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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28화 (128/166)

128화

식사 내내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던 재희는 디저트로 진한 커피 한 잔을, 해강의 몫으로 알록달록한 스프링클과 초콜릿 시럽이 듬뿍 뿌려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젠틀한 태도를 내내 유지하던 직원은, 반듯한 자세로 트레이 위에 디저트를 얹어 돌아왔다가 누구의 앞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놓아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살짝 머뭇거리는 그의 손 위에 들린 트레이에서 재희가 커피를 가져가자 직원은 안심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해강의 앞에 두고 돌아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린 재희는 그 뒤로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테이블 한구석에 밀어둘 뿐이었다. 해강이 작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입에 넣자, 머릿속에 작은 불꽃들이 터지는 듯한 달콤함과 행복감이 밀려들어왔다. 역시 밥하고 디저트는 또 다른 얘기라니까. 분명 배불리 먹었음에도 해강이 신난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아이스크림에 열중하는 것을 재희가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그 시선은 그가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정확히는 시킬 일이 있을 때 보내던 눈빛이었으므로, 해강은 움직이던 스푼을 멈췄다.

“왜?”

“뭐가?”

“그렇게 쳐다보는 거. 형이 뭐 시킬 때 그렇게 쳐다보잖아.”

“내가?”

“응.”

“….”

재희는 한 쪽으로 턱을 괸 채,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세로 가만히 해강을 응시했다. 해강은 이 인간이 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구나, 싶어 흘금흘금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빠른 속도로 비우면서 말이다.

“해강아.”

“응?”

“누구 좀 만나볼래?”

“누구?”

“배유진.”

“배…누구?”

“배유진.”

“그게 누구야? 여자? 여기 한국에서?”

“남중여고. 3학년. 키는 168에 체형은 보통에서 조금 마름. 전교 석차는 지난해 평균 5등 이내고, 얼굴도 예뻐서 인기도 많지. 어릴 때 잠시 아역 모델로 활동한 적도 있을 만큼. 교우관계도 좋음.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교사들 평판도 최상. 부모는 양친 둘 다 살아계시고, 엄마는 공무원, 아빠는 S기업 전무. 연애로 결혼해 딸 하나만 낳고 셋이서 아주 화목한 가족이라더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강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난데없이 한 여자를 만나보라고 하더니, 그녀의 신상 정보를 줄줄 읊기 시작하는 재희의 얼굴은 여전히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남의 뒷조사라도 한 건가. 아니, 별로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재희라면. 그는 원하는 정보는 뭐든지 알아내는 남자니까. 그런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는 한 소녀를, 대체 왜? 게다가 무엇보다도, 라니. 재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해강,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해강은 그 와중에도, 재희의 입에서 나온 ‘너를 좋아해’라는 말에 의미 모를 위화감과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속이 울렁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생경한 기분이었다. 해강이 반쯤 입을 벌린 채 재희를 응시하자, 재희는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

“배유진이라는 애, 걔가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그걸 이용해서 네가 대신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니까.”

“나를 조…좋아… 엥? 뭘, 한다고?”

멍한 눈으로 재희의 말을 되짚어 따라 하던 해강이 정신을 차린 듯 재차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이용? 대신 해줬으면 하는 일?

“두 번 말하는 거 짜증 나니까 그만 말하게 해. 아무튼 용건은 그거였어. 지금은 미팅이 있어서 이따 저녁에 집에서 자세히 얘기할 테니까. 집까지는 알아서 갈 수 있지?”

재희는 정말로 자신의 볼 일은 그거로 끝이라는 듯, 매몰찬 태도로 겉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계산을 마치고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을 나가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재희를, 해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예쁘고 투명한 그릇 안에 담겨있던 아이스크림은 이미 다 녹아버린 후였다.

***

재희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해강이 자신을 도와줘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해강이어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해강으로서는 반쯤은 이해할 수 있었고, 나머지 반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바보같이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해강은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재희가 진중한 태도로,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지 않고, 저렇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너뿐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해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강요는 아니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재희도 그런 해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일은 간단해. 네가 할 일은 그저, 그 애가 너를 더욱더 좋아하게 만들면 돼. 너무 좋아서 못 견딜 만큼, 너밖에 보이지 않도록.”

그렇게 속삭이는 재희의 눈가에는 어느덧 낮게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다시, 피곤한 건가? 요즘도 다시 잠을 통 이루지 못하는 건가? 이제는 같은 집에서 거의 지내지 않으니 해강은 그의 생활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안 돼. 해강이 너여야 해.”

그 여자애가, 너를 자기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게 만들어.

해강은 그 말을, 마치 신탁을 받은 사제들이 그러하듯, 마음속과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눈을 감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그의 태도는 분명한 순종의 표시였다.

그래. 그렇게라도 형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야, 그거 들었어? 주해강 말이야, 여고 배유진 누나랑 사귄대! 대박이지?”

“뭐? 배유진이면 그 3학년 배유진?”

“그래, 그 명화여중 다녔던 배유진 누나 있잖아. 게다가 그 누나가 주해강한테 먼저 고백했다는데?”

“와, 역시 끼리끼리가 딱 맞는 말이네. 그런데 그 누나 남자친구 있지 않냐? 내 친구 아는 형이 작년에 그 누나한테 대시하다가 결국 사귀었다고 하던데.”

“뭐? 그럼 바람이야?”

“바람은 무슨, 그 형이라는 사람이 거짓말한 거 아니냐?”

“아무튼 진짜 개 부럽다. 나 예전에 역 앞에 노래방 갔다가 그 누나 봤는데. 존나 이쁘더라 진심. 어릴 때 아역배우도 했다던데. 주해강한테는 좀 아깝지 않나?”

“이 새끼 주제 파악 못하네.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해.”

“나 아는 형도 그 누나 오래 짝사랑했잖아. 1반에 김성태도 중1 때부터 배유진 누나랑 같은 학원 다니면서 좀 친했는데,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고백했다가 차였다며.”

“헐, 왜? 김성태도 그 정도면 잘생긴 편 아닌가.”

“연하는 싫다고 했었대. 미안하다고. 그래서 걔도 그냥 단념했는데, 갑자기 지난주부터 그 누나가 주해강하고 사귄다고 페북이며 인스타며 다 올려서, 지금 엄청 열 내고 있던데?”

“그런데 그 누나 그런 거 싫어하지 않았나? 우리 누나가 그 누나랑 같은 반인데, 고등학교 내내 남자친구 사귄 적도 없고 썸만 좀 탔지, 썸 타면서도 티 내고 막, SNS에 올리고 그런 거 싫어했다던데.”

“내가 알겠냐? 어, 야, 저기 주해강 온다.”

해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복도를 지나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먼저 인사를 건네 오는 친구들도 있었고, 해강이 먼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친구들도 있었다. 해강이 지나간 자리는 항상 조금씩은 소란스러워졌다. 아침부터 활기차게 교실로 들어선 후, 해강은 책상 위에 가방을 털썩 올려놓고 의자에 걸터앉았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훑어본 뒤 다시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열었다. 노트와 필통 등을 꺼내며 자습 준비를 하는 해강을 보고 저마다 소문과 진실에 대해 수군거리던 학생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주해강은 좋은 녀석이니까. 게다가 그 유명한 배유진이 직접 고백했다면,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얹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해강의 웃음은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해강이 동네에서 제일 예쁜 누나와 사귄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시기 질투하거나 뒷담을 깔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럴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제일 중요한 사실이지만.

“오늘도 일찍 가?”

“응, 미안. 과외 쌤 오시는 날이라 일찍 가서 준비해야 해.”

“하루쯤은 쉬면 안 돼? 어차피 집에 형 없다며.”

“안 돼. 그래도 우리 형은 다 알아. 나중에 다 혼난다고.”

“치, 오늘 나 학원도 빼고 나온 건데.”

유진은 입술을 쭉 내밀고 한껏 삐진 표정을 했다. 작고 갸름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표정이 나 단단히 삐졌다, 하고 시위하는 듯했다. 오늘은 둘이 사귄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한여름이었고, 밤이 제일 늦게 오는 시기기도 했다. 날은 더웠지만 둘은 학교와 학원을 파하고 적어도 하루걸러 한 번씩은 만날 정도로 자주 데이트를 했다. 사실 말이 데이트지, 둘 다 학원이니 과외니 각자 바쁜 시기였기에, 만나도 오래 시간을 보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더 자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유진이었다. 수줍고 여렸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녀가 그렇게 완강하고 고집이 센 줄은, 해강은 사귀면서 처음 알았다. 유진은 자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질투를 많이 하고, 해강의 애정을 필요로 했다. 그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어. 나를 좋아하는 남자애들은 많기는 했는데, 나는 그냥 다 그랬거든. 그래서 딱히 누군가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 없었고. 그런데 해강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듣는 이로서는 우쭐할 수도 있는 고백이었다. 동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예쁘고 유명한 소녀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아무렴 우쭐해지지 않을 남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해강은 아니었다. 그래,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물론 유진은 정말 좋은 여자 친구였다. 좋은 선배고, 공부나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 본받을 점도 많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성격도 좋고 유머 감각도 있어서 같이 있으면 항상 재미있고 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해강은 가끔 유진이 촉촉한 눈빛으로 말을 멈추고 자신을 올려다볼 때, 자신의 손을 잡은 자그마한 손이 슬그머니 올라와 자신의 팔이나 어깨를 만질 때, 또는 더 가끔씩, 가볍게 포옹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 진하게 겹쳐올 때.

해강은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해강은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줄 수 없어 그저 웃으며 한번 가볍게 안아주었다. 짧게 안았다가 다시 놓아주는 그의 팔을 아쉬운 듯 잡고 있던 유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 해강아.”

“응?”

“나…이번 여름 방학 때, 학원에서 수능 대비 캠프를 가거든. 1박 2일로 학원 쌤들이랑, 학원 애들이랑 해서 숙소에서 같이 합숙하면서 공부도 하고, 특강도 듣고 하는 거야. 엄마랑 아빠한테 허락도 받아놨어.”

“그런데?”

“…바보야, 이 정도 되면 눈치 좀 채주면 안 되니?”

해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진이 붉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 그 캠프 안 갈 거야.”

왜? 여전히 해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해맑고 선한 얼굴로 물었다. 유진은 왠지 그 얼굴을 마주하자, 더욱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너희 집에서 있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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