장례 치르고, 바로 다음 날에 이제는 손녀 장례를… 어이구, 지독하다, 지독해.’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대요, 정말… 전생에 죄를 얼마나 지어야…’
재희는 끝까지 도희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아니, 재희에게 남은 도희의 마지막 모습은, 그저 무언가를 보고 두려워하며 방에서 뛰쳐나간 그 모습이었다.
누나가 본 건 대체 뭐였을까.
무엇이 그토록 누나를 겁에 질리게 한 걸까. 뭐가 그렇게 무서웠길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그날 이후로 진희의 성정은 더욱 불같고 괴팍해져 갔다. 결국 그녀는 손녀의 장례를 치르고 꼭 5년 후, 같은 날짜에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임진희의 영광스럽고 빛나던 역사는 그녀의 쪼그라든 시신과 함께 매장되었고, 조상과 남편이 묻힌 선산에 묻혔다. 그녀의 베개 밑에서 찾아낸 유서에는 간결한 내용만이 담겨있었다.
‘내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전부 손자 임재희에게 양도한다.’
딱 그 말뿐이었다.
수십 년 동안이나 그녀를 수발한 큰딸 미희, 미희의 딸인 서희와 예희, 그리고 다른 친척 그 누구도 아닌, 그렇게 미워하고 내쫓아버린 수희의 외아들인 재희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는 내용. 유언은 조작되지도 않았고 잘못 쓰이지도 않았다. 몇 주 동안이나 변호사와 회계사, 진희와 연이 있던 법조계 사람들, 그리고 경찰들까지 그녀들의 집을 드나들며 조사를 했다. 온 가족을 심문하고 캐물었지만 나온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유명하던 임진희의 죽음이 순전히 자살인 것을 깨달았고, 전혀 가능성이 없던 유언장도 진실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언을 집행하기 위해 진희의 변호사는 재희는 호출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선 재희는, 어릴 때 보았던 흐릿한 인상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어 청년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변호사는 진희와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이제 그 집의 새로운 주인은 재희가 되었다.
집뿐만이 아닌, 임진희의 모든 재산과 사유지, 호적에 딸린 식솔들까지 모두 재희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재희는 그날, 5년 만에 도희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재희는 지금도 여전히, 도희가 나오는 꿈을 꾼다.
어쩌면 누나가 그때 보고 놀랐던 것은, 그토록 무서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던 괴물을 보아버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