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3화 (123/166)

123화

모든 이야기를 마친 재희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키를 넘어선 사촌 동생은 성인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체격으로 건강하게 자랐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앳된 소년의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그런 흔적들을 볼 때마다 재희는 가슴이 선득 해지는 기분이었다. 해강의 순한 눈매에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재희에게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으므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몇 년 동안 계속 찾아왔어. 내가 모르는 곳에 혹시 다른 핏줄이 살아있을지, 친척의 먼 친척일지라도, 단 한 방울의 피가 섞인 가족이 아직 세상에 남아있을지. 그들이 전부 사망했다는 기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했어. 그때 운명이 내게 말하더군. 나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고. 어쩌면 내가 멍청했던 거지. 할머니가 정말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건 정말로 신의 영역이지 않니.”

재희는 기침을 몇 번 했다. 지하실의 텁텁하고 습한 공기가 약한 그의 기관지에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분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어. 할머니는 계시를 받을 때마다 일기장에 자기만 아는 방식으로 적어두곤 하셨거든. 언젠가… 그래,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쓴 걸로 보이는 낡은 일기장을 서재에서 발견했어. 그리고 내가 태어나던 날 새벽에 계시를 받으신 거지. 한 사내아이가 너의 집에 들어올 것이고, 그것은 분명한 너의 핏줄이다. 게다가 그 아이가 가질 능력은 그동안 낳은 아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고, 몸이 약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비명 횡사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이용하면 된다고 말이야.”

재희는 다시 한번 관을 어루만졌다. 살짝 덮어져 있던 것인지 그의 손길에 관의 뚜껑이 비스듬하게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해강은 마른침을 삼켰다.

“할머니가… 무슨 이유에서였건 나를 거두신 데에는 다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어서 자라서 할머니의 짐을 덜어드리고, 그분의 일을 돕고 우리 가문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나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어. 선천적으로 열등한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구박을 받고 학대를 받아도 무너질 수 없었어. 그러면 영영 끝장이었으니까. 할머니는…그런 분이셨어.”

“…그럼 다른 사람들… 다른 친척들을 모두… 형이 죽인 거야?”

재희가 실소했다. 그러나 해강은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해강아. 이 손목하고 몸집을 좀 봐. 팔뚝은 네 팔의 반절밖에 안 될걸. 기침을 조금만 심하게 해도 숨이 가쁘고, 항상 잠은 부족해서 정신이 맑지 못하지. 오래 달려본 적도 없고, 기절도 자주 해. 너는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야. 나는…난… 솔직히 말하면, 내 배경이라든가, 나의 친척들과 가문, 뭐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그냥 먼 나라 얘기 같아. 형이 말하는 그 누나들도, 큰 이모라는 분도, 할머니도, 나는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은 오직 형뿐인데.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왜 나한테, 이제 와서 이런…”

해강은 잠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이 고인 눈물로 뿌옇게 변했다. 눈을 깜빡이자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재희는 여전히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곱고 흐린 얼굴이었다.

“…나도 궁금했어. 너를 왜 굳이 데려왔을까, 나는. 수소문 끝에 먼 친척 아이가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어. 이 세상에 이 저주받은 핏줄은 오직 한 명뿐이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게 나여야 하니까. 당장 찾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계획이었거든, 처음엔.”

“…그런데 왜… 나를…”

“그러게. 왜 그랬을까.”

재희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는 얼굴로 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고통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스치고 간 것도 같았다.

“어쩌면 나도 외로웠는지 모르지.”

재희는 이제 웃지 않았다. 내내 그 흰 얼굴에 떠 있던 말간 웃음은 메말라 버렸고, 서릿발같이 차가운 눈빛이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선택해. 나한테 도움이 될지, 아니면 쓸모없는 인간이 될지.”

그러나 이미, 해강에게 선택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

해강이 재희를 돕기로 약속한 그날 후로 2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는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일들이라고 해강은 생각했다. 그러나 꼭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해강은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재희의 밑으로 들어가 가업을 잇는 교육을 받고 필요한 공부를 하며 살았다.

…는 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해강의 신상이었다. 사실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재희가 특히 극비에 부친 사건들도 있었기에 해강도 그저 마음속에만 묻어둔 사건들도 있었다. 재희는 자신이 진희와 미희에게 교육받았던 것처럼 해강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온전하게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해강은, 재희가 받은 교육과 다른 것들을 배웠다. 정말, 말 그대로, 해강은 ‘거의 모든 것들’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직 해강에게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건 재희에게는 물론 해강에게도 아주 큰 문제였다. 해강의 생물학적 어머니였던 임지희는 재희의 조사에 의하면 확실히 임진희의 친조카가 맞았다. 그러나 직계 혈통이 아닌 것이 문제인 건지, 아니면 남자아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인지. 그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재희는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희가 임진희와 다른 점은, 해강의 능력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강이 어떤 능력을 타고났든지 간에 그것은 재희에게 아무런 이득이나 위협이 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영혼들을 보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던 서희나, 강력한 살을 날려 특정인에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예희, 그리고 제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있던 재희의 사촌누이들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해강에게 어떤 능력이 발현될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능력이라도, 미래를 볼 수 있는 힘 앞에서는 전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한 일들이었다.

말 그대로 재희의 능력은 신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 남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해강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한국에 돌아갈 거야.”

베이컨을 입에 넣던 해강이 턱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막 저녁 훈련을 끝내고 집에 와 샤워를 한 후 때맞춰 돌아온 재희와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최근 들어 해강은 엄청 많이 먹기 시작했고, 코치는 그게 다 몸이 자라느라 그런 거라고 했다. 거의 운동선수 급으로 식사량이 많아진 해강은 키도 체격도 더 자라서 지난달 신체검사에서 근육 량으로 상위 10%를 달성했다. 물론 그 기준은 성인 남성 기준이었다. 한창 자랄 때기는 하지만 항상 소식을 하는 재희는 해강이 무엇이든 많이, 잘 먹는 것을 조금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해강은 재희와 식사를 할 때면 의식적으로 천천히 매너를 지켜 먹으려고 노력하곤 했다. 아무튼, 그 바삭하고 짭짤하게 익혀진 베이컨을 굳이 칼로 썰어 조각 내 한 조각을 입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재희와의 식사가 끝나면, 밤중에 몰래 부엌으로 내려가 간식을 더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내려진 통보에 해강의 머릿속은 다시 한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야식에 대한 생각 따위는 뒷전이었다.

“한…국에?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냐. 예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너한테 말만 안 했을 뿐이지.”

“그런 걸 갑자기라고 하는 거거든?!”

“…입에 음식물 넣은 채로 말하지 마. 불쾌하니까.”

재희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천천히 방울토마토를 하나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흰 손을 보며 해강은 머쓱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사업차 방문해야 할 곳들도 있고, 한국이 멀어서 그동안 미루다가 사정 생긴 김에 한 번에 처리하려고.”

생각해 보니 재희는 비행기 타는 건 극도로 꺼려 하는 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국제선은 물론 한두 시간 정도만 타면 되는 국내선도 기피했다. 해강은 학교에 다닐 때 캠프나 여행으로 친구들과 몇 번 국내선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재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동의서 보호자 란에 서명을 해주곤 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비행거리와 그 수고를 따져본다면 보통 사람들도 그 두 나라를 자주 왕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자신이 타는 것 외에도 해강이 타는 것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대부분의 해외 고객들은 모두 그를 직접 만나러 오는 게 하나의 거래 조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만 재희는 아주 가끔 비행기를 타곤 했다. 아마 최근에 탄 적은 해강이 알기로는 작년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업적 특성과 빈도를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해외에 거주하는 고객과 화상 통화나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재희는 일 년에 한두 번 비행기를 타면 많이 타는 것이었으므로 먼 한국까지 간다는 것은 거의 해강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해강에게도 한국은 이미 가물가물하게 추억 언저리에 남은 모국일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어릴 때까지 자란, 흐릿한 향수와 유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 나라. 이제는 집안이 아닌 길거리에서 한국어가 들리면 이상할 정도로 이질적이게 들렸고, 학교에서 자신의 어릴 때에 관한 과제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들을 때면 어색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게다가 해강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면, 주름진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원장수녀님과 항상 잔소리를 일삼으면서도 해강의 부모나 다름없이 손수 키워준 수녀님들, 이따금씩 만나 맛있는 간식이나 새 장난감을 안겨주던 후원자나 봉사자들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해강은 아직도 흐릿하게나마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던 눈부신 햇빛의 파편들과, 그 빛을 타고 투명하게 반짝이며 떠다니던 성당 내의 가벼운 먼지들, 알싸한 향과 초의 냄새, 갓 빨아 뒷마당에 잔뜩 널어둔 희고 보드라운 이불들을 기억했다. 여름만 되면 이곳저곳 자란 잔디들 사이로 모험하듯 헤치며 돌아다니다가 옷에 잔뜩 묻어버린 도깨비 가시들도,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가던 날 선물로 받은 새 책가방과 운동화의 감촉도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기억들은 때때로 해강을 살게 하기도 했고, 그만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자라게 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부드러웠던 기억들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마음속에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은 법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