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눈앞에 누워있는 소년을 본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다. 재희는 무거운 눈을 깜박여 소년을 똑바로 보려 애쓴다. 더 명확한 선을 가진 해강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 아직 새벽이 온통 빛에 물들기 전 스며든 별빛이 소년의 얼굴에 남아있다. 재희는 꿈속에서 보았던, 화마에 휩싸여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에 해강을 떠올렸다. 불씨가 어른거려 소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과 반대로,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등말고는 보이는 것은 없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다. 재희에게 그런 꿈은 익숙했다. 자신의 부모가 죽고, 자신을 제일 예뻐하던 사촌 누이가 죽고 나서부터.
아니, 사실은.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재희는 꿈을 꿨다.
꿈을 꾸면 보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그는 열두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본 것들과 일어나는 일들, 재희는 그런 것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떨 때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것. 착각할 수 없는, 비로소 분명하게, 가족의 죽음을 보았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재희는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의 ‘목소리’는, 이미 내 곁에 있었구나.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가까이 내 안에 있던 것.
진희에게는 ‘목소리’였다면, 재희에게는 ‘꿈’이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날카로운 성격과 불안증 탓에 신경성 질환을 앓았다. 집 안은 항상 조용해야 했고, 누구라도 뛰거나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됐다. 할머니에게 목소리가 더욱 커질수록 그녀는 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희는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가 죽고 나서, 아니 그전에 도희가 죽고 나서부터 재희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깨지기 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고,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운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은 바뀌지 않고, 나는 평생 잠 대신 꿈을 꾸며 수많은 미래를 볼 것이라는 것을, 재희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말했잖아. 제이크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재희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강은 오랜 꿈이라도 꾼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응급실 안은 넘쳐나는 환자들로 곳곳에서 비명과 의사들의 오더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 시끄럽고 복작거리는 아비규환 속에서, 재희는 해강의 침대 옆 의자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쯤의 침통한 탄식과, 반쯤의 원망이 담겨있었다.
“…그럼…그러면… 형은… 이 모든 게 일어날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피해를 최소한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도 노력한 거야. 대체 내 말을 왜 안 들은 거니?”
해강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재희가 봤던 꿈과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어쩌면 자신밖에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정말로 재희의 말을 들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전부 믿기지 않았다.
제이크는 운전에 아직 미숙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차를 받은 지는 꽤 됐지만 실제로 몰아본 경험은 많지 않아, 제이크는 아침에 학교로 차를 몰고 올 때 차의 주유 구를 제대로 닫는 것을 깜박했다. 그러나 브레이크 고장이나 엔진 문제처럼 티가 나는 흠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휘파람을 불며 주차해둔 차를 꺼내와 해강을 기다렸고, 둘은 도로를 빠르게 달려 시티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해강과 마주쳤던 남자는 원래부터 테러리스트 집단에 몸담은 범죄자로 이미 수배에 오른 사람이었고, 마약과 술에 항상 절어 사는지라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때도 해강이 부딪혀 친절히 떨어트린 라이터를 주워주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자신이 라이터를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정처 없이 넓은 주차장을 돌아다니다가 계획한 범죄를 이행하지 못하고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해강과 마주친 것, 그것도 하필이면 무방비하게 기름이 새는 차를 제이크가 몰고 도착한 주차장에서, 시시덕대며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젊은 두 친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남자가 충혈된 눈으로 그들의 차를 더듬으며 휘발유의 냄새를 맡게 된 것은 정말 하나의 작은 일에서 일어난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후에 잡힌 공범들의 진술에 따르면, 남자의 동료들은 그가 술과 약에 절어 나타난 것을 보고 혀를 차며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애초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낼 생각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때는 마침 큰 경기가 열리던 날, 관람객의 수는 예상보다 더 많았고, 그 입구부터 자동차에서 뽑아낸 넉넉한 양의 휘발유가 뿌려져 모든 것을 더 잘 태울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그 정도로 큰 화재가 일어날 줄 몰랐다고, 그저 그들이 경기장 밖에서 난동을 피우는 정도로 끝날 뻔했던 그 사건은, 그 테러범이 어느 한 소년이 자신에게 친절히 라이터를 주워주고 갔기에, 그것이 자신에게는 하나의 계시였다고 주장하는 헛소리로 인해 몇 주간은 계속 언론과 뉴스를 뒤덮었다.
조시 캐롤라인은 팔과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학교를 휴학했다.
제이크와 헤일리는 몇 주 동안 입원한 후 다시 학교에 나갈 수는 있었지만, 헤일리는 그 뒤로 운동을 그만둔 뒤 정신과 상담을 다니게 되었고, 제이크는 차를 압수당하고 무척 제한적인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강은 집에서 그런 소식들을 들으며 생각했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의 안일함과 오만함으로 불꽃처럼 일어난 사건이 수많은 피해를 냈고, 친구들은 이 사건을 아마 덧난 흉터처럼 평생 안고 가야 할 것이라고.
해강은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정말 형의 말을 들었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럼 그때마다 형은 전부 알 수 있는 건가. 형은 초능력자 같은 걸까. 하지만 왜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세계에는, 아니 적어도 해강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과 범죄들이 끊이지 않는 걸까.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서. 형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일어날 일을 아예 없던 걸로 만들 수는 없어.”
지루한 얼굴로 큐브를 맞추며 재희가 대답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자퇴서를 제출하고 귀가한 해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던 해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나름대로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재희의 태도는 너무나도 가볍고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웃음기까지 서려있었다. 틱, 틱 소리를 내며 큐브를 돌리던 재희는 이내 여섯 개의 면이 각각의 색을 찾자 큐브를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비스듬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아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똑바로 해강을 건너다보았다.
“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쉽게 말했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 단순히 미래를 보는 일이 아니야.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도 없어. 그냥 꿈속에 나타나면 받아들이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형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봤다면서. 그래서 그걸 막은 적도, 그대로 둔 적도 있다고 했잖아. 왜 그대로 두는 거야? 다른 거면 몰라도 그게 이번 일 같은 큰 범죄나 나쁜 일이면 막아야 하는 거 아냐?”
해강은 어쩌면 가장 묻고 싶었던, 그리고 재희가 가장 가치 없다고 느끼는 질문을 던져버렸다. 재희의 얼굴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어?”
“그래. 네 그 안일하고 착해빠진 생각대로, 이번에 있었던 테러 사건을 내가 일주일 전에 미리 알았다고 하자. 그리고 그걸 어떤 수를 써서든 막았다고 치자. 정말 너 하나만 안 가도 되는 문제였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끝날 문제였다면 나는 그날 밤 네 다리를 부러트렸겠지.”
덤덤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눈빛은 무척 서늘하고 진지해 보여서, 해강은 뒷목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걸로 되는 문제였을까? 그러면 충분했을까? 아니.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도, 내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에 의해서도, 대답은 절대로 ‘아니’야. 미래는 수천, 수만,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이루어져 있어. 그중 어떠한 수를 막는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경우의 수는 그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어. 왜냐하면 모든 범죄와 사고는 인간들의 행동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데다,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수는 전 세계에 70억이 넘으니까. 비유하자면 그와 같은 수만큼의 경우의 수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런… 하지만, 그건 너무 과장이야. 이번 사건은 공범을 합쳐도 다섯 명도 안 되는 인간들이 벌인 일이야. 나까지 경우의 수에 넣는다면, 아니 제이크와 내 친구들을 넣어도 열 명도 안 돼. 게다가 경찰이나 시 당국에 미리 알렸다면? 당연히 미리 조치를 취했겠지.”
“너는 정말 가까운 일만 생각하고 나중 일은 생각할 줄을 모르는구나.”
재희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가 이미 그가 더 이상 해강을 상대해 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내일 아침 나를 따라와. 보여줄 게 있으니까.”
그 말만 남기고는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해강은 어안이 벙벙한 채 소파에 앉아,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일, 보여줄 게 있다. 따라오라니, 설마 형이 일하는 곳을 말하는 걸까. 사실 해강은 그에게 입양된 후부터 한국이든 미국이든 항상 같은 집 안에서 살고 생활했지만, 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집안의 고용인들은 전부 재희의 일에 대해 함구했고, 하다못해 가정교사나 운전기사조차도 재희와는 몇 번 만나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그저 해강을 어렸을 때부터 친동생같이 돌봐준, 한국에서부터 같이 생활한 하녀 한 명만이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을 뿐이다.
“글쎄요, 임 사장님은… 저희 같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이죠. 도련님도 나중에 자라면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하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아닌 약간의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어린 해강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