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45화 (145/166)

“…느이 아버지가… 길을 떠난 날 말이다.”

이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손자의 둥근 뺨이 괴로움으로 얼룩지는 걸 보면서 노인은 눈썹을 늘어뜨렸다. 굳이 다시 일깨워주기 싫은 기억일 테지만, 언제까지고 과거에 매여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 어린 것에게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이고, 그런 손자를 위해 이 늙은이가 남겨줄 만한 것이라곤 그저, 이 지겹도록 긴 인생 동안 배운 토막만 한 지혜 정도였다. 그리고 이 저주스러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업보의 끝자락까지 말이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널 버린 게 아니다. 알고 있지?”

“…저도 알아요.”

“…너를 나에게 맡기고 간 까닭은, 그저 닥쳐올 화를 가족들이 다 같이 끌어안을 필요가 없어서였단다. 특히 제일 어린 너만은 살아야 했으니까… 우리 가문이 전부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각자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게야. 분명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너를…”

“그런 소리 마세요. 저는 그냥 이 마을에서 할머니랑 같이 살 겁니다.”

이도는 짐짓 어른스러운 얼굴로 딱딱하게 대꾸한 뒤 부엌 한구석에 놓여있던 나무 두레박을 집어 들었다. 물을 길어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어린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 마당을 나섰다.

“…언제쯤 네가 이해하게 될는지…”

노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팔과 어깨를 주무르며 노인은 절뚝절뚝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이도는 우물가 앞에 도착해 등에 멘 물통을 내려놓았다.

마을에서 공용으로 쓰는 큰 우물은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도와 이도의 할머니는 그 우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을 길어오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우물을 방문해야 했기에 이도는 가까운 마을 안에 위치한 큰 우물보다, 조금 더 걸어서 가야 하는 산어귀에 위치한 낡은 우물가로 다니곤 했다. 사실 그 우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종종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지만, 시장 근처에 있는 우물을 넓히면서 굳이 먼 곳까지 작은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곳이었다. 원래도 그다지 인적이 많이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기에 우물가로 가는 길에도 거친 덤불들이 많았고 산짐승들의 기척까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도는 오히려 그런 곳이 편했다.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고, 물을 뜨면서 독특한 식물이나 동물들을 본 적도 있어 숫기가 없는 어린 소년에게는 자그만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둡고 음습한데다 인적이 뜸해 무서운 우물가라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지만, 이도는 자주 산어귀의 작은 우물 터를 들락거렸다.

“비가 오려나… 공기가 많이 무거운데.”

이도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퍼낸 물에 손을 담갔다가 치켜들었다. 바람의 방향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젖은 손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 이도는 하늘이 어두워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빛이 들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른 물만 길어서 돌아가야지.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영신, 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 양반집 아가씨랑 있었을 때도 공기의 촉감이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비가 올 것처럼 어두침침하고 습한 공기가 이도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첨벙-

“……어?”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이도는 물이 찰랑거리는 두레박을 어깨에 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막 물을 다 길어 우물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이도의 머리칼이 습한 바람에 휘잉, 하고 흩날렸다. 조용한 우물가에서는 보통 바람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 바스락거리며 벌레나 작은 동물들이 풀을 밟는 소리 같은 것 외에는 들린 적이 없었다. 이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떼려던 참이었다.

‘ ’

“……”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분명히 방금 누군가가…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는데. 이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우물을 돌아보았다. 우물 위로 드리워진 그늘이 더욱 깊어진 듯 우물은 밤이나 된 것처럼 어두컴컴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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