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43화 (143/166)

143화

“이도라고 했지? 이도, 너는 몇 살이니? 어디 살아?”

“……”

이도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입을 앙다문 채 지게를 들고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영신을 피해 숲 쪽 오솔길로 뛰듯이 걸어가는 작은 소년을 보며, 영신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정말.”

영신이 이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 또한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는데, 영신은 이번에도 좋게 말하면 구김살 없이, 나쁘게 말하면 눈치 없을 정도로 이도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저 영신은, 시중을 드는 머슴을 거느리고 서당으로 오다가 훈장님이 수업 전 혼자 글을 외는 방으로 쓰는 작은 사랑방 앞에 선 이도를 발견하고 반가이 인사했을 뿐이었다. 소년은 안 그래도 작고 마른 몸을 웅크리고 마루 밑에 쭈그린 채 무언가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이도야, 거기서 무얼 하니?”

“……”

“그 방은 훈장님이 계시는 방이야. 혹 훈장님께 볼 일이 있는 게니? 내가 대신 불러줄까?”

종종종 뛰어가 이도 옆으로 달싹 붙어 앉는 영신을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던 머슴이, 애써 영신을 외면하는 숯 검댕 차림의 작은 소년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곧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는 듯 잔뜩 씨근대며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네 이노오옴! 이 분이 뉘신지 알고 감히 우리 아씨께 치근덕대는 것이야! 네놈, 분명 저 산골 남중바위 밑에 사는 노파네 자식놈이렷다!”

나이는 영신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주제에, 또래보다 웃자란 키와 덩치를 가진 험악한 인상의 머슴이 다짜고짜 고함을 쳤다. 깜짝 놀란 영신이 그를 올려다보자, 머슴은 왠지 더욱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씨! 이리 오십시오! 이놈과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습디다! 이놈이 어떤 놈인 줄이나 알고 그러시는 거요? 어서요, 이리 오셔요!”

“동춘아, 그게 무슨 무례한 언사이냐? 아무리 나이가 어린 이라고 할지라도 배움을 위해 서당에 다니는 아이거늘, 그 무슨 말버릇이야?”

“흥, 배움을 위해 서당은 무슨, 이놈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놈인지 아십니까? 그 미친 노파의 자식이라고요. 그 기분 나쁜 노인네가 저주해서 죽어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어느 날부터는 자기 손주랍시고 데려와 키우더니, 저놈도 눈깔부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쥐새끼같이 서당에 숨어들어와 훈장님이나 다른 도련님들, 아씨들을 해할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었을 겝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만하십시오!”

소년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기양양하게 소년을 윽박지르던 머슴의 목청보다도 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친 이도는, 입을 꾹 다물고 머슴을 노려보다 말고 영신을 휙 돌아보았다. 그 기세에 기가 눌린 영신이 움찔 하고 놀라자, 이도는 영신의 어깨를 밀치듯 몸을 돌리곤 마구 뛰어 서당을 벗어났다. 지난번과 같은 방향의, 산 밑 오솔길 방향이었다.

영신이 눈을 흘기며 머슴을 탓했다.

“동춘아, 아무리 이상하고 수상해 보일지라도, 그런 이들이 전부 다 못된 짓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 게다가 이상한 건 저 애의 할머니이지, 저 애는 아무 짓도 안 했잖니? 서당에 다니고 싶어서 온 거면 어떡하려고 그런 말을 해?”

“아씨, 저놈은 나무일이나 자기 할머니 심부름 같은 거나 거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놈입디다. 무슨 서당은 서당입니까? 저 녀석 부모도 생사가 오리무중이고, 들리는 바로는 어디 오랑캐의 씨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게다가 저놈은 서당은커녕 삼시 세끼 밥 먹을 형편도 안 될 겁니다.”

“…결국 정확한 얘기도 아니고, 너도 다 주워들은 소문인 거잖니.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인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한 언사 아니니? 나무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게 어때서? 동춘아, 어디 가서 그런 말을 듣거들랑,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렴. 누가 그런 말을 하든지 너도 거기에 동조해 말을 퍼다 나르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건 네 주인인 우리 집안 어른들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는 거라고. 알겠니?”

단호한 영신의 호통에 머슴은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렸다. 영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마치 작은 들짐승이 지나가기라도 한 듯, 발자국이나 인적 하나 남지 않은 채 오솔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늘이 드리워진 길 위로 무성하게 난 들풀들만이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이도는 코를 훌쩍이며 강아지풀을 뚝뚝 꺾었다.

어느덧 웃자란 들풀들이 이도의 키와 엇비슷해져 있었다. 지난해만 해도 종아리만 간질일 정도이던 풀들의 키가 이제는 작은 아이 하나 정도는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강아지풀이 덤불을 이룬 곳은 이도가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뭐? 서당에 다닐 돈도 없어? 우리 할머니더러 미친 무당이라고? 나쁜 놈, 나쁜 자식, 지도 그래 봤자 머슴 노릇이나 하는 천민이면서, 체…

속으로 꿍얼거리다 보니 이도는 어느새 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자 눈이 뜨거워졌다. 우는 건 바보 천치들이나 하는 짓이야. 어머니가 그랬어. 남들 앞에서 우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우리가 지금은 가난하게 살아도, 가족끼리 같이 살지 못해도, 우리는 그래도…

그래도 나는… 무시당하고 살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언젠가… 아주 귀하고 큰 사람이 될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게 지금 다 무슨 소용이지?

지금 당장 이렇게 가족끼리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생사도 알지 못하고, 그저 죽은 듯이 숨어 지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이도는 이를 앙 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지고 목구멍이 울렁거렸다. 숨이 들쑥날쑥해지더니, 이내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울어서 해결되는 건 없어. 울지 마, 강이도. 우는 걸 남들 앞에 보이면 약점만 잡힐 뿐이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도야, 이도야!”

“……”

“얘가 어디… 어머, 이도야! 이제 찾았네, 정말!”

…뭐지, 꿈인가. 이도는 눈을 껌벅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풀 사이에 숨은 이도를 간신히 찾아낸 영신이, 활짝 웃는 얼굴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풀을 가르고 다가왔다. 이도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런 소년을 보며 영신은 꺄르륵 웃으며 이도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이고오, 다리야. 여기 길은 경사가 왜 이리 높니? 나무가 무성해 햇빛도 잘 안 들고, 풀은 또 왜 이렇게 높이 자란 거람. 따라오는데 몇 번이나 헤맸는지 몰라.”

영신의 목소리는 높고 경쾌했지만 험한 숲길을 따라오느라 힘들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지, 그녀의 흰 이마 위로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잘거리며 내뱉는 말 사이사이에도 숨을 고르느라 조금씩 말을 멈추던 그녀가 물었다.

“어딜 그렇게 가나 했더니. 여기가 네가 자주 오는 곳이구나. 꼭 산 다람쥐처럼 잽싸게 사라지길래 찾느라 애썼다. 그런데… 어머, 너 울었니?”

“…여기는 왜 온 거요? 따라오지 마시오. 아까 그 머슴 놈이 그러질 않소? 나와 같이 있으면 나쁜 일을 당할지도 모르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재수 옴 붙기 싫으면 어서…”

“그거 말인데, 네가 그러는 거니?”

“…예?”

이도가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괴인 눈으로 영신을 쳐다보자, 맞은편에 쭈그려 앉은 영신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우리 집 동춘이 말로는, 네가 사람들에게 나쁜 저주를 해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고 다치는 거라던데. 그거 정말로 네가 한 거 맞니?”

“무슨… 아, 아니오. 난 그런 적 없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

영신은 가쁜 숨을 길게 내쉬더니 씩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큰 비가 올 것 같았다. 피부로 와닿는 습기 찬 눅눅한 바람과 공기의 움직임만으로도 이도는 알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이 양반집 아가씨도, 이곳저곳 쏘다니지 말고 어서 집에 들어가 얌전히 지내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이도는 영신의 눈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왠지 등줄기가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영신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영신이 ‘보고 있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신의 시선이 이도에게로 와 멈췄다.

정확히는 이도의 어깨 너머 어딘가로.

“……”

영신의 맑은 눈망울이, 미묘하게 흐려지는 것을 본 이도가 영신의 팔을 덥석 잡았다.

“…너도 보이니?”

“……”

“너도 보는 거야?”

영신이 마치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영신은 여전히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으로 소녀는 그렇게, 소년의 등 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도는 어깨가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왠지 귓가에서, 쉭쉭대는 듯한 바람 소리가 나부끼고 있었다.

“…나… 난… 난 모르오. 그저… 우리 할머니가…”

“……”

이도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훅, 하고 누군가 입김을 부는 것처럼 이도의 얼굴 위로 더운 바람이 불었다. 곧 비가 오려나. 아니면… 아니면.

“…우리 집에… 한 번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도가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영신은 씩 웃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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