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36화 (136/166)

136화

만신은 해가 뜨면 나가 숲에서 약초를 채집해오고, 낮이 되면 양지바른 곳을 찾아 제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약초와 열매를 말려두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말려둔 약초들을 거둬와 어딘가에 분류해 넣거나 아니면 바로 커다란 솥에 넣고 끓이기도 했다. 선호라는 소년은 대부분 밖에 나가있었다. 대중없이 들락날락거리곤 했으나, 보통 밤에 한 번씩 들어와 만신의 심부름을 하거나 때로는 잔소리를 듣고 툴툴대기도 했다. 영신은 빠르게 몸을 회복했고 금방 기운을 차렸다. 그 말은 즉 그 오두막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두막에서 머무른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영신은 다시 채비를 하고 오두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선호는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만신은 오히려 그녀의 등을 떠밀며 갈 길이 바쁜 사람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소년을 타일렀다.

“만신님, 만신님은 어째서 제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가는지, 왜 혼자 이 한겨울에 산을 헤매는지, 저에 대한 것은 궁금해하지 않으십니까? 생각해 보면 지난 일주일 동안 저를 돌봐주시면서 한 번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영신 자네가 갖고 태어난 운명을 나도 잘 아는데, 구태여 물어보고 참견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네가 처음 왔을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네. 정해진 도리에 따라 내가 자네를 도와주거나 그 길을 같이 가줄 순 없겠지만… 그저 자네가 여기서 이렇게 명이 다할 운명이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하게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도 말게. 어차피 다음에 자네가 나를 찾을 때 나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아마 그럴지도… 그저 자네가 너무 안쓰럽다는 말만 해주고 싶네. 저기 저 선호 녀석도 사실 갓 태어나자마자 제 부모 되는 여우들의 무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 버려진 녀석이네. 내가 거둬 먹이고 재능이 있어 이것저것 가르치다 보니 도술도 배우고 이렇게 살고 있지만…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던 게지. 나는 한낱 동정심 때문에 죽어야 할 목숨을 살려놔 그 벌로 이 늙고 약한 몸으로 이승에서 떠돌며 지내고 있는 게야. 영신이 자네도 저 새끼 여우처럼 이곳에서 죽게 둘 수 없었던 것뿐이네.”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저 멀리 떨어져 언덕을 넘어가기 시작하는 선호의 등이 점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뜬 지 얼마 안 된 해가 소년의 붉은 기가 도는 머리털 위로 동그랗게 떠오르고 있었다.

“…자네가 가진 그 힘과 운명은, 분명히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지. 그러나… 그게 정말 선물인지, 아니면 저주일지 아직도 나는 확언할 수가 없구나. 통탄할지고…”

“…만신님, 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게. 그리고 그 책, 분명한 것은, 이미 그걸 훔친 순간부터 영신 자네의 운명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야. 그걸 감내할 수 있을지는 온전히 자네의 몫이야.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나. 아직 그분들은 자네를 필요로 하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영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품 안에 꼭 안은 책이 파르르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이젠 정말 더 지체할 수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신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처음 이 산속 눈길을 밟으며 걸어왔던 것처럼, 영신은 다시 길을 떠났다.

***

“…뭐?”

“네가 한국에 온 진짜 이유. 얘가 권영서라는 애야. 잘 기억해둬.”

재희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왜 이 인간은 항상 중요한 얘기를 밥 먹다 말고 하는 건지. 해강은 입안 가득 씹던 빵과 베이컨을 꿀꺽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은 간만에 한국에 들어온 재희와 주말 아침을 함께 보내는 중이었다. 유진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듣고 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유진은 잔뜩 부은 눈으로 해강을 집 근처 공원으로 불러냈고,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해강을 얄밉다는 듯 노려보다가 끝끝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좋아하기는 했던 거냐고, 좋아서 사귀긴 한 거냐고 마지막으로 묻는 유진의 얼굴을 보고 해강은 끝까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나는. 결국 유진에게 한 대 맞아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해강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은걸. 적어도 누나처럼 좋은 사람한테는. 그 말에 유진은 다시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다. 해강의 잘 들어가라는 인사도 무시하고 먼저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유진의 눈가가 젖어있었던 것은 여전히 해강의 마음 한구석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출국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금방 돌아온 재희가 아침부터 드물게 웃는 얼굴로 해강을 대하는 것도, 해강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묵묵히 밥이나 먹던 중, 재희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 게이 아닌데.”

“누가 물어봤니?”

“그, 그렇지만… 얘는 남자애잖아. 그리고… 어라?”

“왜?”

해강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천천히 내려놓은 해강이 이리저리 사진을 뒤집어보기도 하고, 형광등 불빛에 비추며 높이 올려다보기도 하다가 재희를 흘금 쳐다보았다.

“…나, 얘 아는데.”

“뭐? 왜?”

“아니, 그, 어… 안다기보다는, 뭐라고 하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재희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해강을 쳐다보았다.

“네가 걔를 어디서 봐? 여기 사는 애도 아니야. xx시에 살고, 지금 다니는 학교는 A고등학교. 나이야 너랑 동갑이기는 한데…”

“어디서 봤더라, 진짜 익숙한데…”

해강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쓴 채 사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아예 먹던 것까지 손에서 놔버린 채 골똘한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를 살짝 한심하다는 듯 흘겨본 재희는 썰어낸 연어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가져갔다.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은 꽤 괜찮았지만 어제 밤새 비가 와서인지 아침부터 생선은 좀 비린 감이 있었다. 쯧, 재희는 혀를 차면서, 다음부터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아침은 그냥 한식으로 준비해달라고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재희가 한국에 없을 때는 주 3일만 들러서 해강이 먹을 반찬만 해두고 가달라고 했지만, 앞으로는 더 자주 와서 해강을 위해 식단을 제대로 짜서 식단을 챙기도록 부탁해야 할 모양이었다. 몇 달 사이에 해강은 정말 말 그대로 쑥쑥 자라고 있었다. 마치 콩나물에 물을 주고 뚜껑을 덮어놓거나 비가 내린 후의 죽순처럼, 해강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열일곱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이었다. 슬슬 때가 되었으려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는 재희의 맞은편에서 해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기억났어!”

“…아직도 그 소리야? 그러니까 걔는…”

“나, 얘 꿈에서 봤어, 형!”

“…뭐?”

마침내 시원하게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해강은 밝은 얼굴로 외쳤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꿈에서 본 얼굴이랑 똑같아! 신기하다는 듯 사진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해강의 모습에 재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꿈에서… 봤다고?”

“응.”

“너 꿈 안 꾸잖아.”

“…어라,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그래도 어렸을 땐 꽤 꾸고 그랬었는데, 언젠가부터 꿈을 잘 안 꾼 것 같아. 꿔도 자고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언제 봤는데?”

“어?”

“언제 봤냐고, 걔를.”

“그, 글쎄? 그건 잘…”

갑자기 가라앉은 재희가 딱딱한 목소리가 재차 묻자, 해강은 우물쭈물하다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한…한… 한 달 전이 처음인가?”

“처음?”

“응. 몇 번 본 것 같아. 그런데 그냥 꿈이니까 깨고 나면 나도 잊고 지내다가, 지금 사진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싶어서.”

재희는 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해진 식탁 분위기에 부엌 다용도실에서 새로 산 그릇들을 들고 나오던 가정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사장님, 식사 벌써 마치셨어요? 저녁은 집에서 드신대서 제가 새로…”

“제 저녁은 준비할 필요 없어요.”

가정부의 말을 중간에 자른 재희는 거실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차가워진 재희의 태도에 해강은 종잡을 수가 없어 멍한 얼굴로 그의 등만 바라볼 뿐이었다. 화가 난 건가? 아니, 아니야, 분명 저건 화가 난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강은 스르륵 다시 의자 위에 앉은 후, 손에 쥐고 있던 사진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형은 대체 뭘 무서워하는 걸까.

분명 그건, 뭔가를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