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영신은 그 뒤로도 이도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둘이 친해지게 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처음 영신이 이도의 집에 갔을 때, 마침 집에 있던 이도의 할머니는 마당으로 나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구만.”
소문 속 노파는 평범한 동네 노인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영신이 예를 갖춰 얌전히 인사를 올리자, 노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걸걸한 목소리와 굽은 허리,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비녀로 틀어 올린 흰머리칼은 그녀가 소문 속 미친 무당이라기보다는, 그저 약하고 나이 든 노인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적어도 영신에게는 그랬다. 영신은 예의 바르게 물었다.
“당신이 이도의 할머니 되시는 분입니까?”
“그렇지요. 우리 부족한 손주 녀석이 귀한 분께 누를 끼치지는 않았는지요.”
영신의 옆에 쭈뼛거리며 서 있던 이도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대꾸했다.
“할머니!”
“호호호, 할미가 농도 못 치느냐. 보아하니 저어기, 한양에서 왔다던 문 대감 댁 손녀딸이시구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 밖에 서 계시지 말고 안에 들어 약수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아기씨.”
“이도야, 너도 들어와.”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당 안으로 들어선 영신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이도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전혀 거리낌이나 주저하는 기색 없이 노인을 따라 총총 마루 위로 올라서는 영신을 보며, 이도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저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마루 위로 올라서면서, 댓돌 위에 흐트러진 채 놓인 영신의 꽃신을 가지런히 해놓을 뿐이었다.
“뭐라고요?”
“시끄러, 이눔아. 할미 귀 아직 안 먹었다.”
이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얹고 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영신이 앞으로 우리 집에 자주 올 거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아무리 평소에 어린 손자를 놀리는 낙으로 사는 노인이라지만, 대체 어떤 속셈으로 이번에는 일을 꾸미는 건지. 이도의 앳된 얼굴이 고집스럽게 변하는 걸 보며 노인은 흐흐 웃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되긴? 여긴 내 집이다. 내 손님으로 모시는 건데, 뭐가 어떠냐?”
“이익… 그치만…!”
“안 될 건 또 무어야? 그리 걱정할 것도 없다. 어차피 그 아기씨는 이곳에서 눌러 살 인물도 아니야. 길어야 몇 해 넘기기도 전에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그전에 잠시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야.”
“도움이요?”
도움? 이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노인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굽은 허리를 펴며 아궁이에 찔러 넣던 땔감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불씨가 붙기 시작하는 아궁이가 뿜는 불길에 노파의 흰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물끄러미 불길을 내려다보던 노파가 뒷짐을 지며 일어섰다.
“이도야, 내가 전에 말했던 것, 기억하느냐?”
“전에 말했던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