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34화 (134/166)

134화

“……”

“뭐해? 저녁 먹으라니까.”

“으악, 아, 앗,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라?”

해강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책장에 등을 기대고 엉거주춤 몸을 구부렸다. 그 기세에 책장에 느슨하게 꽂혀있던 책들 중 몇 권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책 한두 권이 해강의 등을 치고 떨어져 해강은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고개를 들자 재희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밥 아직도 안 먹었다며. 이따 테일러 코치랑 시티 레이크 돌기로 했잖아. 얼른 내려와서 밥 먹어. 나오기 전에 떨어진 책들도 도로 꽂아두고.”

“어… 응.”

해강은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한데 모아 주웠다. 산만한 덩치를 웅크린 채 책 정리를 하는 해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희는 잡았던 서재의 문고리를 놓고 몸을 돌려 다시 거실로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멀어지는 그의 가볍고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해강은 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거실 너머 방으로 들어간 것인지 재희의 슬리퍼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해강은 슬쩍 고개를 들어 문 너머를 훔쳐보았다. 한 뼘 정도 문이 열려 있었을 뿐,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강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며 품 안에 감췄던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게 대체 뭘까?”

아직 해강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 미국.

조금 전 해강은 오후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 이후로 내내 수영 강습을 들어서인지 몇 시간 동안 물속에 있던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해강은 어려서부터 대부분의 운동을 즐겨 했지만 그중 구기 운동과 수영을 특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 수업이 있는 날이면 전날 밤에 미리 수영 짐을 싸 놓고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 덕에 물에서 헤엄치고 움직이는 것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으나, 최근 들어 재희가 소개시켜준 수영 강습 코치는 전직 수영 선수로 매우 혹독한 훈련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단순 운동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어차피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생각보다 할 게 없었다. 어려서부터 운동도 좋아하니까 이참에 나를 운동선수로 만들려고 하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어찌 됐건 해강은 학교 밖에서 언제나 심심했다.

그래서 오늘도 수영장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집에서 뭔가 할 게 없나 심심해하던 차였다. 좋아, 나도 오랜만에 독서를 해볼까. 집에 서재도 있겠다, 몸도 좋고 두뇌도 좋은 최강의 사나이가 되는 거지. 해강은 스스로도 픽, 하고 웃을 만큼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섰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못 읽겠네.”

서재는 대부분 재희의 책으로 가득했다. 나머지는 재희가 어디선가 가져왔다가 갈 곳이 없어져 서재 한구석에 따로 정리해둔 서적이나 큰 서류뭉치들도 있었다. 그러나 재희가 가진 책들은 전부 해강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하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름도 읽기 어려운 외국 학자들의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발간된 심리학, 정치학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영어가 아닌 중국어나 라틴어로 추정되는 외국어로 쓰인 서적들도 많았다. 첫 장을 넘겨서 봤다가 깨알 같은 글씨와 벌써부터 눈이 무거워지는 전문용어들의 나열에 해강은 다시 책들을 덮어 도로 꽂아버렸다. 형은 뭐 이런 걸 읽는담. 소설이나 뭐 그런 건 없나?

해강은 책등을 눈으로 훑으며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다가, 익숙하게 눈에 들어오는 글씨를 발견했다.

“어, 한국어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뽑아 책장을 넘기던 해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단순히 책이라기보다 뭔가를 적어 둔 명부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이름의 대부분은 한자로 쓰여 있어 해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글로 쓰인 부분들을 읽어 짐작해 보자니 한자로 쓰인 것은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모두 같은 성과 본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해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장을 팔락팔락 소리가 나도록 넘겨보았다.

전부 같은 성과 같은 본을 가진 이름들이 주가 되어 다음 이름들이 그 밑에 줄을 잇고 있었다. 특이한 책이네. 여기 적힌 건 사람들 이름인 것 같은데… 한국인인가? 그럼 이게 성씨인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글자인데. 이건 분명… 그러니까……

내가 이 글자를 어디서 봤었지?

해강은 미간을 찌푸려가며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이 글자는, 분명, 한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해강의 기억이 맞다면, 그 글자는 분명 임(棽)이라는 글자였다. 한자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해강이 그렇게 어려운 한자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재희의 성씨였기 때문이다.

***

아주 머나먼 옛날 조선의 깊은 산속 어딘가.

때는 흰 서릿발이 쌀알같이 흩날리고 사방천지가 희어 좌우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궂은 날이었다. 인간의 발걸음은 물론, 산짐승들도 땅이 고르지 못해 잘 다니지 않는 산 중턱의 한 길목. 전날 밤부터 소복소복 쌓인 눈밭 이불 위로 두 개의 작은 발자국이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퉁퉁 얼어붙은 발이 규칙적으로 찍어내는 발자국의 방향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나, 간밤 새 눈이 죄 덮어버려 어디서 왔는지조차 이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발자국의 주인은 척 보기에도 이 한겨울에는 모자랄 법한 외피를 꽁꽁 둘러 입고 어깨를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고 있다. 아니, 걷는다는 것보다 훨씬 힘겨운 고행 길을 지나는 성인처럼 천천히,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아주 조금씩 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여러분이 언젠가 들어보았던 이름일 것이요, 이제는 그것도 그녀에게 별 필요가 없어진 일이 되었다.

“…조…금만, 더…헉…”

주위는 물론 이렇게 눈이 덮인 한겨울의 산속에, 인간이라고는 그녀 자신 말고는 없을 것이지만, 마치 스스로에게 재촉하는 것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다. 그저 다른 말은 없이,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이제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본다면 이 엄동설한에 홀로 산을 헤매는 이가 있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그 방랑자가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비단 옷과 값비싼 태가 흐르는 장신구가 달린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추위에 대비해 더욱더 두텁게 껴입지 못한 까닭은 그녀가 원래부터 입고 있던 옷들에 있었다. 항상 구겨지지 않고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며 풀을 빳빳하게 먹인 속곳과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비단옷, 떠나기 전 그나마 간단한 모자와 장옷을 걸치려 했으나 그마저도 장식과 옥이 수놓아져 오히려 얼굴이나 피부를 긁어대는 외피, 그리고 부드럽고 사뿐사뿐하기만 할 뿐 신발로서의 기능은 하나도 없는 꽃신 따위의 것들이 그녀의 발을 더욱더 무겁게 하고 있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던 비녀와 장식들도 이미 내던져버린 지 오래다. 삼단 같은 머리를 처녀 때처럼 대충 땋아 질끈 동여 맨 그녀의 작은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내내 걷기만 했으니 점점 눈앞이 흐리고 중심을 잃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안에는 이 산을 넘어야 했다. 한 번 더 해가 진다면, 지난밤처럼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깊은 산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그녀에게 죽기보다도 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신도 점점 온전치 않아지는데, 눈앞에는 온통 흰 눈밭뿐인데 더 이상 걷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듯하다. 여인은 꽁꽁 얼어붙은 손발과는 반대로 왜 얼굴은 터질 듯이 열이 오르는 걸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차 생각을 고치길,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게 아니라 머릿속이 뜨거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에 반해 그녀의 손발과 뺨에 닿는 칼 바람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제는 내가 정말 미친 게로구나. 이 한겨울에 부는 바람 앞에서, 몸이 뜨겁다고 느끼다니.

결국 여인은 중심을 잃고 풀썩 쓰러진다.

이상해. 온통 사방이 눈 천지인데도 왜 차갑지 않은 걸까.

왜 내 머릿속은 이다지도 열이 나는 걸까. 열이 나는 것처럼 혼망하고 눈앞이 흐려질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계속 가야만 한다. 이것을… 나는… 이것을 꼭…

작은 몸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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