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게 누구야, 우리 얼굴 보기 힘든 임 사장 아닌가!”
“…윤 대표님.”
재희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덥석 포옹해오는 사내를 마주 안았다. 남자의 몸에서 무겁고 눅진한 중년 남자 특유의 체취와 비싼 향수 냄새가 섞여 풍기고 있었다. 주제에 구하기도 힘든 향수만 골라서 쓰는군. 나잇값 못하고. 코가 예민한 재희는 그를 안으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그와 몸이 떨어지자 다시 온화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남자가 대동해온 비서는 문 옆에 서 있어 재희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내가 연락 넣은 거 받았나?”
“그럼요. 마침 출근하던 차에 딱 맞게 연락을 주셔서, 이렇게 바로 달려왔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이 사람 참, 하여튼 말은 언제나 잘한단 말이지. 뭐, 그게 우리 임 사장 장점이지만.”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느끼한 인사치레는 접어두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볼까 하는데.”
“제 쪽에서도 환영입니다.”
손님이 와 있어서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거든요. 재희가 예의 있게 웃으며 돌려 말했지만, 명백하게 왜 미리 언질을 주지 않고 왔냐고 눈치를 주는 말이었다. 재희는 언제나 정해진 계획대로 지내는 것을 좋아했기에 이렇게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 불쑥 만나러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사업을 하려면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기에, 이렇게까지 불러낸다고 해서 만나러 와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재희가 맺는 계약의 대부분의 경우는,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대개는 재희가 갑의 자리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심기에 거슬리면 아무리 큰 대가를 약속한 계약이라도 가차 없이 파기하곤 했다. 그런 재희의 성격은 물론, 그가 대놓고 언짢은 티를 내는 것을 눈치챈 윤 대표는 얼굴에 주렁주렁 매달린 웃음기를 거두고 표정을 굳혔다. 재희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그를 안쪽 사무실로 안내했다.
***
“…지루해!!”
“안 됩니다.”
“조금만, 저어~기까지만 가 볼게요, 네? 네?!”
“안 됩니다.”
“잠깐만, 네? 그냥 고개만 잠깐 넣고 한 번만 둘러보고 오면 되는 건데, 네?”
“자꾸 그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도련님.”
김 실장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철옹성 같은 그의 태도에 해강은 잔뜩 불퉁해진 얼굴로 소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런 표정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아아아아아! 답답해!!”
해강이 김 실장을 따라 ‘휴게실’로 들어온 지 벌써 30분이 지난 참이었다. 넓고 텅 빈 로비를 지나 긴 복도를 걸어간 후, 김 실장이 어떤 문에 신분증을 대자 문이 열린 곳이었다. 보통의 학교나 회사에 있는 휴게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곳이었다. 일단 공간도 큼직했지만, 그곳은 휴게실이라기보다 독특한 사무실 같은 곳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중앙에 둥글고 큰 테이블에 짙은 색의 패브릭 소파들이 놓여있었고, 벽 반대편에는 큰 유리창이 있어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삭막하고 정제되어 보이는 건물의 입구와 로비 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소였다. 구석에는 커다란 책장도 하나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정수기와 음료수 자판기, 가벼운 스낵 등을 파는 과자 자판기도 있었다.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화분들의 녹색 빛도 싱싱하게 빛나고 있어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이 공간을 관리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김 실장은 해강을 들여보내고 편하게 있으라고 한 뒤 자신은 문 바로 옆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쭈뼛거리며 휴게실에 들어서던 해강은 잠시 후 정말 편안하게 소파에 늘어져 앉았고, 자판기에서 스키틀즈나 소다 같은 것들을 뽑아 먹으며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장소 자체는 편안했지만 김 실장이 전한 말은 딱 하나였다.
“사장님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시면 안 됩니다.”
그거야 뭐,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강은 한창 뛰어놀던 가락이 있는 청소년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긴장한 채로 형이 일하는 곳에 따라왔는데 막상 일이 생겼다며 이 방에서 나가지 말라니. 게다가 이미 형이 말했던 30분은 한참 넘어가고 있었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정승같이 문 옆에 버티고 선 김 실장에게 졸라봤지만 그는 자신이 동행하겠다며 화장실 안에 들어와 기다리기까지 했다. 해강은 손을 씻으며 그의 철저한 성격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휴게실과 화장실까지 그 몇 미터도 안 되는 동안 김 실장은 마치 죄수를 연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강에게 딱 붙어 따라다녔고, 볼 일을 보는 것도 지켜보려고 하기에 불쾌감을 드러내자 그저 몇 걸음 떨어져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은근히 답답한 타입이란 말이지, 이 아저씨. 재희가 어디까지 지시를 내려놓은 것인지 해강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 실장은 너무 FM대로 딱딱하게 지시를 수행하는 인물이어서 아마 칭찬보다는 잔소리를 더 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 같다는 확신이었다. 해강은 정말 잠깐 다른 문들의 너머를 눈으로 ‘보기만’하고 오겠다며 졸랐지만 그는 단호했다.
“저기요, 아저씨.”
“김 실장입니다.”
“아무튼, 형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래요? 설마 내가 온 걸 까먹지는 않았을 텐데.”
“……”
어색한 침묵이 휴게실에 흘렀다. 해강은 김 실장을 흘겨보며 물었다.
“뭐예요, 그 반응은?”
“…아… 사장님이라면 혹시… 모르니까요.”
“모르긴 뭘 몰라요!”
약이 오른 해강이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쳐 소파에 다시 드러누웠다. 설마 형이 날 잊어버리기는… 그럴 수도…음. 평소의 재희를 떠올리니 그라면 아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해강은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자기가 먼저 데려온 거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준다고 했으면서. 해강은 자기가 또 바보같이 기대한 것을 탓하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기운찬 리트리버마냥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다가 갑자기 풀이 죽은 해강을 딱하게 여겼는지, 김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 연락해 볼까요?”
“네, 제발!”
해강이 반짝 눈을 뜨고 일어나며 외치자, 김 실장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제야 해강도, 자신의 고장 난 휴대폰을 떠올렸다. 화재 사건 때 뭔가 이상이 있었는지 휴대폰은 그 뒤로 먹통이 되었고, 새로 사면 될 일이지만 그동안 재희가 시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신경을 못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해강으로서는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휴대폰을 켜면 온갖 메신저와 SNS로 친구들의 연락이나 근황을 볼 수 있을 텐데, 해강은 그럴 자신이 아직 없었다. 그가 자퇴를 한 것도 지금쯤 학교에 전부 알려졌겠지. 그 많던 친구들 중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그저 수업 시간이 한창일 무렵 교장실까지 찾아가 자퇴서를 내고 바로 돌아온 해강이었다. 친구들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재희가 금지했기 때문에.
일단 나가면 휴대폰을 다시 사기는 해야겠어. 그리고 아마… 제이크에게 연락을 해야겠지. 헤일리나 조시에게도. 아직 병원에 있을 테지만, 그래도 메시지 정도는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애들이 무사히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해강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진 동안 김 실장은 어디로 전화한 것인지 누군가에게 짧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말투나 내용으로 봐서는 재희가 아닌 다른 부하 직원에게 건 것 같았다. 왜 형에게 바로 걸지 않는 거지?
“그래… 그래. 아, 시타델 룸. 그래. 계속 주시하고 있게. 일단 사장님께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고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응… 그래. 알겠네.”
“아저씨, 형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었어요?”
해강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묻자, 전화를 끊은 김 실장이 살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장님이 누군가와 미팅 중이실 때는 직접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대신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관찰 카메라로 사장님을 보호 관찰 중이고, 언제든 전달 사항이 있으면 바로 그분께 전할 수 있어 그런 방식으로 연락을 취합니다.”
“그, 그러면, 어디를 가든 이 부지 내에서는 다 CCTV가 있다는 소리예요?”
“예. 사장님뿐 아니라 원한다면 누가 어디를 들어가고 있는지, 몇 시에 어디에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다 파악할 수 있죠.”
해강은 조금 전 그가 화장실에서 등을 돌리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 대고 메롱을 한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