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35화 (135/166)

135화

“…헉!!!”

“아아악! 아이씨, 깜짝이야!!”

“…뉘, 뉘시오!? 이 손 치우시오!! 저리 썩 꺼지지 못해!!!”

“아이고, 것 참, 새댁이 목청 한 번 좋구만. 얘야, 선능탕은 안 먹여도 되겠구나. 저렇게 팔팔하니 말이다.”

“…안 그래도 이 여자 때문에 깜짝 놀라서 다 엎었는데요, 스승님.”

“…그래, 잘했다, 이놈아.”

혀를 끌끌 찬 노인은 가볍게 소년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후 자리를 물리게 했다. 노인, 아니, 노인이라고 해야 맞는 걸까? 여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내가 결국 그 눈밭에서 죽어 저승에 온 게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곳이 저승이라면 필시 나는 성공했을 것이고, 저승이 아니라 이승이어도 어쨌거나 그놈들에게 잡히지 않았으니 잠시나마 다행이라고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는 동안, 노인으로 보이는 이가 그녀의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물끄러미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저…기… 당신은… 누구시오?”

“나 말인가?”

노인은 얼핏 보기에 평범한 노파처럼 보였으나, 여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평범한 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에 다르게 보인다기보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명백히 평범한 자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여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어깨를 웅크렸다. 겁을 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저… 그래, 이 산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사는 늙은이라고 해두지.”

“…당신은 인간이 아니지요?”

“…역시, 필시 새댁에게는 비상한 능력이 있는 거였구만. 자네 눈은 속일 생각을 말아야겠군.”

노인은 소맷부리로 입가를 가리며 홀홀 웃었다. 체구도 작은 노파는 마냥 인자한 얼굴로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여인은 자신의 반밖에 되지 않는 그 노파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몸은 따뜻하게 데워져 포근한 털 이불로 감싸져 있었다. 곁눈질로 살핀 주변은 다소 정신 사납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진 듯 벽과 구석들이 빼곡하게 서책과 물건들로 차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씁쓸하면서도 달큼한 냄새가 나고, 훈훈한 증기가 은은하게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이곳은 오래된 약방인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배를 갈라 오장육부를 들어낼 곳은 아닌 모양이지. 여인은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굳은 어깨를 풀고 허리를 폈다.

“…보아하니 나를 살려준 것 같군. 고맙소. 내 당장 가진 것은 없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감사 인사를 하려거든 저기 저 구석에 있는 내 멍청한 제자 녀석에게 하시오. 저 녀석이 저래 보여도 쌓은 도력에 비해 코가 아주 신통하다우. 그래서 눈밭에 파묻힌 새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게지. 이 늙은이는 그저 새댁 몸을 데워주고 보약이나 조금 먹였을 뿐이네.”

“아… 그렇, 습니까. 감사…합니다.”

여인은 자연스러운 하대와 낮춤말이 몸에 밴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지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기보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 인자한 노파는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몸을 낮추고 존경을 갖춰 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했다. 마치 부처를 실제로 만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여인은 노인이 건네는 찻잔을 양손으로 받아 쥐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내 책…!”

“책?”

“내, 내가 갖고 있던… 그러니까, 나를 데려올 때,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게 있지 않았습니까? 분명…”

“책이라, 글쎄. 얘야, 이 새댁을 업고 올 때 짐이나 다른 물건은 없었느냐?”

“…이거 말입니까?”

문가에 앉아 등을 돌린 채 그릇에 담긴 뭔가를 자그마한 절굿공이로 콩콩 찧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전체적으로 나른한 기색이 가득한 인상이었다. 아니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 그가 자신의 품속에서 낯익은 책을 꺼내 들자, 여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차,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다가온 소년이 서책을 내밀자 여인은 그것을 낚아채듯 답삭 받아 들고 다시 꼭 끌어안았다.

“나 참, 누가 보면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예끼, 이놈아.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귀하게 대해야 할 분이다.”

“괜찮습니다. 저…저기, 이름이 무엇입니까?”

소년의 나른하게 반쯤 감겨있던 눈이 순간 반짝 뜨이더니, 눈알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돌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선호. 여선호.”

“…선호…내 은인의 이름은 꼭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나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아니, 뭐, 은혜랄 것까지는 없고…”

선호의 귀밑 뺨이 옅게 물드는 것을 본 노파는 남몰래 웃음을 참았다. 산속에서만 자란 놈이라 그런지 양갓집 규수는 처음 보았을 것이요, 게다가 여인은 많이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기는 했으나, 한눈에 봐도 귀태 어린 단정한 미모를 가진 미인이었다.

“…제 이름은 영신. 문씨 성을 씁니다.”

바로 그 순간이, 문씨 부인과 여 사장의 첫 만남이었다.

***

영신은 나흘 동안 그 오두막에 머물렀다.

자신을 구한 선호라는 남자아이는 인간이 아니었고, 그의 스승이자 영신의 기운을 되살아나게 도와주며 따스하게 돌봐준 기이한 노파의 이름은 만신이라고 했다. 만신이라니, 영신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노파는 주름진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히 말하면 나는 이름이 없다네. 그러나 자네들이 나를 두고 자주 부르는 이름을 하나 알려주자면 만신이라고들 부르더군.”

“그럼… 정말 당신이 저 밑 고을에서 수십 해 전에 죽은 이를 되살리고, 전염병을 낫게 하셨다던 그 만신님이십니까?”

“언젠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생떼같이 어린 것들의 목숨을 몇 번 살려준 일은 있지. 눈이 그렇게 오는 날 자신의 친자식을 내다 버리는 놈들을 벌주고 갓난쟁이들을 살려 좋은 비구니들이 있는 절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 슬퍼하는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고, 딱하게도 열심히 일하다가 다른 마을에서 병을 얻어온 나무꾼 가족이 마을에서 핍박을 받기에 도와주어 낫게 해주기도 했고. 그래, 그 마을은 아직도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과 다른 병자들을 따돌리며 배부른 이들의 배만 더욱더 불리는 마을인가? 아니면 좀 달라진 게 있나?”

노파는 흐린 눈으로,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영신은 부끄러움에 뺨을 살짝 붉히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영신이 사는 마을은 예로부터 큰 규모와 유서 깊은 양반집 가문들이 모여 살아 집성 촌을 이루어 사는 곳이었다. 농사와 상업이 동시에 번영하고 가축들을 배불리 먹이며 인구도 많은, 다른 지역에서도 한양에 들리기 위해 꼭 거쳐 가는 고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르하면 무얼 하는가. 대대로 벼슬과 품을 받아 관리 노릇을 하는 치들은 욕심에 절어 탐관오리나 다름없고, 고을의 명예에 해가 되는 일이 일어날라 치면 다들 발 벗고 나서서 쉬쉬하며 묻어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픈 자나 가난한 자, 불의의 사고로 형편이 어려워진 자들은 영신의 고을에서 없는 이들 취급을 받았다. 부모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어린아이들도 많았으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도 하였다. 길바닥에서 구걸을 하다가 억지 죄목을 쓰고 잡혀가는 이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신의 집안은 영신이 어려서부터 고을의 유지 중 한 명이었던 영신의 조부 덕에 부족함 없이 살아온 집안이었다. 게다가 영신이 태어난 후 영신의 아버지가 벼슬자리에 들고 후에 판서 직을 맡게 되면서 영신은 한양에서 지내게 되었다. 양가 조부가 모두 이 마을에 거처하고 계시니 사실상 이곳은 영신에게 고향이었고, 앞으로는 시댁이 될 곳이기도 했다. 만약 영신이, 집안에서 짝지어주신 그 사내와 혼인을 올리게 된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를 새댁이라고 부르시던데, 혹 이유가 있으십니까? 저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이미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서방 될 사람은… 어디 보자, 그래. 분수치고는 성정이 괜찮은 사내로구만. 담이 작아 흠이긴 하지만, 부잣집에서 난초처럼 어화둥둥 자란 사내가 손에 먹만 묻힐 줄 알지, 뭐 다른 걸 바라겠는가.”

“…어찌 아신 겝니까?”

“홀홀, 이 늙은이가 그런 것도 모르면 만신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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