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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33화 (133/166)

133화

“너, 이제 무얼 할 거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진희는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다시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난 열다섯의 소년은 또래 애들보다 큰 키와 짐짓 어른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답지 않게 진지하게 물어오는 말투가 자못 웃기기까지 해서, 진희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애미 애비도 없는 년이 공부 같은 걸 해서 무얼 한다니? 집에서 집안일이나 돕고 바느질이나 해서 나중에 돈 있는 집에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다.”

“왜 그런 말을 하냐?”

“내가 뭘?”

“임진희, 너 공부하는 거 좋아하지 않니?”

진희는 물끄러미 명훈을 응시했다. 언제나 웃는 낯으로 농담 섞인 말을 던지고 시답잖게 굴던 평소의 그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동갑인 주제에 어른스럽게 구는 게 짜증 났다.

“계집애가 그래 봤자.”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명훈에게 싸늘하게 쏘아붙인 진희는 그대로 뒤돌아 뛰듯이 걸어가 버렸다. 굳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그게 이상한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명확한 이유기도 했을 것이다. 왜 그동안 애꿎은 명훈에게 괜히 짜증을 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희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명훈은 진희와 똑같이 귀신을 보면서도 아무런 추문에도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건 명훈이 성격이 좋고 밝은 데다 동네에서 조선시대부터 유서 깊은 종갓집으로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어서 그런 것도 아닐 테다. 공부를 잘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진희의 집도, 정확히 말하면 고모 내외도 동네에서 꽤 잘 사는 집안에 속했다. 엄한 성격의 고모 내외는 그 동네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토종이었고, 자식들을 기르면서도 업둥이인 진희를 거둬 키우고 가르칠 정도로 여유 있고 상식 있는 집안이었다. 게다가 공부라면 진희가 명훈보다 더 나았다.

왜 명훈에게 쉬운 게 나한테는 그렇게 어려웠는지.

진희는 그 뒤로 어른이 되고 나서도 가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어도, 나이가 들고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일궈내어 정상에 섰을 때에도 진희는 이따금씩 어릴 때 오솔길 끝에서 불쑥 나타난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둔 후 고모부는 크게 분노했고, 진희의 자퇴와 더불어 점점 심해지는 소문에 못 이겨 동네 부끄럽다며 결국 이사를 가버렸다. 진희도 따라 동네를 뜰 수밖에 없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직장에 들어간 진희는 자신이 자랐던 그 작은 동네를 잊어버렸다.

***

“…서 선생님은 후에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유산으로 학교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길어진 전후의 여파로 부모를 잃은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였죠. 뜻이 맞는 문학가와 활동가들, 외국에서 온 선교사까지 모아 선생님은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셨고, 나중에는 여성을 위한 복지 재단의 이사로 일임하기도 하셨습니다.”

고 여사는 길어진 얘기를 마무리하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긴 이야기를 늘어놓아서인지 그녀는 한층 피곤해진 기색이었다. 재희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고 여사는 커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분이 정말 대단하신 건, 평생 젊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힘쓰신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서명훈 선생님은 교육자인 동시에 무당이기도 하셨습니다. 서 선생님이 마흔 후에 아예 바깥 생활을 정리하시고 지리산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생활하신 것도 그 이유입니다.”

“남자 무당이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서 선생님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셨고,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교육자로 사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신을 받으신 겁니다.”

재희는 서명훈이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김 실장이 입수해온 정보에 있던 그의 사진 중 가장 최근 것은 이미 흰머리가 희끗하게 생기기 시작한 시기의 모습이었다. 나이는 제대로 가늠되지 않았지만 중년의 나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에 대해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나에게 남겼다던, 나와 할머니에 관한 정보였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 관련된 이야기. 그는 분명히 편지로 재희에게, 그동안 재희가 알고 싶어 했던 대답이 될 정보를 남겨두겠다고 했다. 이제는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재희는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며 웃는 얼굴로 고 여사를 건너다보았다.

“고 여사님, 고인들께서 생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어떤 업적을 이루셨는지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별로 알고 싶은 부분도 아니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제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래 보여도 제가 아주 바쁜 사람이거든요. 서 선생님이 당신에게 나를 위해 맡겨두셨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고 여사는 담담한 눈으로 재희의 눈을 마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중년의 여성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자신의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의자 뒤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그녀가 가방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재희는 알지 못했던 터라, 그녀의 작은 손이 갈색의 가죽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자 재희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건…”

“아마… 제가 알기로, 이것이 서 선생님과 당신의 할머니인 진희 씨가 당신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이 될 것입니다.”

고 여사가 건넨 것은 바로 낡은 책 한 권이었다.

“이게… 뭡니까?”

재희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고 여사가 건넨 낡은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은 아주 오래 전에나 사용된 책들 특유의 눅진하고 살짝 쿰쿰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겉장은 낡디 낡아 손으로 만지기에도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겉으로 슬쩍 보기에도 종이는 가장자리까지 누렇게 색이 바래있었고, 종이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손으로 쥔 자국 그대로 종이가 눌려 자국이 날 정도였다.

“…서 선생님과 진희 씨가 손자 분에게 남기신 유품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남기신 유품은 저희 집안에 전부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서에 적힌 대로 그 명의는 모두 저로 되어있었고요. 제가 할머니의 유일한 후계자였다는 것 정도는 들으셨겠지요.”

“…그건 진희 씨도 모르셨던 물건일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잊어버린 물건이라고 해야 맞겠군요.”

고 여사는 이제 말을 길게 하는 것이 힘에 부친 듯 다시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재희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먼지까지 살짝 앉은 책을 쥐고 첫 장을 넘겨보았다. 책은 끈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마치 촛농을 떨어트려 굳힌 밀랍 같은 것이 그 책장을 단단하게 잠가두고 있었다. 책의 낡아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그 봉인은 매우 최근의 것인 듯했다. 무슨 편지도 아니고, 그저 책에 이렇게 봉을 해두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재희는 고 여사를 한번 건너다보았다가 책에 봉해진 밀랍을 뜯어냈다. 의외로 밀랍은 쉽게 뜯어졌다. 끈으로 묶인 매듭마저 풀어내자 낡은 낱장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이건…”

재희는 첫 장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글은 대부분 한자로 되어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 보였지만, 재희는 이상하게 이 글을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봤었지, 이걸? 분명 어디선가…한 장 두 장 종이를 넘기며 글을 찬찬히 읽는 재희를 보며, 고 여사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 잔을 두 손에 꽉 쥐었다. 그녀조차도 열어보지 못한 책의 봉을, 재희는 아무렇지 않게 뜯어 펼쳐보고 있었다. 역시 그녀의 손자라 이건가. 서 선생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남자에게 이 책을 남겨주신 걸까. 고 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이미 끝난 일이다. 이제 저것은 내 손을 벗어났으니까. 저것을 가방 안에 넣고 그를 만나러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뇌와 고통을 겪어야만 했었는지.

서 선생님은 저 책에 밀랍을 입혀 책을 봉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새벽, 잠에 빠지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생전에 자신이 못다한 일을 비로소 끝낸 사람같이, 그는 그렇게 고요한 얼굴로 잠들었다. 아직도 그가 무엇을 위해 지난 30년 동안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인의 마지막 부탁을 위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럼 이만.”

고 여사는 짧게 목례를 건넨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재희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마치 도망치기라도 하듯 재빨리 카페를 벗어나 멀어지는 그녀를 카페 건물 뒤에서 지켜보던 수행원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애들 붙여놔. 한국 뜨는지도 감시하고. 신변에 별다른 위협 없게 잘 관리해. 아마 곧 냄새를 맡고 피라미들이 몰릴 테니까.”

재희는 읽던 책을 덮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말했다. 그의 지시에 수행원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뒤, 귀에 손을 갖다 대고 무선 이어셋을 통해 짧게 지시를 전달했다. 수행원의 안내를 따라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받은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재희가 카페를 가로질러 나가자, 넓은 카페의 좌석 곳곳에 앉아 있던 사람 중 몇몇이 동시에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

모두 재희의 지시에 따라 1시간도 더 전부터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재희의 부하들이었다.

굳이 이만큼 인원을 대동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위협은커녕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는 여자였잖아. 재희는 속으로 혀를 차며 평범한 일반인으로 위장한 채 따라 나오는 부하직원들에게 손짓해 모두 해산하도록 시켰다. 그 여자의 이야기에서 별 소득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책을 발견한 건 꽤 예상 밖의 수확인가. 그건 집에 돌아가서 차차 살펴보고 난 뒤에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재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하느라 피곤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수행원이 열어준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까지는 1시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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