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엇, 호출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해강이 아주 사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김 실장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는데, 그는 해강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양해를 구하고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멀리 가지는 않고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통화를 하는 그의 실루엣이 불투명한 휴게실의 자동문 너머로 보였고, 해강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무슨 통화길래 나가서 받는 걸까.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가? 형은 아닌 것 같은데…
얼마나 지났을까. 김 실장은 통화를 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나가기 전보다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도련님, 저기…”
“왜 그러세요?”
김 실장은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쪽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겨서 제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도련님은 그동안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도 가면 안 돼요?”
“…사장님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므로 동행하는 건 안 됩니다. 원래는 도련님을 혼자 두는 것도 안 되지만…”
남자는 스스로 말을 꺼내면서도 여전히 고민 중인지 못 미더운 표정으로 해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소파에 엎드려 있던 해강이 벌떡 일어나 앉고는 밝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지 말라는 거죠? 아저씨 없어도?”
“…예. 만약 도련님이 건물 내를 멋대로 돌아다니는 걸 사장님께 들키면 저는 크게 혼날 겁니다. 그러니 부디…”
“아~ 알겠어요, 알겠어. 그러니까 얌전히 휴게실 안에서만 기다리고 있으란 거잖아요. 어차피 제가 가진 출입증으로는 화장실밖에 못 들어가는데, 나가봤자 복도만 떠돌다가 다리 아파서 다시 들어올걸요. 물론 나가겠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발 얌전히 계셔 주십시오.”
김 실장은 한결 마음이 놓인 것인지 더 이상 머뭇거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휴게실을 나섰다. 이미 저 멀리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실루엣을 보며 해강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김 실장에게 보여줬던, 착하고 순진한 미소를 가득 띤 채.
“…갔나?”
소파에서 폴짝 점프하듯 내려온 해강은 조심조심 문으로 다가가 밖의 동향을 살폈다. 김 실장은 이미 로비를 통해 건물을 나선 것인지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가지 말라고 하면 더 나가고 싶은 법이지. 사고 칠 것도 아닌데 잠깐만 걸어 다니다가 와야겠다.”
해강은 싱글싱글 웃으며 휴게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쏙 빠져나갔다.
금세 텅 비어버린 휴게실 안에는, 소파 위에 소년이 먹다 남긴 과자 봉투와 음료수 캔만이 놓여있을 뿐.
“큭, 으윽, 임재희…! 너 이 새끼가!!!”
무표정한 수행원들에게 양 팔을 잡힌 채 윤 대표는 체통 따위는 잊어버린 듯,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욕설을 토해냈다. 재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러나 이미 발갛게 부어오른 한쪽 뺨에 김 실장이 건넨 차가운 물수건을 대며 바닥에 피가 고인 침을 뱉었다. 윤 대표가 끌고 동행한 그의 비서와 경호원들은 이미 마취제를 맞고 바닥에 인형처럼 우수수 쓰러져 있었다.
무미건조한 눈을 들어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재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계약한 것과는 다르잖아, 이 개자식아!!!”
“먼저 계약을 위반하신 건 윤 대표님이시죠. 게다가 제 몸에 손을 대시다니.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선빵을 친 건 그쪽인데.”
조금 전, 재희는 C동의 메인 룸 중 하나인 시타델 룸 안쪽 사무실에서 윤 대표와 긴급 미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긴급한 사안은 아니었고, 으레 종종 발생하곤 하는 성미 급한 계약자들의 재촉과 너저분한 협박, 더러는 자신보다 약한 재희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일차적인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정도의 일이었다. 그 정도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 능력을 가진 재희에게도 그런 일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정도로, 놀랍게도 정말 그런 새끼들이 있곤 했다. 재희는 그런 치들에게 하나하나 반응하고 감정이 휘둘릴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후환이 두렵기라도 해서 재희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는 못하고 괜히 폭력적인 태도로 굴기만 했으나, 윤 대표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유들유들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고 다정하게 구는 남자였지만, 뒤에서는 원할 때마다 부하 직원을 엎드리게 해놓고 골프채로 패는 것이 습관인 남자였다. 그는 나름대로 쉬쉬하려는 듯했지만 업계에서는 소문이 파다해, 일과는 별개로 사람의 됨됨이는 정말 별로라는 평가를 받는 남자였다. 항간에는 조폭 출신이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 정말… 대가리 깨지는 줄 알았네.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입니까? 사람 장사하다 보니까 이제는 누가 누군지 눈깔에 뵈는 게 없나 보네. 윤 대표님, 아니 윤상철. 애초에 한 달만 더 기다렸다가 투자하라고 한 건 저였습니다. 마음대로 회사 자본 빼서 횡령하더니 그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겠다?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닙니까? 약 팔면서 양심도 같이 파셨나.”
“이 기생오래비 같은 새끼, 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런 씨발, 네 말대로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잖아!!? 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냐고!! 분명 네가 그 회장 새끼하고 다 짜고 꾸민 일이지, 그렇지?!!”
사내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래고래 악을 쓰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재희의 두 수행원은 바위같이 단단한 태도로 여전히 윤 대표의 몸을 붙잡은 채였다. 언제든 재희가 명령만 내린다면, 아니 그저 눈짓 한 번만 해도 윤 대표의 양 어깨는 형편없이 비틀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부은 뺨에 찬 수건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윤 대표가 끝없이 저급한 욕설과 고함을 내지르며 버둥거리다 제풀에 지쳐 늘어질 때까지, 단단하게 붙잡힌 구속은 풀리지 않았고, 재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윤 대표는 갈수록 벽에 대고 소리치는 듯한 무력감과 패배감,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이 온몸을 잡아먹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후에야 남자가 조용히 축 늘어지자 재희는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제 끝났나요?”
“…헉…허억… 이…씨발…개새끼…”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도적인 예우로 하고 싶은 말 정도는 다 들어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선약이 있는 몸이라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도 않고…”
담담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재희가 김 실장을 보며 윤 대표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김 실장이 익숙한 태도로 가져온 작은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열었다. 찰칵, 하는 잠금 해제 장치 소리를 따라 그는 손목시계를 빠르게 풀어낸 후 흰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작은 병 하나와 새 주사기를 꺼냈다. 곰 같은 수행원들에게 붙들린 윤 대표에게 다가간 그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자, 따끔~”
“…!! 으윽…!크악…!! 김…대협… 너… 이 새끼…”
“…윤 대표님, 안녕히 주무십쇼?”
김 실장이 매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떨어지는 윤 대표의 목을 받쳐주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잠에 든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경직과 고통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재희는 아직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타델 룸을 빠져나오는 그의 뒤로 그림자처럼 김 실장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들의 등 너머로 재희의 수행원들이 쓰러진 윤 대표와 그의 부하들을 수습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었길래 늦게 온 거야? 따로 호출을 하기 전에 왔어야지.”
“…사장님이 도련님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하셔서…”
“도련님?”
재희는 빠르게 놀리던 걸음을 단숨에 멈췄다. 김 실장은 역시나, 하는 마음에 속으로 혀를 찼다.
“…해강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시잖습니까. 도련님은 사장님이 자신을 잊어버린 줄 알고 토라지신 것 같은…”
“…그럼 그 애가 지금 혼자 있다는 거야?”
김 실장은 아차, 하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표정에 재희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 선 눈빛에 김 실장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멍청한 새끼, 혼자 두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당장 정보실 연락해. 휴게실 CCTV 확인해서 해강이 뭐하고 있는지 보라고 해.”
김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재빨리 정보실을 호출했다. 2, 3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바로 익숙하고도 딱딱한 정보팀장의 목소리가 김 실장을 반겼다.
“…그래, 거기… 지금. 응. 도련님이 계시는지 확인해.”
“……”
재희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발을 움직여 C동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긴장한 얼굴로 통화를 하던 김 실장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없다고?”
“뭐라고?!”
김 실장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빼앗아 귀에 댄 재희가 사납게 되물었다. 통화 상대가 재희로 바뀐 것을 인지한 정보팀장은 살짝 긴장한 말투로, 휴게실에는 현재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너머로 살짝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팀원들의 소리가 섞여 들렸다.
“…주변 카메라 전부 돌려서 찾아봐. 당장! 어차피 레벨E 카드만 가진 애야. 근처에 있을 거야.”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정보팀장이 바쁘게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강이 있는 A동에만 수백 대가 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화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키보드 소리가 들려오면서도, 해강의 소재를 파악했다는 보고는 들려오지 않았다. 곧 정보팀장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그게…
“해강이를 찾았나?”
-아니요, 그게… 도련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귀를 의심한 재희가 거의 으르렁거리듯 되묻자, 정보팀장이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현재 A동에 설치된 총 256대의 카메라와 도어마다 설치된 출입 기록을 전부 체크했습니다만, 해강 도련님의 모습도, 레벨E 의 출입 기록도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아마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신 게 아닐까 합니다.
바보 같은 소리. 재희가 아는 한, A동 건물 내에서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딱 한 곳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지난 수년 동안, 재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장치가 되어있었다. 그곳은 출입증이나 비밀번호 따위의 잠금으로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재희였기에 그의 불안은 결국 확신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제단祭壇으로 가는 모든 경로 확인해. 1시간 전으로 돌려서 지나간 흔적 있는지, 지하로 가는 문 쪽에 있는 카메라 전부 돌려서.”
명령을 내린 후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쩌면…
어쩌면, 돌아서 가는 것보다 이 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