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29화 (129/166)

129화

“안 돼.”

재희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는 바쁜 기색으로 침대 위에 마련된 넥타이를 들어 목에 매고는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대화는 이걸로 끝, 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태도에 해강은 발을 구르며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해? 갑자기 그러면, 나는?”

“알아서 해. 이제 그럴 나이도 됐잖아.”

“…형, 나 17살인 건 알지?”

재희는 재킷을 입다 말고 잠시 멈칫, 하며 해강을 돌아보았다. 해강은 더욱 울상이 되어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형!”

“시끄러워. 17살이면 요즘 애들 다 해. 중학생 때부터 여자 친구 사귀는 애들도 있잖아. 내가 이 나이에 성교육까지 해주리?”

“그, 그런 걸 어떻게 해!!”

재희의 무감한 태도에 해강은 짐짓 빨개진 얼굴로 그를 원망하듯 흘겨보았다.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돼. 오히려 잘 됐어. 생각보다 배유진이라는 애, 너를 엄청 좋아하나 보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재희는 이미 외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향수 한두 번을 칙칙 뿌린 후, 침대 시트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었다. 해강이 불퉁한 얼굴로 여전히 안방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뭐야? 비켜.”

“못해.”

“정 못하겠으면 끝까지 안 가도 상관없어. 적당히 걔가 만족하게만 알아서 해.”

“그러니까 나는…!”

“원래 남자들은 안 좋아하는 애들하고도 할 수 있어. 그럼 힘내고, 헤어지는 건 절대 안 되니까 다신 얘기 꺼내지 마. 어차피 몇 달만 참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들을 쏟아낸 재희는 해강을 밀치고 현관으로 갔다. 구두를 신고 문을 연 재희가 다시 문을 닫고 잠금이 걸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해강은 심각한 얼굴로 안방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와아, 여기가 너희 집이야?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어. 그냥 들어와.”

“혼자 있는데도 엄청 깨끗하게 잘 해놓고 산다~집도 엄청 넓구. 혼자 심심하지 않아? 집에 있으면.”

“별로… 나도 집에서는 잠만 자니까.”

유진은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문을 열어주니 밝은 레몬색의 얇은 반팔 니트에 흰색 스커트를 입은 유진이 환한 얼굴로 서 있었다. 흰 피부와 복숭앗빛 뺨이 어우러져 그만큼 밝고 환한 옷도 잘 받는 것 같았다. 게다가 평소에는 교복만 입다가 사복을 입은 모습은 거의 처음 본 것이었는데, 누가 봐도 나들이나 데이트를 나갈 법하게 신경 쓴 차림새에 해강은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을 들여보내주었다.

명목상으로는 ‘같이 공부하기’라는 게 오늘의 데이트였다.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유진이었고, 실제로도 그녀는 큼지막한 쇼퍼 백에 책과 노트를 가득 챙겨온 듯, 해강이 대신 받아 든 순간 꽤나 묵직한 무게 감에 다소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가방 안을 슬쩍 살펴보니 책뿐만 아니라 갈아입을 옷으로 추정되는 다른 새 옷들이 곱게 개어져 들어있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이래도…

일주일 전, 해강은 유진의 은근한 어필과 조름에 못 이겨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허락’이라고 하니 약간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해강은 마음만 같아서는 단번에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허락’을 내려준 것은 바로 재희였다. 재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해강에게 유진과 깊은 관계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해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위해서? 왜 하필이면 유진을? 그것도 내가? 그러나 재희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해강도 유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진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해강을 올곧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진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해강이 유진을 좋아하는 것과 유진이 해강을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해강은 그걸 아주 잘 알았다. 그런 해강의 담백하고 순종적인 태도에 유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욱더 해강에게 빠져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이미 두 사람만 보면 상대방을 떠올리며 같이 숙덕거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유진은 기어코 부모를 졸라 해강과 같은 학원으로 옮겼다.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서로 달라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그녀는 부모에게 해강이 다니는 학원의 강사들이 더 강의 전달력이 좋고 방학 동안 수능 대비 특강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말이다.

유진의 성적은 조금씩, 아주 심각하지는 않을 정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런 딸의 요구를 당연히 들어주었다. 그 원인이 바로 그 학원에 다니고 있는, 자기들조차 모르는 딸의 남자친구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거나 유진은 전직 아역 배우답게 연기력이 뛰어났다.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엄마가 캠프 가는데 그렇게 꾸미고 가냐고 잔소리하는 거 있지? 둘러대느라 혼났잖아.”

유진이 재잘거리며 샌들을 벗고 현관 위로 올라섰다. 유진은 낯선 집에 처음 와 보는 사람치고는 꽤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집 안을 둘러보며 해강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래도 나름 손님이 온다고, 해강이 전날부터 집안을 청소한 참이었다. 주에 두 번씩 다녀가시는 청소부가 계시긴 했지만, 하루나 이틀이면 금방 바닥에 널린 옷가지와 빨랫감, 자잘한 쓰레기들이 생기곤 했으므로, 해강은 어제 긴장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집안 청소를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러나 해강은 전날부터 도무지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내가 사는 집으로 온다. 게다가 형도, 다른 어른도 없는 빈 집에서… 거의 약한 패닉에 걸릴 정도였다. 해강의 속도 모른 채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환한 미모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 이건 거의 내뿜는 정도라고 해강은 생각했다. 대체 뭐가 그녀를 그렇게까지 기대하게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게 해강을 긴장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과 해강은 부엌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해강은 과외 문제집, 유진은 학원 숙제를 펴놓은 채였다. 둘은 꽤 집중한 상태로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의 공부를 이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강은 문득 얼굴을 콕콕 찌르는 시선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유진이 조금 전부터 뚫어져라 해강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엌 테이블은 그리 크지 않아서, 마주 앉은 상태로도 손을 뻗으면 바로 서로의 얼굴이나 어깨를 만질 수 있는 거리였다. 해강과 유진의 눈이 마주치자, 유진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빙그레 웃더니 테이블 위에 얹어진 해강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쪽은 단연 해강이었고, 유진은 생각보다 대담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사실상 해강은 유진과 사귄 지 몇 달은 지난 상태였지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진도’라는 것은 거의 전무했다. 굳이 스킨십으로 따지자면 손을 잡는 거나 가볍게 포옹하는 정도. 더 진한 스킨십이나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다 한다는 키스는 엄두도 못 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강의 생각으로, 유진은 속으로 꽤나 애를 태우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아챌 정도였다. 은근하게 닿아오는 몸이나 남들 앞에서 걸을 때 유난히 더 해강을 팔을 꼭 끌어안는다든가. 언제는 저녁에 같이 공원을 산책하다가 유진은 나름대로 분위기가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그녀 나름대로 키스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 순간, 그들 앞을 뛰어서 지나가는 운동 커플 때문에 놀라 후다닥 둘이 떨어지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이다.

유진의 시선이 바라는 것은 명백했다. 해강도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집 안은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므로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진의 작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해강의 이름을 불렀다. 해강아, 하고.

그는 그 순간 정말 기이하게도,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어느 익숙한 다른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해강아.”

유진의 뽀얗고 복숭아 같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피할 틈도 없이 가까워진 얼굴은 해강에게 그 누구보다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항상 메말라 있던 입술이 벌어지고 해강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른다.

“해강아.”

유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해강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제 그 남자뿐이었다.

…꿈일지도 몰랐다. 아니, 꿈인 쪽이 더 나은 걸까, 아니면 현실인 쪽이 더 나은 걸까.

해강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눈앞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