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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27화 (127/166)

127화

해강은 꽤, 아니 엄청나게 잘 적응했다. 금방 또래들 사이의 트렌드나 이슈, 유행 정도는 금방 깨우치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 한국에 오랜만에 들어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해강은 모든 걸 잘 해냈다. 해강도 그런대로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과도하게 많은 과목과 수행평가, 시험 같은 거라든가, 학교 수업 시간이 해 질 무렵까지 이어지는 건 물론 언제나 사람 기운을 쏙 빼놓곤 했지만. 가끔씩 재희는 한국에 들어왔고, 항상 볼 때마다 재희는 그 이전보다 더 바빠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마른 것 같았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싫어하는 그의 성미 때문에 정확히 그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해강은 눈대중으로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치수 문제가 아니라 재희의 안색과 분위기의 차이였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재희는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다가 다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빠르게는 한 달 만에 다시 올 때도 있었고, 제일 오랫동안 오지 않았을 때는 거의 반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강은 재희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희가 이런 짓을 시킬 때면, 해강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만다.

“좋아요. 사귀자.”

“…저, 정말?”

여학생의 눈이 반짝 뜨인다. 안 그래도 뽀얗던 뺨이 붉게 달아올라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해강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백을 하고도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지, 여학생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수줍게 웃었다. 이 소녀의 이름은 배유진. 유진은 남중고와 이웃한 여자고등학교인 남중여고에 다니는 3학년 선배였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학생 때부터 동네에서 예쁘기로 유명해 인기가 자자했다고 했다. 게다가 성적도 언제나 전교에서 상위권, 착하고 유머러스한 장난기도 있어 이성은 물론이고 동성 친구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은 소녀였다. 그런 남중여고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배유진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쌀쌀한 가을 초입, 해강에게 고백을 한 것이다.

해강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백을 받아들였다.

소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던진 고백이 헛수고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해본 적도 없는 짝사랑을 하느라 마음앓이를 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라도 되는 것처럼, 돌연 눈물을 흘리며 해강의 품에 답삭 안겼다. 조금 당황했지만 해강은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색하게 두 팔을 들어 유진의 등을 쓸어주었다.

하나 중요한 것은, 해강은 한 번도 이성과 교제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강이라고 해서 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에게 대시한 여자아이들을 보면 스스로도 왜 그 흔한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볼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하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예쁘고 멋진 여자애들이 해강에게 플러팅을 해도 해강은 조금 당황스럽거나 심하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여자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파티나 학교 무도회에서 상대방 여자애의 손을 잡고 즐겁게 춤을 추는 건 좋아했는걸. 해강은 스스로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곧 모든 10대 청소년들이 다 연애에 목을 매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더 이상 그런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해강에게는 공부와, 운동과, 재희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 해강이, 고백이라면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받아본 해강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유진의 고백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일주일 전, 재희는 두 달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여전히 김 실장을 대동하고서였다. 이상하게 그동안의 방문과는 달리 재희의 안색이나 기분은 평소보다 매우 좋아 보였다. 해강으로서는 다행이다 못해 조금 기쁘기까지 한 일이었다. 심지어 재희가 해강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데리러 왔을 때에는, 해강은 재희가 드디어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재희는 외부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언제나 자동차 외에는 제 발로 걸어서 이동하는 법이 없었고, 대낮에 햇빛을 받는 것도 싫어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곳을 좋아했으며, 땀 한 방울 흘리는 일도 피하는 재희였다. 그런 재희가 직접 해강을 데리러 학교 앞에 찾아오다니, 그것도 차에서 내려 여유로운 태도로 팔짱을 끼고 서 있다니. 해강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뛰어가면서도, 역시 형이 드디어 미친 게 아닌가, 하고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물론 재희는 여전했다.

“뛰지 마. 땀나니까. 교복이 그게 뭐야? 재킷은 어디 있어? 넥타이는 똑바로 매야지. 그러고 학교에서 수업 듣니?”

한바탕 잔소리를 하면서도 재희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해강은 재킷은 가방에 넣어뒀고, 넥타이는 방금 전에 나오면서 푼 거라며 변명했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기에, 해강도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춰야 했다. 김 실장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자 재희가 다시 차에 올라탔고, 해강도 그를 따라 타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온다는 말 없었잖아.”

“내가 내 동생 데리러 오는데 미리 예약까지 하고 와야 해?”

“그건 아니지만…”

해강은 결국 참지 못하고 히죽 웃어버렸다. 도통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재희의 기분이 좋아 보이고, 게다가 자신을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했지 않은가. 해강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에 온 메시지들을 확인하다가 재희의 문자를 확인하고 뛸 듯이 놀랐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정문으로 와. 단순하고 명료한 문장에는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었지만 해강은 몇 번이나 문자의 내용과 발신인을 확인하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 해강을 보고 친구들은 무슨 좋은 일 있냐며 가볍게 놀려댔고, 같이 노래방에 가자는 친구들의 손도 뿌리친 채 해강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고 총알처럼 튀어나간 것이다. 학교 문을 나서니 하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운동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늦은 평일 오후, 해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 나왔다. 어디 가려고 그러지? 외식이라도 하나? 해강이 웃음을 참으며 얌전히 가방을 안고 앉아있자, 김 실장에게 차를 출발시키라는 눈짓을 보낸 재희가 말했다.

“오랜만에 어디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어디? 맛있는 거 뭐?”

“너 먹고 싶은 데로 가야지.”

재희는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내다보며 살풋 웃었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는 제안에 바로 눈이 반짝거리며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싶어 재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이내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지만.

“간만에 외식도 좀 하고, 백화점 가서 옷도 좀 사야겠어. 가정부 아주머니가 반찬은 잘 해주시니? 학교는 어때?”

“좋아, 잘 해주셔. 청소도 완전 깨끗하게 잘 해주시고… 음… 학교도 그럭저럭 좋아. 숙제랑 수행평가가 너무 많은 것만 빼면. 아, 한국은 모의고사라는 것도 본대. 선생님들 말로는 2학년 때부터는 수능 준비를 해야 해서 보는 거래. 맞다, 형, 그리고 다음 달에 수학여행이라는 걸 가는데…”

“조금 천천히 말해. 너, 한국어 많이 빨라졌구나. 그전에는 집 안에서도 영어를 쓰는 게 더 편하다고 하더니.”

재희는 희미하게 웃으며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해강으로서는 전율할 만큼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형이 웃으면서 나한테 농담도 하다니. 그런 얼굴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궁금해하고, 웃으면서 나를 보다니.

해강은 왠지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에, 지금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갔으면, 하고 바랐다.

“누구?”

“배유진.”

“배유진…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게 누군데?”

막 식사를 끝내고 직원이 디저트를 갖다 준 참이었다. 재희는 해강이 평소처럼 먹성 좋게 음식을 먹어 치워도 눈치 한 번 주지 않고,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자신의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나 재희와 함께하는 식사 때는, 해강은 체할까 두려워 제 몫만큼 먹을 수도 없었고, 재희 스스로도 입이 짧아 접시 위에는 항상 음식이 남아 있곤 했다. 그러나 재희는 식탁 위에 그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하거나 미완성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살 때는, 항상 가정부 아주머니가 특유의 남부 악센트로 ‘우리 집에서 남는 음식으로만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다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며 투덜거리는 것을 해강은 자주 듣곤 했다. 물론 형한테 이르지는 않고 말이다. 입은 그토록 짧으면서 왜 항상 식사는 완벽하고 풍성해야 한다는 건지, 어차피 다 남길 거면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하는지 해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점점 자라면서 해강의 먹성도 그만큼 좋아져 이제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었다. 그것도 한국에 오고 나서는 많은 식구를 위해 하루 종일 맛있고 엄청난 양의 요리를 하던, 손이 크고 풍채도 좋던 가정부인 멜리사가 없으니 끝난 얘기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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