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37화 (137/166)

137화

없어. 아무 데도 없어.

재희는 다시 처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서재의 첫 번째 책장부터 마지막 책장까지, 낡은 서랍 속과 종이 쓰레기 더미까지 전부 뒤져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그 책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 집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처럼, 책은 아무 데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책은 처음부터 여기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재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책에 대해 모르는데, 내가 알 수 있는 곳에, 나만이 꺼낼 수 있게 봉해뒀는데, 어째서? 왜? 왜? 왜?

…어딜 간 거야?

“…설마.”

재희는 어느새 자신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좋은 날도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지만. 침착하자. 일단 심호흡을 하고… 창백한 얼굴의 재희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기억해내. 마지막으로 그 책을 어디다 뒀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야 해. 반드시. 왜냐면… 그 책은 나의…

“….”

재희는 자꾸만 떠오르는 해강의 얼굴을 무시하려 애썼다. 지금은 네가 끼어들 틈이 없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걸…

“…주해강.”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재희는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생각을 바꿔 모든 것을 되짚어 보았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그 애가 그걸 발견했다면? 물론 재희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하지만 만약, 정말로 해강이 그 책을 발견했다면?

아니, ‘그 책’이 ‘해강’을 발견한 거라면?

…하지만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는데…

…어째서.

재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제 그만 인정해야 했다.

그 권영서라는 애를 발견했을 때부터.

아니, 정확히 그 권영서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부터, 모든 건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재희에게도 그건 아주 치명적인 변화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재희는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최근 들어 재희는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렸고, 잠을 거의 자지 않았으며, 평소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어제 바로 집으로 돌아온 참. 호텔에서도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한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야 했던 지라, 눈은 물론 머리통까지 온통 욱신거렸다. 재희는 익숙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고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재희는 언젠가부터 꿈을 꾸지 않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

“어라? 이게 왜 여기에…”

남은 식사를 홀로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 재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강은 대충 상을 물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오랜만에 재희와 함께 외출을 하거나 하는 등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지만, 그가 그렇게 집을 박차고 나가버리자 해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형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원망스럽다면 원망스러울 뿐. 해강은 묵묵히 혼자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다음 주에 쪽지시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미리 과제도 할 겸 공부나 하고 있을까, 나중에 형 기분이 괜찮아지면 연락해야지. 해강이 다시 책상으로 와 앉은 후, 새 노트를 꺼내기 위해 맨 밑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이상하네… 내가 이걸… 미국에서 가져왔던가…?”

책상 서랍 안에는 뜻밖의 물건이 들어있었다. 해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낡은 책을 꺼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미국 본가에 있던 서재에서 봤던 그 책이 맞았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분명 한국에 들어올 때, 미국 집에서 책 같은 건 챙겨온 기억이 없었다. 사실상 처음 해보는 이사인지라, 해강은 갖고 있던 짐들을 정리해서 챙기는데 거의 일주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만큼 두고 가야 하는 물건과 가져가야 하는 물건을 구분하는 걸 어려워하기도 했고, 그 어떤 것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짐들을 챙기면서도 해강은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은 하나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형이 넣어둔 건가? 하지만 형은 내 방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데. 그리고 다른 책도 많은데. 그런 것도 아니고 이걸 대체 왜?

“…이상하네.”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거기까지였다. 해강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해강은 아주 나중에서야, 그 책이 거기에 들어있던 이유가 영서와 자신의 관계와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나중의 이야기.

똑똑-

“들어와.”

재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김 실장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희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알아봤어?”

“예. 시키신 대로 그 남자를 만나봤습니다.”

“뭐래?”

“…본인이 선대 회장님의 친동생이라고 주장하더군요.”

“…그래서?”

“처리했습니다.”

재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가 뭔가를 생각하거나 눈을 감고 있을 때는 말을 걸지 않는 것이 그들 사이의 법칙이었으므로, 김 실장은 얌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알기로 할머니는 외동딸이었다고 했는데 말이지.”

“선대 회장님의 돌아가신 부모님 사이에 다른 자식이 있었을 거라는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저 그분께서 더 이상 알기를 원치 않으셔서 저희도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을 뿐입니다.”

“그 정도 노인네니까 당연히 지금쯤이면 뒈졌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있었다는 건가.”

“저희도 그 남자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만나보니 확실히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고, 치매가 있어 정신 상태도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김 실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재희가 재촉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괴자 김 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대 회장님의 생전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바로 알아봤습니다. 치매가 심해 자식 내외도 이미 양로원에 맡겨버리고 손을 뗀 상태라고 했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선대 회장님의 이름을 말하더군요.”

“……”

“…선대 회장님의 부모님 성함과 출신지, 살던 동네, 그 밖의 신상 명세를 아직도 기억하는 것을 보아하니… 혈육이 확실한 듯했습니다. 그래서…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목격자는? 양로원이라며.”

“오래된 곳이라 CCTV도 입구를 제외하고 병실에는 없었고, 입구 쪽 CCTV도 미리 고장 내 두었습니다. 면회 신청 때 이름과 신상 정보도 모두 말씀해 주신 대로 가명으로 했습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네.”

재희는 혀를 차며 비웃었다. 허술하다는 말은 조악한 양로원의 시설이 아니라, 바로 그 정도의 야트막한 수고만으로도 일을 처리하고 왔다는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라는 것을 알아챈 김 실장은 얼굴을 붉혔다. 실제로도 자신의 예상보다 더 식은 죽 먹기인 임무였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조차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목격자가 있었으면 어쩔 건데? 아무리 노인 하나 처리하는 일이라지만 너무 방심한 거 아냐, 김 실장? 만약 누가 당신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으면?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문객이 친척이랍시고 다녀간 후 노인이 죽어있는 것 정도는 바로 발각될 텐데. 너무 수상하지 않아? 나였으면 그 남자의 인상착의부터 경찰에 얘기했을 텐데. 안 그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목격자는 없었습니다. 입구 데스크에 있는 직원 정도만 만났을 뿐… 정해진 시간 외에 간병인이나 간호사는 돌아다니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흥, 이러나저러나 끝까지 한심하고 불쌍한 죽음들뿐이로군.”

재희가 평소보다 날 서있다는 것을 눈치챈 김 실장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순간들이 몇몇 있었는데, 지금도 그중 하나였다.

“…해강 도련님은 잘 지내십니까?”

해강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재희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지는 것을 본 김 실장은 아차, 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재희는 해강의 이야기를 꺼내면 오히려 표정이 풀리곤 했었다. 김 실장은 그래서 해강의 안부를 물을 겸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타이밍이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재희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김 실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김 실장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애한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죄송합니다.”

“나가봐.”

김 실장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재희는 여전히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책상 위에 있던 명패를 집어던졌다. 문에 맞은 명패가 흠집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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