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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17화 (117/166)

117화

그리고 그 기억은 여전히 해강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형이 일하는 곳, 재희의 직업. 그는 사장이라고 불리고, 일종의 사업을 하고 비즈니스 상 여러 인사들을 만나러 다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집에 잘 들어오지 않을 만큼 바쁘고, 생활이 불규칙적이며, 잠을 언제 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해외에 다녀오는 일도 잦다. 그러나 해강은 언제나 자신이 이상하리만치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자랐고, 미국에 와서도 동네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동네의 큰 집에 살며,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는 걸 상기했다. 필요한 모든 것은 전부 하녀와 가정교사가 미리 준비해 내밀었고,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돈을 쓸 일도 없어 재희가 준 카드도 그저 방 서랍 안쪽에 고이 모셔두었을 뿐이다. 그걸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이나 소다를 사 먹기 위해 약간의 현금만 필요해 계좌에서 빼서 쓰는 것 외에 해강은 가계의 금전적인 것에 대해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열여섯 살이 되도록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해강은 덜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이렇게 많은 고용인과 큰 집에서 살지 않는다. 대가족이면 모를까, 둘이서 사는 집에 방이 여러 개일 필요도, 언제나 재희의 곁에 수행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도, 해강은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당연했던 시절은 지나고 새로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대체 재희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막연히 사업을 굴리는 사람이라기에는 지난 며칠간 그가 보여준 행동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 사고가 있고 나서부터 재희는 이제 더 눈치 볼 것도 없는 사람처럼 집에 더 오래 머무르며 마음대로 행동했다. 어쩌면 그게 재희의 진짜 성격일지도 모른다고 해강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어린애같이 마음대로 짜증을 내거나, 새벽에도 집 안을 돌아다니며 방문을 열고 다니고,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주 잠들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침실이 아닌 1층 구석의 작은 서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잠을 정말 제대로 자기나 하는지 의심스럽지만. 보통 사업가라고 해도 규칙적인 리듬을 갖고 사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 정도는 해강도 알고 있었다. 재희는 거의 먹지 않았고, 가끔 뭔가를 먹을 때는 이상하게 한밤중에 냉장고를 열어 손질되지 않은 생 피망을 씹어 먹거나, 우유 한 팩을 따서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리는 등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다. 해강은 점점 재희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오늘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이다. 재희의 그 능력에 대해, 혹자는 신이 그에게 내린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인.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재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해강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밤은 길고 잠은 오지 않았다.

***

“내려.”

아침이 되자 재희는 해강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 평소에 직접 모는 차량이 아니라 언제나 수행원이 몰고 와 재희를 데려가는, 새까만 벤츠였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ㅡ일찍 일어난 건지 잠을 전혀 자지 않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ㅡ준비를 한 재희는 지난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원래도 곱상한 외모에 선이 가는 편의 미인이었지만, 머리를 깔끔히 넘기고 정장에 코트, 장갑까지 맞춰 입은 재희는 일반인 같지 않은 아우라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가에 그 특유의 무심한 싸늘함과 피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므로 해강은 그를 흘깃거리며 따라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내는 한참 동안 침묵으로 차있었다. 그런 종류의 침묵이 어색한 나이인 해강이 괜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거나 휴대폰을 만지거나, 운전석에 탄 수행원을 힐긋거리며 부산을 떨었지만 재희는 옆에 모르는 사람이 탄 것처럼 반대쪽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딱 한 번 열었던 것은, 습관처럼 다리를 떠는 해강에게 날 선 눈초리를 보내며 하지 마,라고 주의를 줄 때뿐이었다.

“휴, 더럽게 크네.”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니?”

차에서 내내 앉아있느라 살짝 구김이 간 바지와 코트를 탁탁 털어 주름을 펴면서 재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해강은 항상 활달하고 짓궂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집 밖에서는 언제나 또래들이 쓸 법한 비속어나 유행어 등을 거리끼지 않고 쓰는 편이었다. 물론 집 안에서는 딱딱하고 바른 표준 영어와 한국어만 허용됐기에 그럴 수 없었지만. 아차, 싶어 살짝 눈치를 보자 그는 이미 저 멀리 앞서나간 후였다. 주변을 자세히 둘러볼 새도 없이 해강은 허둥지둥 그를 따라갔다.

재희의 차가 도착한 곳은 사무적으로 보이는 빌딩들과 공장의 외견을 한 건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곳이었다. 공장 부지를 먼저 인수해 남은 공간의 뒤쪽에 새 빌딩을 세운 모양새였다. 게다가 애초에 부지 자체가 무척 넓어서 차가 없다면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재희의 벤츠가 미끄러지듯 들어온 입구는 많은 건물들과 공터, 공장을 지나 제일 안쪽에 있는 곳이었다. 대체 무엇을 생산하는 곳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장들을 구경하며 해강은 재희를 따라 발을 재촉했다. 재희는 푸른빛이 감도는 빌딩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신분증이 있어야지 들어갈 수 있도록 잠금장치가 되어있었다. 재희가 주머니에서 사원 증과 비슷하게 생긴 카드를 꺼내 검사기계의 화면에 갖다 대자, 붉은빛이 삑 소리를 내며 카드를 인식했다.

-성명 임재희. 출입이 허가됩니다. 허가 구역은 건물 전체. 어서 오십시오.

기계적인 안내 음이 재희의 신원을 확인했다. 허가 구역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이 건물은 사람에 따라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이 나뉘어 있는 걸까. 해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서는 재희를 따라 빌딩에 들어갔다.

“이 건물 내에서는 혼자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따라와. 혼자서는 길을 잃기 쉬운 곳이고, 길을 잃으면 꽤 골치 아파지니까.”

재희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어디서 난 건지 수행원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하며 전자패드를 내밀었다. 태연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그가 전달하는 말을 듣던 재희가 눈을 찌푸리며 수행원을 쏘아보았다.

“그런 건 서면으로 미리 전달하라고 했잖아.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거래?”

“저희도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쪽에서 워낙 막무가내로 나오셔서…”

“그런 거 하나도 중간에서 컷 못하고 나한테 들고 와? 일 처리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사장님.”

재희는 한심하다는 듯 쯧, 혀를 차며 전자패드를 건네받았다.

“됐어. 잠깐이면 되니까 알겠다고 해. 다음부터 또 이러면 그냥 계약 파기시키겠다고 하고.”

“예.”

수행원이 재희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해강을 흘긋 쳐다보며 작게 물었다.

“저… 도련님은 그러면.”

“아. 그랬지.”

옆에 멀뚱멀뚱 서있는 해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재희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해강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패드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수행원까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바람에 졸지에 두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해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일단 형의 일이 좀 틀어진 모양이니 속을 썩이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 그것도 형이 알려주겠다는 것 중 하나일까. 잠시 뭔가 계산하는 듯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던 재희가 턱을 치켜들고 수행원에게 눈짓을 했다.

“해강아, 형이 잠깐 일이 생겨서. 한… 30분이면 될 테니까. 혼자 기다리고 있을래? 이 아저씨 따라가면 돼. 김 실장, 해강이한테 출입증 하나 발급해 줘.”

“예. 레벨은요?”

“당연히 E지.”

“어, 나, 나 혼자? 나는 따라가면 안 돼?”

“이상한 사람들 만나러 가는 거라서 안 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재희가 다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로 자동문이 닫히고 넓고 텅 비어 보이는 로비에 혼자 남겨진 해강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비즈니스를 말하는 건가. 물가에 혼자 남겨진 어린애처럼 불안해하는 해강의 옆에서 김 실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사장님은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도련님.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휴게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 네.”

김 실장은 곰과 비슷할 만큼 큰 덩치에 투박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아까 운전하고 있을 때는 앞만 보고 기계처럼 운전을 하느라 잘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그 또한 당황하거나 형한테 혼나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해강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터미네이터 같은 아저씨랑 둘이 남겨놓고 가서 솔직히 조금 무서웠는데 말이지.

“저기, 아저씨.”

“김 실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김 실장님, 실장님도 한국인이죠? 여기가 저희 형이 일하는 곳이에요? 저희 형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출입증 주는 거예요? 실장님이 만들어 주나요? 그런데 밖에 공장들은 뭐 하는 데에요? 다른 직원들은 없어요? 형은…”

“…도련님, 하나씩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벨 E출입증이 무슨 뜻이에요? 형 거는 뭐예요? A?”

“사장님은 등급이 없습니다. 그저 사장님 전용 등급이 있을 뿐입니다.”

“E는요? 그것도 좋은 거예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게 대답했다.

“…제일 제한적인 등급입니다. 이 건물 내에서 화장실 말고는 아무 문도 열 수 없는 등급이죠.”

소년의 얼굴에 막대한 실망감이 어리는 걸 보면서, 김 실장은 긴장한 표정을 간신히 숨기고 있었다. 어서 사장님이 돌아오시면 좋겠는데.

김 실장은 어린애 돌보기에 영 소질이 없는 남자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도 VIP 중의 VIP인 임재희의 동생을 그동안 혼자 어떻게 돌봐야 하나 고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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