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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30화 (130/166)

130화

첫 키스는 기대했던 것만큼 달콤하거나 환상적이지 않았다. 그저 축축하고 약간 따뜻한 입술이 해강의 입술에 닿아있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쓸어내리던 해강이 흠짓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손안에 잡힌 어깨가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너무 작고 여린 어깨였다.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기대 이하의 부드럽고 작은 어깨였다. 그런 해강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유진은 허공에서 멈춘 해강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그러나 해강은 아예 의자가 쓰러질 정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손안에 만져진 것은 판판하고 마른 가슴팍이 아니라, 낯설 만큼 봉긋하고 부드러운 가슴이었다. 그게 해강의 정신을 도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도중에 키스가 끊긴 것이 살짝 불만스러운지 붉어진 유진이 얼굴이 얄밉지 않게 해강을 흘겨보았다. 그 표정은 어느 정도 애교스럽기까지 했다. 아마 이 얼굴, 그리고 이 표정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으리라. 그러나 해강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좀… 이건 아닌 것 같아.”

“뭐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유진은 황당하다는 듯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잘 흘러가던 분위기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니, 이건 명백한 거부의 의사가 아닌가. 유진은 여전히 붉은 뺨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 상호 간의 묵언 합의하에 맺으려던 관계의 직전에 턱 걸려버린 소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서 재희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해강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시 후, 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다가가 버튼을 누른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나 설렘 같은 것이 아닌, 수치심과 가벼운 분노의 홍조였다.

유진이 다시 가방을 들고 화난 얼굴로 집을 뛰쳐나간 후, 해강은 부엌 테이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너무 많은 생각과 쓸데없는 상념들이 지금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섞이고 있었다. 어디가 처음인지, 어디가 끝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실타래를 쥐고 쩔쩔매는 기분이었다. 테이블에 몸을 기댄 해강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마른 세수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해강의 앳됨과는 정반대의 피로와 권태가 어려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미안하다고 해.”

“싫어.”

해강이 짧게 대답한 후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아예 돌리고 팔짱은 끼는 태도가 제법 고집스러워 보여 재희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주해강, 그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분명히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어. 무례한 일이라고. 그리고 아직 헤어지자는 얘기도 안 한다며? 먼저 사과해. 그럼 걔는 다시 너한테 돌아올 거니까.”

“…그러니까, 그게 싫다고.”

“시키는 건 뭐든지 한다며? 내 일을 도와주고 싶다며?”

해강의 단단하게 닫힌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을 재희는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 네가 정 싫으면 다 관둬. 너 말고도 대신할 사람은 많으니까.”

“…형은, 항상 그런 식이야. 사람을 소모품 따위로나 취급하는 그 태도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그러면 내가 잘했다고 턱이라도 긁어줘야 하나?”

“그런 말이 아니라! 나한테도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달란 말이야. 적어도 내가 뭘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형이 시키는 대로 배유진이랑 사귀고, 데이트하고, 그 애가 행복해하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그렇지만 그건…그건 안 돼. 선을 넘는 기분이야.”

해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이었다. 해강은 재희가 시키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그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다. 해강은 자신이 다른 평범한 또래의 열일곱 들과는 다르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외모나 배경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저 깊은 안쪽에서부터 변해버린 것이었다. 뭐가 변해버린 건지, 이미 뭐가 늦어버린 것인지 아직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런 언어를 갖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그러나 그런 걸 스스로 체감할 정도로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과 애정표현을 하고 사귀고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일은 아직 그런 해강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나중이 되면 익숙해질까. 익숙해질 수나 있는 걸까. 이런 일이? 해강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재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건 원망이라기보다 투정과 애증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재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무릎 위에 깍지를 낀 손을 올려두었다. 그건 재희가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임재희는 얼마 전 기이한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들어오기 얼마 전, 아니 들어오기로 결정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직 미국에서 바쁘고도 지루하게 인간들을 상대하고 있던 재희에게 김 실장은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진원지를 파악해 보니, 한국 서울을 기준으로 최근 한 달 사이에 세 차례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국? 한국에서?”

“예. 혹시 몰라 지난주에 직원을 보내 제대로 확인해 보게 했습니다만, 아직 뉴스나 언론에서는 조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관련된 조직이 따로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입막음이라던가…”

“관련 조직은 무슨, 그 정도 일은 그냥 쉬쉬하고 사고사로 처리해버리는 거, 그거야말로 한국다운 일 아닌가? 너무 오버하지는 마. 원래 우연들이 겹치면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을 이루는 법이니까. 확실하게 언론에 터질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라고 전해.”

재희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휴대폰을 쥔 손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꼭 손목 전체가, 아니 손에서 시작해 맥박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문득 재희는 자신이 너무 힘을 주어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예지를 빗나가는 일이 생겨버렸다.

시작은 가벼운 사고였다. 정말로 누구나 그저 안타까운 사고, 라고 하고 지나칠 법한 사고. 그 밑에 어떤 괴물이 숨어있는지, 어떤 괴물 같은 원인과 인간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건지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은 그저 그것을 사고라고 할 것이다. 재희는 그 사고 뉴스를 뉴욕에 위치한 호텔에서 아침 샤워를 하고 난 후에 들었다.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TV는 재희가 켜놓은 기억이 없었다. 리모컨을 찾아 끄려던 순간 뉴스의 인터뷰가 귀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모국의 말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제가…

-해당 항공사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승객들이 불안을 호소…

-제가 사진도 찍었거든요. 이상하게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꼬리 부분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은 거예요. 이건 필시 큰일이다, 제가 생각해서…

인터뷰어가 설명하는 영어 나레이션과 함께, 현지에서 인터뷰한 목격자와 관계자들의 한국말이 이리저리 두서없이 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희는 리모컨을 내려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뉴스를 경청했다. 몸이 식어 배스 가운만 걸친 몸이 차가워졌지만 상관없었다.

한국에서 30년 만에 일어났다는 최악의 비행기 추락 사고는 생각보다 빨리 사람들 관심에서 잊혀졌다. 한쪽에서는 관리 부실과 여러 가지 원인을 구태여 끄집어내며 인재라는 걸 내세웠지만, 다른 쪽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단순 사고라고 얘기하며, 비행기가 폭발하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한 200명이 넘는 승객들과 그들의 유족들을 위한 배려 깊은 애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희는 그 어느 쪽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왜 내가 미리 알지 못했지?

그 정도로 규모 있는 사고, 게다가 그만한 인명피해를 낸 사고라면 분명 재희가 알았을 것이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서 그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들의 수명은 본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니까. 그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재희는 자신이 예견하지 못하는 일들이, 점점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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