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5화 (125/166)

125화

해강은 자연스럽게 그전의 집안을 돌보던 하녀와 집사, 그 외의 고용인들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집도 예전보다는 작아졌기에 필요 없었다. 식사와 집안일을 하러 가사도우미가 주기적으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항상 집 안에 그림자처럼 대기하던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강에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즉, 집안에서는 온전하게 재희와 단둘이 지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해강은 간단한 집안 일과 스스로 식사를 챙기는 것을 배웠고, 재희가 시키는 대로 다시 운동을 하러 다녔다. 테일러와 함께 했던 훈련들만큼은 못하지만 꽤나 강도 높은 운동이었고, 언제나 기진맥진한 채로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온 해강은 샤워 후 간단한 저녁과 음료수를 마시고 숙제를 조금 한 다음 잠에 빠지는 생활을 반복했다. 재희는 해강을 다시 한국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킬 거라고 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명백한 통보나 다름없었다. 해강은 영어와 수학, 과학 같은 과목들은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지만 국어나 한국사 같은 과목들이 문제였다.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도 꽤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해강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 학교 커리큘럼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다니게 된 한국의 학교는 기억보다 더 빠듯하고 엄격한 체계와 비효율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목들을 잔뜩 배우게 했다. 해강은 고조선부터 시작해 조선 말기에 이르는 ‘비교적 간단하고도 기본적인’ 한국의 역사를 벼락치기로 공부하면서, 한국에서는 에세이 쓰기나 토론 수업, 또 체육이나 음악과 같은 예체능 과목을 이름만 올려두고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나 개인 교사는 그런 해강의 불평을 기꺼이 들어주면서도 숙제의 양을 줄이지는 않았다. 대체 내가 왜 조선 시대의 왕 이름들을 다 외워야 하는 건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내일 있을 과외 수업의 쪽지시험 범위를 확인한 해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에 온 지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고, 겨울이 끝나자마자 해강은 근처 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재희가 내민 두툼한 종이뭉치들을 대강 살펴보니 학교에 대한 역사와 기록, 심지어 교내 규칙과 선생들의 신상까지 모두 적혀있는 것을 보고 해강은 혀를 내둘렀다. 이런 것까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또 재희의 신경을 긁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해강은 얌전히 그가 준 프린트 다발을 넘겨보며 자신이 다니게 될 학교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지 싶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 학교는 바로 재작년까지만 해도 여자고등학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재단 이사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독단적으로 학교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며 남자고등학교로 바뀌었다고 했다. 기존에 있던 오래된 학교들이 새 단장을 하고 이름을 바꾸거나 교복이 바뀌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공학도 아닌 여학교가 남학교로 완전히 바뀌어버린다는 건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강에게 그런 일은 별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내내 공학만 다니다 보니 남학생들만 있는 학교는 어떨까 하는 상상 정도만 했을 뿐이었다.

“이게 뭐야?”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미국에서도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서 살다 보니 해강은 그동안 눈을 볼 일이 별로 없었던 지라,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성당 고아원은 눈이 내리는 날에는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아이들을 다 실내로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ㅡ아마 더 어린 동생들에게 독감이나 감기를 옮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더 엄격하게 아이들의 외출을 제한한 것도 있었다ㅡ해강은 해가 저문 밤에 내리는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거의 처음 느껴본 거나 다름없었다. 평소였으면 집까지 걸어서 20분 정도면 올 거리를 눈을 구경하느라 거의 두 배 가까이 걸려서 돌아온 날, 빨개진 코끝과 뺨에 눈을 매달고 들어서는 해강을 재희는 피곤한 눈으로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거실 테이블 앞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편한 자세로 기댄 채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둘둘 감았던 목도리를 풀며 다녀왔다는 인사를 한 뒤 욕실로 가려던 해강의 시선 끝에, 뭔가 이질적인 물건들이 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방금 뭐지…? 의아한 얼굴로 재희 쪽을 다시 돌아본 해강의 얼굴이 가벼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형이 가져온 거야? 대체 어디서…”

재희는 무덤덤한 얼굴로 권총 하나를 들고 천으로 손잡이 부분을 닦고 있었다. 느리지만 정확하고 익숙한 그의 손길에 해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거실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재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들고 있던 총의 손질이 끝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해강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재희의 희고 가는 손에 들린 검고 윤기나는 총기는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얌전하고 고요했다. 어쩌면 정말 장난감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재희의 앞에 늘어진 여러 모양의 총기들과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장난감이겠거니, 하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물로 총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해강은 테일러가 자신에게 보여준 것들과 가르쳐준 것들을 여전히 기억했다. 그것도 아주 똑똑히.

“…네 생일 선물이야.”

툭 떨어진 말에 해강은 잠시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농담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심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진심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해강은 자신의 생일이 5월이었다는 것을,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지금 그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곧, 그걸 굳이 말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재희는 아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농담이 아니라도… 글쎄, 적어도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니길 빌어야겠지.

해강은 지루한 얼굴로 침대 헤드에 머리를 댄 채 누워있다. 가벼운 트레이닝 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해강의 손이 분해된 리볼버를 들고 있다. 거의 부품에 가까운 총의 조각조각들을 쥔 손가락이 순서에 맞게 착착 움직이고, 찰칵거리는 소리와 끼릭거리는 소리를 내며 총은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아간다. 여전히 소년의 얼굴은 지루해 보인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그의 다리 사이로, 침대 위에는 여러 개의 총이 뒹굴고 있다. 하나같이 눈 감고도 다시 조립과 분해가 가능할 정도로, 이미 한참 전부터 해강과 함께 이 방에서 지낸 물건들이다. 아니, 친구라도 해도 나쁠 건 없겠다.

여전히 소년은 지루하다.

***

재희의 난데없는 선물을 받아든 후, 해강은 그것들을 자신의 방에 가져올 때까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것들이 전부 잘 만들어진 정교한 모형이거나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해강이 알기로 한국은 총기 소지가 금지된 국가였다. 몇 년 미국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 정도 상식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재희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마치 오늘 저녁은 생선 요리야, 라고 하듯 해강에게 그것들을 떠넘겼다. 두꺼운 골판지 상자에 담긴 검고 윤기나는 총기들은 한눈에 봐도 모두 잘 손질되어 있는 듯했다. 상자를 받아 드니 묵직하게 다가오는 무게감도, 그 윤기와 빛깔도, 무엇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더 확실해졌다. 진짜 총이다. 장난감이나 모형 따위가 아닌. 해강은 이걸 어찌하냐는 눈으로 그를 흘금 쳐다보았다. 재희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또다시 짧게 말할 뿐이었다.

“생일 축하해.”

그러니까 내 생일은 이미 지나도 한참…! 금방이라도 반박하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해강은 관두었다. 갑작스럽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오늘은 안 그래도 운동하면서 사소하지만 부상을 당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선 것도 있었다. 물론 눈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오느라 평소와 귀가 시간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다쳤어?”

군말 없이 재희가 건넨 박스를 안아 든 채 자신의 방으로 가려는 해강의 발을 멈춘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재희의 목소리였다. 마치… 정말 어쩌면, 조금쯤은, 해강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는 것 같은 투의 말에, 해강은 저도 모르게 뒤돌아서 재희를 다시 응시했다. 그는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해강의 발목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정확했다.

“아… 별 거는 아니고, 그냥, 운동하다가 조금 삔 정도. 트레이너 쌤은 얼음찜질 좀 하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래. 내일은 나오지 말라고…”

“…이상하네, 네가 다치다니.”

재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해강은 잠시 긴장한 얼굴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뭔가 나에 대한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재희는 별다른 말을 더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집에서 쉬어. 나는 부산에 잠깐 다녀올 테니까 식사는 알아서 하고.”

“또 출장 가?”

“그 비슷한 거.”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갔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면서, 해강은 그가 한국에 오고 나서 좀 더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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