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1화 (121/166)

121화

“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지하실로 가는 입구 쪽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도련님의 모습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몇 시지?”

“약 20분 전입니다. 아직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말은 즉 아직까지 밑에 있다는 뜻이겠군. 아니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재희는 혀를 차며 어깨에 걸쳤던 코트를 벗어 김 실장에게 건넸다. 뺨의 붓기는 어느덧 가라앉아 있었다. 입안이 조금 터지긴 했지만 짭짤한 피 맛만 감돌 뿐,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니었다. 피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은 후 재희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 넘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직접 가야 할 일이다. 그 누구도 끼어들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니까. 재희는 김 실장에게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홀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재희는 소리 없이 걸어 복도의 한쪽 끝,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벽을 마주 보고 섰다.

망설임 없이 익숙한 손이 벽 위로 놓인다. 조금 전 한 소년이 머뭇머뭇 벽을 더듬으며 한참 동안이나 잠금 해제하는 것을 망설인 것과 반대로, 재희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손바닥을 올려놓고 알림을 마주한 뒤, 빠르게 잠금을 해제한다. 재희는 그동안 자신이 습관처럼 보아온 알림 메시지들과 잠금을 해제하고 문이 열려 지하실이 드러나는 그 모든 일련의 장면들이, 문득 해강에게는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해강은 항상 계단을 뛰듯이 두세 개씩 리듬을 타며 내려가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떠올린다. 이 앞에 네가 있겠구나. 어떤 얼굴로 나를 쳐다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원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제 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재희는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나른한 한숨을 내쉬고 다시 지하실로 들어선다.

***

해강은 지하실의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살짝 눅눅하고 서늘한 바람이 훅 풍겨왔다. 지하실인데도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걸까, 내 상상보다 더 크고 거대한 공간이 이 밑에 있는 걸까. 해강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지하실 앞에 다다랐다. 의외로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그저 평범하게 지하실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에 들어온 풍경은 생각보다 어둡고 그다지 넓지는 않은 곳이었다. 위에서 본 빌딩의 규모와 구조를 봤을 때 지하실도 왠지 엄청 커다란 연구소같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빌딩의 지하실치고는 마치 평범한 주택 밑에 자리한 창고 같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뭔가 더 큰 공간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살짝 괴리감을 느끼며 해강은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어둡기는 했어도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어디서 자꾸만 눅눅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지라 일단 그 바람이 통하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지하실은 가장자리 벽을 따라 이런저런 물건들이나 상자가 쌓여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아 공간 자체가 텅 비어 보였다. 안 쓰는 자재들이나 부품을 쌓아둔 걸까? 어두워 상자에 쓰인 글자들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자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저 안쪽에 보이는 커다랗고 길쭉한 상자와,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꽃다발과 잡동사니들이 신경 쓰였다. 지하실에 웬 꽃이 있는 거지. 게다가 저 길쭉한 상자는 입구 근처 벽에 놓인 상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조금씩 안쪽으로 다가갈 때마다 해강의 이마, 목, 뺨과 귓불에 찬바람이 오스스하게 스쳐 지나갔다. 분명 어딘가 틈새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보통… 지하실에서… 바람이 불어올 수가 있나? 괜히 뒷목을 쓰다듬으며 해강은 천천히 꽃다발들이 만개하게 펼쳐져 있는 안쪽으로 다가갔다.

“…설마… 말도 안…돼.”

해강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갈 곳을 잃은 손이, 천천히 입으로 올라갔다. 소년의 표정이 상자의 정체를 깨닫고 일그러진 순간, 귓가에 불던 옅은 바람이 누군가의 부름으로 바뀌었다.

‘ ’

“…누, 누구…누구세요? 누구 있어요?”

‘ ’

“…이게 무, 슨…”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누군가 나를 불렀다. 지하실이어서 사방이, 아니 모든 곳이 막혀 있으니, 해강이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맞는 곳이었다. 해강은 순간 바람 소리에 자신의 숨소리가 섞여 착각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숨까지 참아보았다. 불안하게 떨리는 소년의 눈동자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주해강.”

“…!”

해강이 덜컥 놀라 뒤를 돌자, 어스름한 지하실 입구 쪽에 선 재희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마주친 재희의 눈은 언제나 보던 것보다도 더 차게 식어있었다. 해강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재희는 담담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해강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해강의 발치에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는 바람에 살짝 치여 찌그러진 꽃다발이 누워있었다. 재희는 몸을 굽혀 손수 꽃다발을 매만진 후 다친 꽃잎이나 줄기가 없는지 확인했다. 태연하게 꽃 따위나 신경 쓰고 있는 그를 보니 해강은 혼란스럽던 마음이 기이하리만치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살짝 멍한 얼굴로 해강이 물었다.

“…이건 …누구야?”

가리키는 대상은 명확했지만, 해강은 에둘러 말하며 직접적으로 그것을 지목하기를 꺼려 했다. ‘이것’이라고 칭하면서도,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을 것이 무엇인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구’인지에 대해 묻는 폼이 퍽 우스워 재희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해강이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회사 지하실에… 왜 이런 게 있는 거야? 설마…”

길쭉하고 네모난, 암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상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단 중앙에 작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는 백합 무늬를 표현한 조각이 유려하게 파여 있었고, 백합은 하나의 표식을 휘감아 감싼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어린애라도 알아볼 수 있는 표식.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으므로, 해강은 한눈에 그 물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관의 주변을 둘러싸고 순서대로 누워있는 꽃다발들을 점검하며 흐트러진 구석이 없는지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관이 놓인 곳은 마치 제물을 바치는 제단祭壇과 같은 모양새였다. 지하실의 바닥은 거친 무늬의 돌로 되어있었고, 그 탓에 더 서늘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제단에 놓인 커다란 관의 양옆에는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작은 크기의, 위에 희고 반투명한 천이 씐 작은 관들이 몇 개 더 놓여있었다. 왜 관의 크기가 다른 건지 해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것 따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재희가 꽃다발들 사이에 놓여있던 성냥갑을 하나 집어 들어 성냥을 그었다. 어둑하던 사위를 작은 불꽃이 폭발하듯 밝혔다가, 이내 제 몸집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그 피어나는 불꽃의 모양을 보고 해강은 잠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재희의 옆얼굴 위로 붉고 어두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이리 와. 너도 인사드려야 하니까.”

재희는 해강을 돌아보지 않은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엄숙한 태도로 허공에서 움직이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어둠 속에서 불꽃을 받아 양초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재희는 하나하나 양초에 불을 올렸다. 그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고, 어둡게 침잠하는 밤바다와도 같았기에, 해강은 그저 멍하니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양초에 불을 다 붙이자 어느새 지하실은 대낮처럼 환해져 있었다. 처음보다 더욱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에 해강의 안색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중앙에 놓여있던 관은 확실히 사람이 들어갈 만한 관의 평균적인 크기보다는 좀 더 커 보였다. 어쩌면 관이 아닌 게 아닐까, 해강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하실의 이 공기, 감각, 냄새, 그리고 재희가 피운 불들이 전부 하나하나의 단서로 맞춰져 다가왔다.

저 뚜껑을 열면 시체가 있다.

해강은 지금 죽은 자들의 방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저 관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재희는 그와 무슨 관계길래, 회사 지하에 이런 공간을 숨겨둔 것인가. 직원들은 알고 있나? 아까 그 김 실장은? 잠금장치는 대체 뭘 위해서? 가족의 관인가? 하지만 가족의 관을 대체 왜 이런 곳에…

그리고, 재희의 가족이라면.

해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형의 가족이라면.

내 가족이라는 뜻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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