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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24화 (124/166)

124화

해강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스크램블 에그를 포크로 잘게 자르며 입을 우물거렸다. 입안에서 달달하게 녹는 폭신폭신한 계란의 촉감은 가정부 아주머니가 제일 자신 있는 음식 중 하나일 정도로 완벽했지만, 해강은 금방 입맛을 잃고 말았다. 갑작스레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재희는 그런 해강의 반응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제 접시 위에 놓인 것들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너도 같이 가는 거니까, 다음 주 내로 준비해.”

“어? 나, 나도 가는 거야?”

하지만 일 관련으로 잠시 다녀오는 거 아니었나. 해강은 바보 같아 보일 정도의 멍한 얼굴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재희는 옆에 놓인 컵을 들며 대답했다.

“그래. 일주일 정도면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나는 정리할 일들이 많아서 바쁠 테니까 네가 김 실장이랑 필요한 서류들 떼고, 관공서들도 좀 다녀와. 비자도 해결해야 하니까.”

“어… 응. 그런데 무슨 서류? 잠깐 다녀오는 건데 필요한 게 있어?”

그냥 며칠 다녀오는 건데 무슨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웬 관공서? 비자도 필요하던가? 재희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들어 해강을 흘긋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돌아간다니까. 한국에.”

“…뭐?!”

“식사 중에 큰소리 내지 마. 무례해 보여.”

“하, 한, 한국에, 돌아간다고? 다음 주에?! 갑자기 왜?!”

“글쎄.”

재희는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친 듯, 냅킨을 들어 입가를 톡톡 닦았다. 잔을 들어 남은 와인을 단숨에 마신 그가 짧게 덧붙였다.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아서.”

대답은 그뿐이었다.

***

“해강, 들었어요. 내일모레면 한국에 돌아간다면서요?”

테일러가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해강을 맞아주었다. 테일러는 어두운 피부와 건장한 덩치를 가진 트레이너이자 재희가 해강을 위해 직접 고용한 코치였다. 전직 군인이었던 그는 20대를 파병과 전쟁터를 오가며 보냈을 정도로 잔뼈가 굵은 요원이었다. 재작년 그는 발목 인대 부상으로 명예제대를 한 뒤 재희의 스카웃으로 개인 트레이너로 고용됐다. 물론 임재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해강을 위한 전담 트레이너였지만. 해강은 테일러와 하루에 세 시간 정도를 보내며 여러 가지를 훈련받았고, 그는 다정한 삼촌처럼 해강을 예뻐했지만 훈련에는 가차 없는 남자였다. 해강의 커리큘럼은 단순히 운동이나 체력을 다지기 위한 것들이 아니었다. 모두 재희가 직접 지도하에 테일러와 상의해 해강의 신체발달 단계와 성격, 신체적 특성과 흥미를 모두 고려해 짠 것이었다. 교육 과정은 총 세 번 정도 바뀌었는데, 초반에는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해 거의 하루에 6시간씩 운동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해강은 질색을 할 정도였다. 또래 중에서도 유난히 운동신경이 좋았던 해강도 테일러의 단호한 태도와 봐주지 않는 훈련의 강도에 처음에는 자잘한 부상도 입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테일러는 좋은 선생이자 해강의 친구였다. 오늘도 윤기나는 검은 피부와 완벽한 근육을 드러내는 민소매티셔츠와 러닝쇼츠를 입은 테일러가 프로틴 쉐이크를 흔들며 체육관을 한 바퀴 점검하고 있었다. 해강은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테일러와 하던 훈련들도 모두 끝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말하던가요? 안 그래도 요즘 처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바빠 죽겠어요.”

“오, 죽지는 말아요. 미스터 임이 해강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죠? 이번에 한국에 가는 일도 해강을 위해서라고 하던데요.”

“하하, 설마. 형이 뭐라고 했는데요?”

해강은 반쯤 비웃음을 띤 얼굴로 투덜거리며 테일러가 방금 정리해둔 플라스틱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습관처럼 챙겨온 운동 가방을 바닥에 내려둔 채 소년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턱을 괴고 딴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테일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공 하나를 주워 멀찍이 떨어진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농구공이 완벽하게 바구니 안으로 착지한다. 해강의 눈이 다시 호기심으로 바뀌어 그 공을 지켜보는 걸 캐치한 테일러는 가볍게 말했다.

“내가 항상 말했지만, 그는 당신을 무척 신경 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많이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인 건 알죠? 단지 표현이 서툴 뿐입니다.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하나밖에 없는.”

형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가족이잖아요. 항상 테일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해강은 그럴 때마다 입을 삐죽거리지만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테일러는 내전으로 가족들을 잃었다. 여러 형제들이 있었고,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건강한 조부모까지 있었다. 언젠가 그가 해강에게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모두 테일러와 같은 환한 웃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내전과 사고, 범죄로 모두 목숨을 잃었고 군인이었던 테일러는 폭발에 휩쓸린 가족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명령을 수행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 그는 우울증을 앓았고 항상 완벽하게 해내던 명령 중에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언제나 사소한 실수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부상까지 당해 의가사 제대를 한 것이다. 그동안의 그의 공로를 인정해 당국에서는 그에게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보상금과 사유 재산을 주었지만, 그는 힘겨운 재활훈련을 끝내고 퇴원한 후 트레이너로 일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노력을 했다. 그는 언제나 밝고 유쾌함을 잃지 않는 남자였다. 해강도 원래 잘 웃는 편이긴 했으나, 그와 같이 지내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특히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뿐인 가족을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한국에 가도 내가 가르쳐준 것들을 연습하는 걸 게을리하지 말아요. 건강해요, 해강.”

언제나 그 환한 미소를 잃지 말고. 재희와 해강이 출국하던 날,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온 테일러는 마지막으로 해강을 단단히 안아주며 속삭였다. 언제나, 웃어요.

“그럴게요. 잘 있어요, 테일러.”

해강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 봐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앞으로는 테일러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저 해강은 웃었다. 언제나처럼, 환하게.

***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는 아직 어립니다.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애는 또래보다 키도 크고 운동을 좋아해요. 이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아니요, 내 말은, 이 모든 것 말입니다.

….

대체 열여섯 짜리 소년에게 내가 왜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군요. 물론 계약대로 저는 그를 잘 교육시킬 겁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하지만 이건 전직 요원이자 군인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묻는 겁니다. 미스터 임, 왜 그가 총을 다루고 사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단지 체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왜 피치 못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을 호신술과 그를 조절하는 법, 예기치 못한 기습과 중독, 사고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까?

테일러.

….

당신은 그저 당신이 할 일을 하세요. 대화는 이걸로 끝입니다.

***

“영국? 나 영국 가 본 적도 없는데?”

양치를 하던 해강이 컵에 물을 받으며 되묻자, 재희가 보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옆에 놓인 머그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장하라는 거잖아. 위장 뜻 몰라?”

“아는데…”

“어차피 네 기록은 전부 내가 손볼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누가 물어보면 가족 사업차 영국에서 지내다 왔다고만 해.”

“우리 집은 미국…”

“그러니까 위장이라고 몇 번 말해.”

해강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하던 양치를 마저 했다. 입안을 헹구고 세수까지 한 뒤, 세면대 옆에 놓인 로션까지 톡톡 바른 후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가자 재희는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한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한쪽 손으로는 커피가 담긴 머그를 들고 있었다.

해강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재희를 따라 서울에 위치한 한 아파트로 이동했다. 장거리 비행으로 잔뜩 예민해진 재희는 거의 일주일 동안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짜증을 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구석에 유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특히나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수면 가운만 걸친 채 베란다 창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해강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에 재희를 바라보곤 했다. 분명 그의 몸은 의자 위에 앉아있는데, 금방이라도 어딘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먼 시선이 응시하는 곳이라던가, 아니면 그의 몸이 기대어있는 유리창 너머의 밖으로라든가… 아무튼 그럴 때마다 해강은 그에게 다가가 재희가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열에 여덟 아홉은 깨어있었지만, 아주 가끔씩, 재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그럴 때면 해강은 조심조심 재희의 몸을 안아 들어 안방 침대에 눕혔다. 언젠가부터 해강의 키는 재희를 훌쩍 넘었고, 또래보다 웃자란 몸은 재희의 무게 정도는 가볍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국에서 있을 때는 잠든 재희를 그의 수행원이나 김 실장이 옮기곤 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희는 한국에 온 뒤부터 주변을 무척 신경 쓰는 듯했다. 그의 신경 범위에는 재희가 마련한 아파트의 이웃들도 포함이었다. 미국에서처럼 정장을 입은 수행원들이 평범한 아파트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그림이었기에, 재희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하들을 집 안까지 부르지 않게 되었다. 김 실장도 같이 한국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는 예전보다 더욱 바빠진 것 같아 보였다. 이따금씩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차를 대기시킨 채 재희를 기다리는 그를 마주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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