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0화 (120/166)

120화

“…정말 아무 곳도 안 되잖아.”

해강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 걸로 총 14번째 시도였다.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지난 후 해강은 반대쪽 복도까지 살펴보았다. 휴게실 쪽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주쳤던 여러 문들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드 키를 갖다 대보았지만 기기에는 ‘권한 없음’이라는 단어만 뜰 뿐이었다. 정말 화장실 말고는 아무 곳도 못 가는 것 같네. 한숨을 쉰 해강은 주머니에 카드를 쑤셔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1층의 대부분은 돌아다닌 것 같은데. 다른 층에는 혹시 없을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해강의 눈에 엘리베이터가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버튼을 누르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의 바닥에는 검은 카펫 재질의 바닥재가 깔려있었고 흔한 거울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그저 적갈색의 벽으로 사방이 막혀있고, 버튼들을 살펴보니 층수는 1층부터 17층까지 있었다. 이만한 건물에는 당연히 지하층이나 주차장이 있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층수는 1층이 끝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해강은 조심스럽게 3층을 눌러보았다. 엘리베이터는 잠잠했다. 누른 버튼에 불이 들어오거나 문이 닫히지도 않아 해강은 고개를 빼고 문밖을 둘러보다가,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네모난 터치패드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엘리베이터도 출입증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게 해놓은 거냐고…!

무슨 고급 호텔도 아니고, 허가되지 않은 방문자는 아예 1층 말고는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도 없는 건가. 해강은 시무룩하게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간담.”

휴게실은 해강이 가진 카드 키로는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에 들어올 때도 김 실장이 문을 열어주고 들어온 곳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다. 정말 레벨E 카드 키로는 화장실 말고는 아무 곳도 갈 수가 없는 거였구나. 어차피 나와서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상 이리저리 열리는 곳을 찾아보자고 나선 해강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까지 이용할 수 없는 데다, 1층 전부를 돌아다녀도 들어갈 만한 곳은 다 막혀있어 낙담을 하던 찰나였다.

“…어라.”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옆쪽 벽에 기대앉아 잠시 머리를 굴리던 해강의 눈에 자그마한 틈새가 비쳤다. 아니, 정확히는 벽과 바닥, 막다른 구석진 벽의 바닥과 벽이 만나는 곳에서 새어 나오는 틈새의 빛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가까이 다가가 살피자 확실히 기시감이 느껴지는 벽이었다. 밑 부분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는 뜻은, 벽 너머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해강은 왠지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벽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상아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은 어디로 보나 단순한 벽이었으나, 이미 이상한 부분을 잡아낸 해강의 눈에는 어딘가 수상해 보이기만 했다. 손으로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밀기도 해보고 문지르기도 하던 순간, 해강의 손바닥을 타고 찌릿한 감각이 타고 올랐다.

“…윽… 뭐, 뭐야, 방금? 정전기인가?”

퍼뜩 놀라 손을 떼자 해강의 손이 얹혀 있던 자리에 미세하게 손바닥 모양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라, 진짜 그냥 벽이 아닌가? 뭐지? 방금 손바닥에 찌릿하던 건…?

손바닥 모양으로 새겨진 표식은 미약한 빛을 내뿜는가 하더니, 이내 빛이 잦아들고 해강의 눈높이쯤에 반투명하고 가로로 길쭉한 알림 창이 떴다. 매끄러운 대리석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 위에, 마치 기계 패드나 모니터에나 표시될 법한 알림 창이 뜨자 해강은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생체 정보 인식 준비 중. 인식을 원하시면 표시된 곳에 정보를 입력해주십시오.>

생체정보? 대체 무슨 소리지. 해강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자신이 손바닥을 대고 있던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에 손을 대면 되는 건가…? 하지만 생체정보라니 뭔가 수상하기 그지없는… 이럴 때는 아무거나 만지면 안 된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해강은 한참 동안 의심에 찬 눈으로 벽, 아니 알림 창이 뜬 화면과 손바닥 모양으로 빛나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입력이 없자 알림과 손바닥 모양은 다시 사라졌고, 알림 창이 떠있던 화면은 평범한 대리석 벽으로 바뀌었다. 다시 보아도 정말 보통의 벽이었다. 그 누가 이런 곳에 잠금장치가 되어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해강은 손바닥 자국이 있던 곳에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다시 빛이 들어오면서 알림이 떴다.

한 번… 해볼까.

애초에 열릴 가능성도 없지만, 그래도 뭐 틀린 정보라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삑삑거리지는 않겠지. 혹시 경보가 울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해강은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다시 복도를 떠도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렸다. 그리고 어차피 여긴 형의 회사니까, 막말로 경보가 울려도 경찰에 잡혀가거나 하진 않겠지. 물론… 엄청 혼이 날 수는 있지만.

“…엇.”

손바닥을 대자, 작게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터치패드가 해강의 손을 인식하는 것이 보였다. 생체정보를 입력하라는 알림은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생체 정보 인식 중…>

<정보 입력 중…>

<조회 중…>

삑-

긴장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해강의 눈이 돌연 커졌다.

<잠금 해제. 접근을 허가합니다.>

“어… 진짜로… 됐어…?”

해강이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동안, 알림 창이 지워지더니 벽에서 희미하게 철컥,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 대리석 벽이었던 것이 마치 자동문처럼 옆으로 스르륵 움직여 입구를 드러냈다. 해강의 얼굴로 서늘하고도 살짝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 한 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의 문은 계단과 복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하실인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벽에 설치된 조명이 아니었다면 어둑하고 수상해 보여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해강은 생각보다 들어갈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혼자 지루하게 돌아다닌 터라 한편으로는 이런 모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해강은 자신의 눈앞에 일어난 뭔가 신기해 보이는 최첨단 시스템과 비밀스러운 지하실에 대해 쓸데없는 공상의 나래를 펼치며, 실제로는 별다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대체 어떤 연유로 1층의 구석진 벽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사람 외에는 잠금장치를 풀 수도 없다는 것을, 게다가 애초에 무슨 원리로 잠금이 해제되었는지 같은 것은 일은 이제 해강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직 소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그저, 재희에 대한 끝없는 궁금증을 해소해 줄 답이 이 아래에 있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뿐이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해강의 뒤로, 소리 없이 벽이 움직여 다시 닫혔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재희는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잠에서 깼다.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재희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감각으로 인해 아직 꿈속이라는 것쯤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 머리칼을 만지는 이 손길도, 이 부드러운 바람도, 익숙한 체취도 전부 내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진짜가 아니다.

“재희야.”

그러니까, 지금 내 이름을 부르는 도희 누나의 목소리도 전부 진짜가 아니다. 재희는 눈을 뜨지 않고 꿈에서 깨어나려고 했으나, 도희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순간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열두 살이었다. 그리고 도희도 언제나 그랬듯 말갛게 웃으며 자신의 이마를 쓸어주고 있었다. 주변은 그때쯤의 자신의 침실이기도 했고, 병원이기도 했고, 갑자기 꽃이 산들산들 핀 잔디밭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상관없었다. 도희만 사라지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재희가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자 도희의 웃는 입가가 보였다. 이상하게 도희의 오밀조밀한 코끝까지만 보일 뿐, 눈이나 머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더 젖혀보면 보일 테지만 재희는 졸린 두 눈을 간신히 뜨고 있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럴 수는 없었다.

“재희야.”

도희의 입술이 움직인다.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바람이 불어 도희의 머리칼이 그녀의 입과 턱을 가린다.

재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더 정확히 보려 한다. 그녀의 입술을 읽을 수가 없다. 뭐라고 하는 건지, 대체 왜 누나는 잊을 만하면 내 꿈에 나오는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나를 흔들어놓고 사라져버리는지,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그러면 안 돼.”

대체 뭘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재희는 누군가가 제 눈을 억지로 감기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속절없이 눈을 감고 만다.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그 애한테는 그러면 안 돼.”

뭘?

누구한테, 뭘 하면 안 되는데?

재희는 연거푸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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