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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142화 (142/166)

142화

“명중이오!”

“하하하, 거 참. 김 판서 댁 화살은 제아무리 무릉도원의 천록이 와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반듯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성이 목례를 하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자,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두어 명이 바로 달려 나가 사냥감을 확인했다. 아직 뿔이 나지도 않은 작은 사슴의 목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사슴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아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는데, 부하들은 무감한 표정으로 사슴의 뒷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의 뒤편에 실었다.

“…사슴의 목을 꿰뚫으셨군요.”

김 판서의 사냥 실력을 치하하던 이들 중 하나가, 가만히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 사냥은 조선 궁궐 내에서 내로라하는 관직에 몸담은 양반 가 자제들의 사교 모임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무리는 항상 거기서 거기였고, 달라지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그는 이 무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요, 그만큼 관직의 자리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 사냥 모임 자체도 처음 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하대할 수는 없었는데, 그건 비단 그의 집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음 시위는 제가 한 번 당겨보겠습니다.”

“어이쿠, 이도 자네가?”

“예, 영상께서 친히 저를 초대해 이리 끼워 주셨는데, 저도 사슴은 아니더라도 토끼 한 마리 정도는 잡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말에서 내려 안장에 매 두었던 화살 통을 들고 어깨에 걸쳤던 활을 손에 쥐었다. 과연, 지난해 무과에 제일가는 이로 뽑힌 사내다운 당당한 몸짓에 양반 가 자제들 중 반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머지 반은 불편하고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일제히 그를 주목했다. 그중 가장 기대심에 찬 얼굴은 바로 그가 영상이라고 부른, 이른바 영의정 직의 문태국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무신으로 공을 세워 입신했고, 뛰어난 지략과 비상한 두뇌, 그리고 천부적인 전략가로서의 재능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였다. 조선 팔도에서는 오히려 왕의 이름보다 문태국의 이름을 대면 코흘리개들도 다 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십 리 밖에서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면 세 살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할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그랬던 태국도 결국은 인간이고 주어진 명이 있는지라. 그는 쉰이 넘어 자신의 힘과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한밤에도 밝던 눈조차 점점 어두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후 자신의 후임을 양성하는 일에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태국의 호랑이 같은 성격에 차는 이가 없었고, 모든 후손들과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 사내란 사내는 갓 걸음마를 뗀 녀석을 제하고는 모두 데려다 훈련을 시켰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사내랍시고 데려오는 녀석들이 모두 어리숙하고, 멍청하고, 식견과 생각이 짧으며, 크고 멀리 볼 줄 모르는 녀석들뿐이라, 태국은 결국 크게 실망하고 포기를 하려던 찰나였다. 그러던 중 태국은 아끼는 조카딸의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 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라 명했다. 그의 나이 쉰일곱이요, 조카딸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어허, 무엄한지고! 이 앞이 뉘 앞이라고 지금 눈깔을 똑바로 뜨고!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나는 두 번 묻는 것을 싫어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 장성한 사내라기보다 아직 소년에 가까운 덩치와 얼굴을 가진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 부리부리하면서도 올곧고 차분한 눈빛, 흙먼지에 덮여 지저분한 얼굴과 낡고 초라한 행색에도 소년은 오히려 눈길을 끌 정도로 타고난 인물이었다. 적어도 그날, 태국의 집 앞마당에 모인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소년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도. 강이도, 라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이도야!!”

“….”

“어머머, 아씨! 체통을 지키십시오!”

마루 위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온 소녀가 거리낌 없이 흙을 밟으며 다가와 소년의 양손을 붙들었다. 뒷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던 소년은 흠칫 놀라며 주춤 몸을 뒤로 물리다가, 이내 소녀의 정체를 확인하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영신 누님!”

“이 얼마 만이니, 이도야? 세상에, 얘 큰 것 좀 봐. 어렸을 때는 그렇게 조그맣고 발발거리더니, 이젠 나보다 커졌네!”

“흠, 흠… 아씨,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이리 오세요. 어서!”

“유모, 유모도 이제는 이도를 못 알아보겠지? 그 왜, 무진에 있는 할아버님 댁 뒷집에 살던. 그렇게 쬐그맣던 애가 벌써 열다섯이라니. 곧 있으면 장가도 들겠어. 그치? 그래,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건강히 잘 지내시고?”

“…그러시겠죠.”

“…그러시겠다니?”

이도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리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얼굴이 굳어졌다. 창백해진 얼굴의 소녀는 시선을 떨어트리며 잡은 소년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이, 곧 한두 방울씩 빗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

이도와 영신은 정확히 7년 전 처음 만났다.

이도가 일곱 살, 영신이 열 살이 되었을 때였고, 영신의 지병이 갑자기 심해져 잠시 요양 차 그녀의 조부모가 살고 있는 타지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였다. 지금은 깨끗이 나았으나 어릴 때의 영신은 예민한 성정과 약한 피부 탓에 이와 관련한 자잘한 고질병을 앓았고, 한양에 비해 산골이나 다름없는 조용하고도 사람이 적은 마을에서 살다 보면 병에 차도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영신의 부모는 외동딸을 조부모 댁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벼슬을 지내던 아버지의 일 때문에 온 가족이 이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영신이 태어날 때부터 돌봐주던 유모를 같이 보내고, 또 손녀딸을 끔찍이도 아끼는 조부모를 잘 아는 영신의 부모는 마음을 놓고 그녀를 시골로 보냈다.

의원은 영신이 다 자란 처녀가 될 때까지 고질병이 낫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지만, 그러나 웬걸, 영신은 시골에서 지낸 지 삼 개월 만에 피부와 호흡기가 건강해지고, 성격도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밝고 건강한 모습이 되었다. 게다가 생전 자기주장을 하는 법이 없던 아이가 고집을 피우며 본가로 돌아가기 싫다, 여기서 좀 더 지낼 것이다, 하며 떼를 쓰기까지 하자, 오히려 부모는 그런 어린 딸의 모습에 기뻐할 정도였다. 영신은 당차고 활발한 소녀로 자라났다. 양반집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난 영신은 줄줄이 벼슬을 지내는 친척 어른들과 부모를 보면서 자라서인지, 그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배움과 입신양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벼슬자리 자체에 관심을 갖기보다, 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많은 사람들을 보다 더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보살필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있었다. 당돌하게도 어린 손녀딸이 그런 자신의 꿈을 말할 때마다, 영신의 할아버지이자 일찍이 판서 직을 맡았던 문 영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영신이 10살이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다니게 해달라고 그녀의 조부모를 조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손녀딸의 고집 섞인 부탁에 두 손 두 발 다 든 문 영감이, 영신의 손을 잡고 동네 서당으로 보내주던 날, 영신은 처음으로 이도를 만나게 되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불쑥 끼어든 당돌한 목소리에 어린 소년은 힐끔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쭈그린 채 불쏘시개로 아궁이를 들쑤시던 소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 이름이 뭐냐니까?”

척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 옷에, 햇빛 한 번 오래 쬐어본 적 없어 보이는 희고 혈색 좋은 복숭앗빛 뺨, 고운 손과 꽃신을 신은 소녀의 행색에 소년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 아가씨가 이런 산골 마을 서당까지 와서 굳이 자신한테 말을 거는지,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주제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신은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어 소년이 자신의 말을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아예 가까이 다가가 치마를 접어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유모나 할머니가 그렇게 치마가 땅에 끌리도록 흙바닥에 쭈그려 앉은 자신을 보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영신은 오늘 서당 공부가 평소보다 일찍 끝났으며, 공부가 끝날 시간에 맞춰 집안 머슴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일찍 끝난 공부에 신이 나 저마다 산이며 들이며 놀러 나갔고, 훈장님도 돌아다니지 않으니 서당 뒤꼍 창고 쪽인 이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웬 작은 꼬마 아이가 자신의 몸집보다 큰 나무 지게를 지고 와, 커다란 아궁이 앞에 나무를 부려놓고는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니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힘이 센 꼬마도 처음 봤거니와, 직접 아궁이에 나무를 넣고 불을 피우는 것은 어른들이나 하는 일로만 알았는데ㅡ그 전에도 영신은 몇 번 부엌 안을 들여다보며 커다란 가마를 올려놓은 아궁이를 구경한 적은 있었으나, 대부분 어른들은 어린 영신을 내보내며 불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ㅡ꼬마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불을 피우는 모습이 왠지 멋져 보였던 듯하다.

“내 말 안 들리니?”

“으아악!”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영신은 뒤로 나자빠진 소년을 보고 놀라거나 기분 상해하는 기색 대신,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갑작스레 훅 가까워진 소녀의 목소리에 지레 놀라버린 소년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이름은 이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놀리는 짓은 양반 댁 자제께서 하실 일이 못 되오.”

“내가 너를 놀렸다니?”

“…보아 하니 서당에 다닌다던, 그 한양에서 온 문 대감 댁 손녀딸 아니오? 나 같은 천 것하고는 일 없으니, 서당을 마쳤으면 서둘러 집에나 돌아가시오.”

“얘 말하는 것 좀 봐, 얘, 얘!”

영신이 어이없다는 듯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자, 치렁치렁한 치맛단이 물결처럼 퍼지고 삼단같이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이 영신의 등 밑으로 떨어졌다. 일어서고 보니 역시 영신의 키가 이도보다 한 뼘쯤 더 큰 지라, 이도는 왠지 찔끔한 기분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소년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지게를 어깨에 메고 들고 있던 불쏘시개와 땔감들을 정리했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세 군데는 더 들러야 했으므로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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