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그래서, 형인 놈만 혼자 그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는 소리야?”
“그렇다니께. 내가 봤을 때는 동생 쪽이 더 개화할 가능성이 있으. 나는 그 녀석한테 검세.”
“웃기는 소리, 내 자네 허풍을 한두 번 들은 줄 아나?”
“에잉, 싫으면 말어! 아야, 거기 뭣하냐! 퍼뜩 새 소반 가져오덜 않고.”
“거 참, 하여튼 선풍 도사 자네, 이번에도 또 속임수 쓸 생각하덜 말어, 알겠는가!”
노인의 벼락같은 노성에, 옆 샘물에서 물을 마시던 천록天鹿 한 쌍이 화들짝 놀라 겅중겅중 뛰어가 버린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다른 노인이 혀를 차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네, 가요, 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소년이 물에 젖은 손을 털고는 옆에 있는 작은 바위에 걸쳐두었던 소반을 들고 노인들에게 다가왔다. 빈 접시와 잔이 올라간 작은 소반을 양손으로 들고 총총 걸어온 소년이 그들 사이에 끙차, 소리를 내며 소반을 내려두었다. 분명 상 위에는 빈 그릇들뿐인데도, 마치 소년은 그릇과 잔이 가득 차 혹여 넘어트릴까 조심하고 있었다. 소년이 상을 내려놓자마자 긴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빈 잔을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렸다.
“술만 채울 게 아니라 안줏거리도 좀 드셔야지요.”
소년이 공손히 말하자 반대편에 앉아있던 노인이 보란 듯이 빈 그릇 위를 한번 쓰다듬었다.
노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옥색의 빈 그릇은 어느새 알록달록한 과자와 약과, 과일들로 가득 찼다. 비어있던 술잔과 호리병 역시 육중하게 찰랑이는 소리를 내며 노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렇게 좋은 바람이 부는데 마시는 술잔을 세는 것이야말로 제일 바보 같은 짓이지. 아무렴. 자, 한 잔 먼저 받으시게.”
“천도 향기가 오늘따라 아주 달달~하구만. 아야, 가서 몇 개만 따오그라. 가는 김에 겸사겸사 그 도령 놈인가 뭔가 하는 놈도 뭣하고 있는지 보고.”
“예.”
소년은 몸을 돌려 총총거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노인들은 다시금 대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종종 땋아 내린 꽁지머리와 은은한 색감의 얇은 비단옷이 소년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열두어 살쯤 됐을까, 씩씩하고 정중한 태도를 지녔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된다.
“어…어?”
소년이 다다른 곳은, 노인들이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던 언덕 밑에 위치한 넓은 과원이었다. 과원이라기보다 오히려 산과 들 곳곳에 핀 꽃과 과일나무들이 즐비한 평야와 같은 곳이었지만, 그렇게 넓은 곳이라도 소년에게는 손바닥 안을 훤히 들여다보듯 아담한 밭 정도라고 생각하곤 했다. 게다가 이곳은 평범한 산과 밭이 아니었다.
흐르는 시간이 멈추는 곳.
바삐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마저 쉬어가는 곳,
속세의 인간들은 이 안개에 싸인 높은 봉우리와, 그 밑에 펼쳐진 드넓은 복숭아 과원을 두고 ‘무릉도원’이라고 불렀다.
“…이런, 파렴치한 작자를 보았나!”
그러나 소년의 앳된 얼굴이 금세 사색이 된 까닭은, 다름 아닌 복숭아나무 밑에 드러누워 대자로 뻗은 채 잠에 든 남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소년이 열과 성을 다해 돌보고 재배하는 복숭아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명하고도 부드러운 분홍빛이 감도는, 씨알마저 굵어 가지가 휠 정도로 둥글고 싱싱함을 뽐내던 열매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무가 심긴 사방에 온통 향기롭고 싱그러운 향내가 진동할 정도로 가득했던 복숭아들이 전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있다니. 게다가 아마 그 상황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그 사내가 태평히 코를 골며 텅 빈 복숭아나무 밑에 누워 있는 것을 보자니, 소년은 길길이 날뛰며 뛰어가 남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으음…”
“이런 염치없는 작자를 보았나! 이 복숭아들이 대체 어떤 열매들 인지나 알고 이렇게 온통 서리를 해놓는단 말이오?!”
거의 울 듯한 소년의 외침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보시오, 강림 도령!! 어서 일어나시오!!”
“선재동자야, 이 무슨 소란이느냐.”
남자를 흔들어 깨우던 동자가 울상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인자한 얼굴의 한 중년 여성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밭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수수한 소복 차림에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얼굴은 은은한 광채마저 감돌고 있었다.
“보살님… 이를 어찌합니까. 이 작자가 제 복숭아들을 다 먹어치웠다고요! 이를 어찌합니까, 상제께서 제게 직접 맡기신 나무들을 죄다…”
“진정하고 눈물을 거두시게. 내 오랜만에 천상도에 들렀는데 선재가 우는 것을 볼 수는 없지않느냐? 그 사내는… 옳지, 자네가 바로 선풍 도사가 데려온 그 강림 도령이겠군.”
강림 도령, 이라고 불린 사내는 태평히 하품을 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았던 강림 도령의 모습과는 퍽 거리가 있는 몰골일 것이나, 도리어 그 장성한 사내의 모습이 강림의 진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님 오셨습니까.”
“후후후, 강림. 그간 격조하였네. 어찌 그런 몰골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인가? 마음고생이라도 많이 한 모양이지?”
보살이라고 불린 여성이 웃자 부드러운 미풍과 함께 새가 지저귀는 착각마저 들었다. 울상이 된 선재동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잠이 덜 깬 강림 도령 앞에 다가가 쭈그려 눈을 맞춘 그녀가 물었다.
“어때, 이제 좀 정신은 좀 차렸는가?”
“…덕분에 고생 깨나 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감사 인사는 아직 이르니까.”
여성은 상냥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깃을 우아한 손짓으로 털어 폈다.
“인간도 아닌 몸이, 단순히 허기를 위해 이 모든 천도들을 먹어 치우진 않았을 것이고, 무슨 꿍꿍이였을까, 그래?”
“보살님…”
“뚝 하렴, 선재동자여. 상제께서는 이해해 주실 테니까. 정말 안타깝게도, 마침 내가 아는 도사 한 명이 병을 얻어 그를 위한 약재를 모으기 위해 돕던 중에 천도 한 알이 필요한 걸 알았네. 그래서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것인데, 이를 어찌한다, 강림? 그 많던 천도들을 자네 혼자 다 해치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천도天桃란, 천상도, 그중에서도 흔히 무릉도원에서만 피는 도화가 맺는 열매라고 알려져 있는 과일. 속세에서 열리는 복숭아는 먼 옛날 옥황상제가 먹다 남은 천도 씨앗 하나가 인간도에 뿌리를 내려 퍼졌다는 속설이 있으며, 천상도에서 자라지 않은 복숭아는 천도와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즉 아무 복숭아가 귀한 천도가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천도 한 알이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기운을 북돋기도 하고, 불치병의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인간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니 전부 맞는 말은 아니었으나, 천상도에서 꽃을 피우고 그 꽃이 떨어진 나무에서 맺히는 천도라면 신묘한 힘을 가진 영약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열매가 맺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는데, 평범한 인간의 수명이 약 60살 전후라고 했을 때, 천도 한 알이 여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000년이라고도 한다. 게다가 가장 처음 천도가 생겨났을 때는 몇 그루 있지 않았고, 이를 귀히 여긴 천인들이 갖은 노력 끝에 천도나무를 길러 지금처럼 거대한 밭을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재동자라고 불린 이 소년은 수백 년 전, 막 열매를 맺기 시작한 이 천도 밭의 관리인 겸 늙은 천인들의 심부름꾼을 도맡았다. 애지중지하며 천록이나 기린들이 따먹을까, 혹시 천인공노할 누군가가 몰래 서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신의 목숨처럼 천도를 지키던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글썽거렸다. 그런 선재 동자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여인은 안쓰러운 웃음을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대답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도령?”
여인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사내를 추궁했고, 추레한 몰골과는 달리 꽤나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씩, 하고 민망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보아하니 자신이 한 짓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은 확실했다.
“…아니면, 아직도 염라에게 받은 벌이 충분치 않았던 걸까요?”
다정한 미소와는 반대로, 엄하고 싸늘해진 어조로 여인이 다시 되묻자, 강림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사이로 달큼한 천도 향기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했다.
“….그저, 배를 곯는 바람에 그랬습니다, 보살님.”
“그것참, 이상하네요.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이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천도를 먹어 치울 수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열매가 어떤 열매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럼요, 아무렴요.”
“…아무래도 당신의 근신 기간에 대해 상제께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여성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토라진 얼굴로 강림을 노려보는 선재동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그녀의 옷자락을 꼭 쥔 선재동자를 데리고 몸을 돌려 밭을 나섰다. 텅 빈 천도나무 아래에 남겨진 강림은 멍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다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퉤, 하고 입안에 남아있던 복숭아씨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