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하루에 세 번, 칼이 닿은 과육은 하루 안에 전부 먹이고, 남은 씨앗을 달인 물은 곯은 피부에 바르면 효과가 있을 것이오. 심한 환부에는 껍질을 붙여두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그 무엇도 버리지 말고 잘 사용하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체 어디 사는 누구시길래, 이런 귀한 약을…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저희가 필시 나중에 은혜를 갚겠습니다!”
“…나에 대한 건 잊어버리게. 얼른 가서 딸아이를 구해야지.”
젊은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보따리에 무명천으로 싼 천도 한 알을 소중히 넣고는 바삐 길을 떠났다.
낡은 장옷을 걸치고 평범한 차림을 한 누군가가 그들의 뒷모습을 얼마간 응시하다가, 그 또한 자리를 떠났다.
***
“…말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임마.”
“…도령님!!!!”
강림이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녀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하지만…하지만…!”
소녀가 답지 않게 눈물까지 글썽이자, 강림은 또 마음이 약해져 느슨해진 말투로 대꾸했다.
“어차피 노친네들 장난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금방 돌아올…”
“말도 안 되게 귀여워지셨잖습니까!!!!”
“……”
소녀의 이름은 은령.
그렇다.
아직 은령이 정식 차사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의 일이었다.
은령이 강림의 근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이미 그의 형이 집행되고 난 후였다. 아직 차사 간부회 중에서도 막내나 다름없던 그녀에게 그 누구도 강림에 대한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은 그다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사회를 통틀어, 아니 저승에서 일하는 모든 간부들을 통틀어 은령이 강림에 관한 일이면 얼마나 지독해지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며, 또 혹자는 아직 집단에서 신입 티를 벗지 못한 은령에게 굳이 그들의 대장이 염라는 물론, 옥황상제의 화를 사 무기한 근신 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 암암리에는 강림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면 그가 근신을 받은 적이 처음도 아니었고, 다른 이도 아닌 바로 강림 도령이었으니까 말이다. 은령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한창 인간도에서 일어난 대학살 때문에 바빠서 정신이 없던 지라, 차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말을 전해준 그 당시의 그녀의 선배의 말대로, 다른 이도 아닌 강림이니 다시 그 능글거리는 태도로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복귀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없는 시기가 지났다. 왜 최근 들어 이토록 많은 대학살이 일어나는 걸까. 인간들이 단체로 죽는 일이야 전 세대, 전 세계를 걸쳐 항상 일어나던 일이었지만, 적어도 은령이 맡은 동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혼백이 터져 나오는 일은 그동안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한날한시에, 또 며칠이나 심지어 격일로 인간들이 죽어가는 일은 확실히 무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망의 이유도 다양했다. 한 달 전에는 혼백의 모양조차 온전치 않은, 그 말은 즉 죽을 때 그리 곱게 죽지 못하고 이른바 ‘갈기갈기 조각난’영혼들이 많았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것은 예사요, 머리가 반쯤 깨지거나 아예 한 덩어리의 인간의 형태를 이루지도 못한 혼백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는 말도 하지 않는, 즉 말을 배우기도 전에 죽은 자들도 많았다. 은령은 그런 어린 혼들을 볼 때마다 더 기계적인 태도로 일을 처리했다. 감정에 휘둘려봤자 주어진 일의 단계만 더 늦출 뿐이니까. 늑장을 부릴 여유 따위는 없고, 죽은 영혼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하필 강림의 부재로 인해 더더욱 지옥도는 혼란 그 자체가 되어갔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한 달 전 인간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특정 지역 몇몇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산과 바다 근지에서 주로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제가 담당했던 지역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지도자는 지금 누구지? 보자, 예전에 그 지역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했는데, 이름이…”
“…조선이었습니다.”
“그래, 조선. 그러나 조선이 있기 전부터 그 지역은 언제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역이었어. 그래서 은령이 너를 거기에 보내지 않기로 얘기가 나왔었는데, 쯧… 나 없는 사이에 또 누가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나 보군. 앞으로 한… 50년? 동안은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야. 그리고 듣기로는 바다 건너 섬에서 세워진 나라에서도, 폭발적으로 많은 혼들이 밀려오고 있다면서?”
“예. 제 관할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최근 조선이라는 땅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눈치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는 제 관할지를 중심으로 기근과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아마 앞으로도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 같습니다.”
강림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근신 중인 강림은 천상도에 거주하는 이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있었지만, 때때로 그의 부하들이 몰래 천상도에 방문해 그에게 이런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강림의 측근이었던 두세 명의 방문만이 허락되었지만, 은령을 보내기로 한 것은 아마도 그녀가 누구보다도 강림의 복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막내한테는 배려심이 깊은 녀석들이로군. 강림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은령을 만나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던 그는, 안 그래도 어려진 데다 힘의 대부분을 뺏긴 자신의 꼴을 다른 사람도 아닌 은령에게 보이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존경하다 못해 숭배하기까지 하는 그녀의 마음은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하필 이런 쬐그만 모습을 때 은령이를 보낼 건 또 뭐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강림은 일부러 헛기침을 해가며 최대한 어른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은령의 반응은…강림이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웃지 마라.”
“…그…그렇지만…”
상기된 얼굴의 은령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강림을 이곳저곳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사를 그런 얼굴로 보지 말란 말이다, 이 녀석아… 강림은 피곤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 손을 내저었다.
“일 얘기는 그만하면 됐고. 오랜만에 얼굴 보니 반갑기는 하네. 의명이랑 일춘이가 잘 대해주기는 하고?”
“네. 선배님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십니다. 저도 얼른 그분들처럼, 도령님의 옆자리에 걸맞은 훌륭한 차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근신 중인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도…”
“……”
“…뭐,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나야 언제든 돌아가면 가는 거고, 운이 나빠서 좀 더 눌러앉아야 하면 그러는 거고. 물 따라 바람 따라 사는 사람 아니냐.”
“…도령님, 안 그래도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때아닌 진지한 은령의 물음에 강림의 웃음기도 사라졌다. 진지해진 눈의 은령은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예의 바르게 무릎을 꿇고 단정한 어깨를 한 채 앉아있는 은령은 얼핏 보기에도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녀였으나, 강직하게 다문 입술과 항상 주먹을 쥐는 습관이 남은 두 손은 그녀가 괜히 저승 차사회 중 최연소로 들어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뭔데?”
“…오는 길에 선재동자 님을 만나 뵈었습니다만… 최근, 무릉에 있는 모든 천도의 씨를 말린 자가, 정말로 도령님이 맞습니까?”
“그래, 내가 한 짓이지.”
“하지만 도령님은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은령아.”
강림은 책상다리를 한 무릎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그녀를 불렀다. 은령은 여전히 필사적인 얼굴로 그의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말이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은 없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모든 일은 다 그럴 만하니까 일어나는 거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이 웅대한 우주의 섭리가 깃들어 있고, 모든 것들은 타고난 팔자대로 살게 된다고, 저는 견습 차사 때 배웠습니다. 심지어 천상도에서 태어나신 도령님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산 자, 특히 인간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는 것이야말로 큰 화를 당하는 일이지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하지만 도령님.”
“…차사 은령. 내가 하나하나 차사 개개인의 생각과 신념에 간섭하고, 그것이 그릇된 것이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며 가르치고들 생각은 없네. 자네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도, 그 마음도 항상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이번에는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은령의 낯빛이 변했다. 그러나 강림은 바꾼 태도를 다시 되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강림이 은령에게 그런 태도를 취할 때는 딱 한 가지 상황뿐이었다. 강림의 심기를 거스른 것. 그가 언짢은 기분이 들 때마다 강림은 언제나 허물없이 대해주던 부하들에게 선을 긋고, 단정한 존칭을 붙여 이야기하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모두가 눈치를 보게 하기는 했지만.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은령은 당황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모든 운명은 개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며, 이는 바뀌지 않는다. 저마다 정해진 역할이 있고 더 위대한 뜻과 우주의 섭리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은령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에게 그런 믿음을 심어준 것도.
강림,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은령은 지금은 자신이 굽혀야 할 때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바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은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들바람이 부는 마당으로 나섰다. 곧이어 솔개 바람이 휘이잉, 하고 불더니, 은령이 자취를 감췄다. 강림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며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은령이까지 알다니, 이제 온 지옥 간부들한테 이야기 퍼지는 것쯤은 금방이겠구만.”
나른한 오후,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꽃잎 몇 장이 강림의 거처 앞마당까지 날아들었다. 이미 다 사라져버리고 없는 천도의 향기를 닮은 어떤 향긋한 내음이 실려 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꽃잎 중 하나를 잡아 챈 강림은 가만히 손바닥 안에 갇힌 꽃잎을 들여다보았다. 작아진 손은 이제 정말 어른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동자들보다도 더 작고 어린 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힘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극락을 본 따 만든 곳이라는 이 천상도는 사실, 천국天國이 아니라 그저 눈을 가리고 끝없이 흐르는 시간을 잊게 만드는 유배지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강림의 마음속에서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제나 그랬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곳.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의 의미도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는 것.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강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전에 선재동자 대신 서찰을 써주던 책상과 문방사우들을 꺼냈다. 이제 점점 도력이 닳아가고 있어 스스로 쓸 수밖에 없지만. 강림은 개의치 않고 익숙한 자세로 소매를 걷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