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두 번째 사고는 빌딩 화재였다. 그 또한 인재라고도 칭할 수 있고, 또 그저 파이프 부식으로 인한 우연하고도 안타까운 사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스관에 패인 아주 작은 흠집 사이로 고농도의 가스가 흘러나왔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작은 불씨가 삽시간에 17층에 달하는 건물 한 채를 집어삼켰다. 입구가 무너져 지하로 대피했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연달아 거의 일주일의 텀을 두고 큰 재난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사람들은 많은 사상자들을 낸 사건들에 대해 잠시 동안 애도하다가도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게 그들의 의지건 아니건 간에.
재희는 심기가 불편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감각은 아주 더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특히 예민한 재희의 신경에는 꽤 자주 흠집이 생겨나고 있었다. 예지하지 못한 대규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신경을 기울일 시간이 없을 만큼 사업은 날로 바빠졌다. 조금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바빠질 줄은 몰랐기에 김 실장은 추가적으로 직원들을 고용하고 각지에 건물을 매입해 지점을 늘리는 것을 추천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과도하게 늘어난 인원은 그만큼 자잘한 문제를 일으켰다. 재희가 직접 관리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 실장은 그 문제로 많이 바빠졌다. 자연스럽게 그가 바빠진 만큼 재희가 직접 해야 할 일들도 늘어났다.
그러던 중 한국 지부에 있던, 오래전 재희의 할머니와 같이 일했다던 한 노인으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다.
***
임 재희 사장에게.
그간 작고하셨는가. 자네 할머니이자 전 임 사장의 장례식 이후로 이렇게 연락을 하게 되는 건 정말 오랜만인 듯하네.
다름이 아니라 아주 긴히 자네에게 전할 말이 있으나, 내가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화나 메일이 아니라 직접 편지를 쓰게 되었네. 아마 자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났을 게야. 나는 이미 너무 위험한 상황이 되어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가 없다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자네에게 꼭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부득이하게 어려운 방법으로 연락하는 것을 이해해 주게. 뒷장에 동봉한 메모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면 나의 오랜 제자이자 친우였던 고 여사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그녀에게 내 모든 유산과 자네에게 전할 이야기도 남겨두었네. 그러나 그녀도 그렇게 안전한 상황은 아니니 서두르는 게 좋겠네. 많이 바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네의 할머니와, 자네의 가족들. 그리고 자네를 일평생 괴롭혀온 ‘그것’들에 관한 실마리를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야. 꼭 서둘러주게.
그들이 자네보다 먼저 고 여사를 찾기 전에.
임진희의 오랜 벗, 서 명훈.
***
“당신이 고 여사입니까?”
중년의 여성은 아이보리색 원피스와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꽂혀 작게 반짝거리는 나비 모양 헤어핀이 잘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젊었을 때는 꽤 뛰어난 미모를 지녔을 것이 분명한 고 여사는 재희를 보고도 거의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차분한 분위기의 고 여사는 마치 누군가 오래전 두고서 잊어버리고 간 그림처럼, 또는 작은 인형이나 오르골처럼 약속 장소인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혹시 편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재희는 전문가에게 요청해 필체 분석과 서명훈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를 해두었다. 미심쩍은 부분도 없었고, 그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제자였던 고선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뒷조사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재희는 편지를 받고 그것을 읽는 동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감을 느꼈다. 몇 문장 정도만 급히 휘갈기듯 적힌 편지였음에도, 재희는 알 수 있었다. 이 서명훈이라는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를 본 적도 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절을 하다가 자리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또 다른 상을 치를까 무서워 사람들이 어서 그를 다른 병원으로 보냈었지. 아직 어렸던 재희의 눈에 그의 얼굴에는 분명 죽음의 기운이 서려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죽을 명은 아니었으므로 아, 저 아저씨는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 생전에 그분과 아주 돈독하고 친한 사이였다며 재희에게 연락을 시도해온 인간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일을 몇 번 한 게 고작이거나, 그도 아니면 진희에게 내쳐진 주제에 염치도 없이 다시 재희에게 진희의 이름을 들먹이며 연락을 넣는 인간들이었다. 물론 전부 무시했다. 진희는 진희고 재희는 재희였다. 만에 하나 그들의 주장대로 기존의 사업 전선을 유지하며 진희의 고객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그들의 손을 잡는다고 해도, 재희는 진희가 마련해놓은 것들을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족적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한국에 방문한다는 건 아직 해강에게 말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최근 학교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훈련과 공부로 바쁜 애한테 혼선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재희는 그저 조용히, 그 애를 끌어들이지 않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에 입국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그저 김 실장만 동행하고, 한국에 있는 몇몇의 수하만 알고 있으면 됐으니까. 고 여사라는 여자의 휴대폰 번호로 문자를 보내니 바로 전화가 왔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약장소는 서울 근교에 위치한 한 카페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임 사장이겠군요.”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전해 들으셨다시피 저는 매우 바쁜 사람이고, 이번 입국도 아주 짧은 일정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한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서명훈이라는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무엇이고, 대체 뭘 위해서 나를 이곳까지 부른 것인지 말하십시오.”
재희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카페는 넓었지만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대부분 햇빛이 들어오는 전면 유리창에 가까운 자리나 입구 쪽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넓은 강이 흐르는 숲과 산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유명한 이 카페에서 굳이 안쪽에 구석진 자리에 앉는 사람은 고 여사와 재희밖에 없었다. 고 여사는 무표정한 눈으로 여전히 자신의 한쪽 팔로 다른 팔을 붙잡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자세를 자주 하는 여자인지도. 재희는 느릿한 그녀의 말투와 자신의 말에 바로바로 대답하지 않는 태도에 벌써부터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서 선생님은, 30년 전에 갈 곳 없는 저를 거둬주신 분이지요. 그분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일들을 지켜보고… 저도 이제는 한국을 뜨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의 말도 아니고 그분의 부탁인지라 저도 이렇게 대신 말을 전하려고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임 사장님, 그러니까 진희 씨는 저에게도 큰 은인 같은 분이셨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고 여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의 마르고 살짝 주름진 손이 머그잔을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진희 씨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건, 저도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부디 평안하게 잠드셨기를 바랍니다. 서 선생님도 그 일로 충격을 많이 받으셔서, 그 뒤로 모든 일을 그만두고 은퇴하셨을 정도니까요. 저도 많이 그랬었고…”
“서 선생님이라는 그분, 제가 조사한 바로는 저희 할머니의 오랜 사업 파트너이자, MS재단의 초대 설립자라고 들었는데. MS재단은 한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육을 위해 설립된 재단이 아닙니까? 지금이야 어찌 되었건 서명훈 씨의 족적을 살펴보면 그동안 교육계에서 오래 계셨지, 저희 할머니와 같이 일을 할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손자 분은 두 분이 어릴 적 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모르셨나 봅니다.”
“…동창이요?”
재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묻자, 고 여사는 미미하게 웃으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재희가 알기로 진희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아니,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녀가 생전에 동창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동창은 고사하고 친한 친구도 거의 없던 그녀였다. 대부분 사업 파트너로 만난 지인들 얘기뿐, 난데없이 동창이라니. 그것도 동창과 같이 일을 했다니. 재희가 그동안 알던 진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재희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턱을 문질렀다.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속이 답답해질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고 여사님, 처음부터 말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게다가 서명훈 씨가 직접 전하지 못할 사정이라는 것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선생님은…”
고 여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목이라도 조른 듯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차분하던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재희는 보았다.
“…서 선생님은… 오늘 새벽, 자택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재희도 그녀처럼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음성은 완연한 피로감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그제야 재희는 그녀가 왜 그렇게 메마른 얼굴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지 눈치챘다.
“그 분은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던 겁니다. 저나 다른 제자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저희들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잠깐만요, 지병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리고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게 무슨…”
재희가 손을 들어 고 여사의 말 사이로 끼어들자, 그녀는 가만히 재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재희를 책망하는 느낌이었다.
“…서 선생님은, 무당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