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겨울이 끝나고 해강은 예정대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입어보는 교복은 불편하고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는 기분이라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넥타이를 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재희의 손길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한 번만 알려줄 거야. 매일 아침마다 네가 알아서 해야 해. 왜 요즘은 끈만 올리면 되는 것도 있는데 직접 매는 넥타이를 채택한 건지. 이사장 취향 하고는. 1분가량의 시간 동안 재희는 간간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해강은 거의 숨을 참고 있어야 했다. 크게 숨을 쉬거나 몸을 움직이며 그가 불쾌해할 것 같아서.
“알겠어?”
“…응?”
“매는 법. 알겠냐고.”
재희가 해강을 올려다보며 묻자 잠시 멍청한 얼굴로 대답을 고르던 해강이 머뭇거렸다.
“어, 응, 알겠어.”
“그럼 다시 해봐.”
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매듭을 묶어주던 손가락이, 슥 올라와 넥타이를 단번에 풀어버렸다. 어떻게 한 거지? 해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목과 넥타이 부분을 더듬다가, 재희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가 해줬던 순서를 침착하게 떠올리며 넥타이를 매 모양을 완성시키자, 메마른 표정으로 물끄러미 해강을 쳐다보던 재희의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웃음이 스쳤다.
“그래.”
잘했어, 나 그거야, 같은 칭찬의 말도 아닌, 그저 그래, 라고 짧게 말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손을 올려 살짝 삐뚤어진 매듭을 다시 완벽하게 정리해 준 후 드레스룸을 나갔다. 해강은 멍한 얼굴로 두 손을 내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제야 해강은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던, 재희의 익숙한 향수인지 체취인지 모를 냄새가 훅 끼쳐왔다.
***
“우리 남중고등학교는 신입생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교장이랍시고 단상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은 채 한 시간이 넘도록 떠들어대는 사내를, 학생들은 모두 불만스럽고 피곤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인간이 교장이라니 앞으로 학교생활이 알만 하겠군, 이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해강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나 딱히 불만스럽지는 않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였기 때문에 강당을 가득 메우고 선 학생들은 전부 1학년들뿐이었고,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교사들 옆에 학생회 선배로 보이는 학생들이 서너 명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해강도 이미 얼굴을 아는 학생이었다. 훌쩍 큰 키에 마른 몸, 커다랗고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창백한 인상의 학생회장은 재희가 건넨 학교 관련 정보에서 봤던 얼굴이었다. 듣기로는 이사장의 조카라고 하던데. 하지만 딱히 낙하산 따위가 아니라, 그의 중, 고등학교 성적 자체도 무척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유약하고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맡을 리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쑥덕거리는 인간들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해강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기에 시선을 돌려 다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끝날 줄 모르는 교장의 연설은 제아무리 한창때의 튼튼한 남고생일지라도 지치게 만들기의 충분했다. 처음에는 긴장된 표정으로 각진 자세를 유지하며 뻣뻣하게 서 있던 학생들은 점점 느슨해진 자세로 주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해강만이 여전히 뒷짐을 진 채, 한 치의 변함도 없는 자세로 단단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도 그저 그런 평범한 학교네.”
해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재희는 무슨 연유로 굳이 이 학교를 콕 집어, 입학 시기에 맞춰 기다리기까지 해 해강을 입학시킨 걸까. 분명 그가 지시한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텐데. 입학식 날 아침까지 그는 집에 오지 않았다. 아마 부산에서 있는 출장이 늦어진 탓이겠지만, 해강은 운전기사가 학교까지 태워주는 길에도 살짝 토라진 얼굴로 턱을 괴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학교에 도착했다.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시라는 기사의 인사에도 해강은 목례만 한 번 건넨 뒤 휘적휘적 걸어 교문을 들어왔다. 이미 중학교에서 알던 사이인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며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첫날부터 머리나 교복의 불량을 지적받으며 잔소리를 듣고 있는 학생들도 몇 보였다. 해강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목을 너무 답답하게 죈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고 교복 재킷의 단추도 풀어 젖힌 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학생들 중 몇 명이 그를 흘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한국 애들은 미국 애들에 비해 더 동안인 것 같았다. 평균적으로 키도 좀 작은 것 같고. 눈에 띄는 덩치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중 반은 아예 살까지 쪄 덩치가 크거나, 아니면 아예 머리를 밀고 우락부락한 인상을 뽐내는 운동부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다고 한들, 다들 갓 중학교를 졸업한 열일곱 살의 소년들일 뿐이었다.
그중 해강은 단연코 모두의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큰 키와 단단한 체격은 물론이고, 이미 그의 성숙한 분위기마저 성인과 다름없어 보이게 했다. 웃지 않을 때의 해강은 웃을 때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타입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자신들과 같은 교복을 입은 저 녀석이 어디서 혼자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는 것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해강은 이 모든 것이 지루했다.
해강의 예상과 다르게 재희는 한 달 후 다시 미국에 돌아가겠다는 통보를 했다.
사실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이제 그의 제멋대로인 통보에 가까운 의사소통 방식에 이골이 난 참이었다. 해강은 잠시 침묵하다가 언제, 라고 물을뿐이었다.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재희도 그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까 굳이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지낼 거야. 그동안 나도 또 몇 번 왔다 갔다 할 거고. 네 앞으로 계좌 몇 개 열어놨으니까 내일 김 실장 따라서 학교 끝나고 은행도 다녀오고 카드도 만들어. 집안일해 주시는 분도 더 고용했고 너는 공부하거나 운동하는 거 외에는 신경 쓸 거 없으니까…”
“형.”
재희는 대답 대신 서랍에서 손목시계를 꺼내다 말고, 거울 너머로 흘긋 해강을 건너다보았다. 능숙한 솜씨로 손목시계를 차는 그를 보며 해강을 안방 문간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를 왜 한국에 다시 데려온 거야?”
어쩌면 더 예전부터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낮고 담담한 그의 질문에 재희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거울 앞에 놓인 향수병 하나를 집어 들어 손목 안쪽에 한 번씩 뿌린 뒤 목 안쪽에 살짝 문지른 그가 가볍게 되물었다.
“다음 생일에 갖고 싶은 건 없니?”
***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조용하던 남학생들이 금방 왁자지껄한 소음을 내며 흩어졌다. 쉬는 시간을 틈타 매점을 다녀오니 마니, 화장실부터 가니 마니, 오늘 체육이 몇 교시냐고 묻는 등 곳곳에서 주제도 다르고 목소리의 크기도, 높낮이도 다른 대화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물론 해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그 대화와 소음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자에 교복 재킷을 걸어둔 채,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도 운동장을 지나자마자 풀어버린 해강은 교복 조끼나 가디건 따위는 입지 않는 타입이었다. 언제나 몸에 열이 많아 뛰어다니고 움직여야 할 나이였으므로, 아직 찬바람이 부는 봄에도 그는 안에 입은 반팔 티 위에 흰 교복 셔츠만 걸쳐 입는 정도였다. 그건 해강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은 교복을 정석대로 갖춰 입는다는 건 뭘 모르는 범생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겼다. 재미없고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심지어 ‘덜떨어져’보이기까지 하는.
해강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다른 얌전한 친구들을 비웃으며 누가 더 불량스럽게 교복을 입나 낄낄거리는 친구들을 보면 한국의 보편적인 남고생들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뭐가 어떻다, 그렇다 하는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해강은 그저 제일 ‘평범한’ 남학생처럼 지내는 법을 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도, 그리고 아마 재희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리라.
해강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또래들 사이에 섞여들 수 있었다. 학생들은 또래보다 훌쩍 큰 키와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해강에게 꽤 많은 관심을 가졌고, 남자 고등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입학하자마자 해강은 인기인이 되었다. 잘생긴 놈들은 으레 얼굴값을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게 넉살 좋고 성격 좋은, 게다가 운동까지 잘하는 녀석과 친구가 되는 것은 거의 1학년들 사이에서 핫이슈가 될 정도였다. 활발하고 나대기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먼저 해강에게 다가왔고, 해강은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중학교나 초등학교 때의 이야기로 대화 주제가 돌아가면 해강은 대충 둘러대곤 했다. 외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온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구태여 묻지 않은 것들에 대해 주절거리기엔 해강의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저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뿐인데, 누구나 다 하는 얘기 아닌가. 오히려 여기서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말을 돌리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해강은 재희가 한 말을 항상 되새겼다.
‘여기 애들하고 친해질 필요 없어. 아니,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마.’
그러니 해강은 그저, 자신의 영어 발음이 남다른 것은 중학생 때 잠시 유학을 다녀왔고, 한국 문화나 트렌드에 둔감한 것은 운동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며, 학교는 물론 주변 동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와서 그런 것이라며 대답했다. 스스로도 허술한 답변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학생들은 쉽게 납득했고, 저마다 자신의 무리에 해강을 끼워 넣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항상 점심시간마다 해강을 두고 학생들은 축구팀에 넣을지, 농구팀에 넣을지 입씨름을 하곤 했다. 해강은 남고생들 특유의 해맑음과 멍청함에 그 순간만큼 감사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