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48화 (148/166)

찰박-

스르륵-

찰박-

무언가 젖은 옷자락 같은 것이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도가 눈을 깜박이며 불안한 시선으로 우물을 쳐다보자, 영신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이야.”

흡, 하고 이도가 마지막 들숨을 쉬자, 느릿느릿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스르륵, 찰박, 스르륵, 찰박, 찰박, 찰박, 찰박

찰박-

“……”

“……”

어디 있니

어디 있니

어디 있니

이도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내쉬려던 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대체… 저…저게 뭐지…?

우물 안에서, 뭔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

이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는지, 영신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이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달래주는 듯한 웃음에 이도는 살짝 안심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저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꿈도 착각도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형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흰 두 개의 손이, 조금 전까지 이도가 잡고 있던 우물 벽을 타고 올라와 조금씩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손이 올라오면서 검은 머리통과 같은 물체가 조금씩 우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도가 분명 사람의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물에 젖어 수면 위로 퍼져 있던 그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랗고, 창백했고, 윗부분에 달린 머리카락은 비정상적으로 길고 많았다. 애초에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면 느껴질 움직임이나 자연스러움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검은색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창백한 얼굴과 목, 그 아래를 끝도 없는 검은 머리칼이 덮고 있었다. 얼굴은 너무나 커다란 것에 비해 목은 가느다랗고 길었으며, 어깨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너무 어둡고 짙은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거나.

기이하고 징그러운 그것의 머리통과 희고 긴 손가락이 우물을 타고 올라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도는 의식하지도 못한 순간에 저절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 이도와 영신의 신발 끝에서 팔만 뻗어도 닿을 만한 거리에, ‘그것’의 기다란 손톱이 뻗어졌다. 그러나 마치 그것의 손톱은 우물가 위에 드리워졌던, 우물 터 지붕과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우물 주변만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꼭 우물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

“……”

영신이 이도에게 눈짓을 보내자, 이도는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신호하면, 뒤로 뛰는 거야.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도는 바로 영신의 눈짓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똑같이 숨을 죽이고 있던 영신이 그것의 기척을 살피듯 주의 깊게 우물을 응시했다.

까득

까득

까드득

서늘한 돌과 우물을 긁어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것의 기다란 손톱과 갈퀴같이 휘어진 흰 손가락이 우물 주변을 온통 더듬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몇 번이나, 우물 위로 솟은 몸을 구부린 채, 사방을 긁어대고 있었다. 물에 젖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은 스물스물 불어나 이미 우물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검은 액체와도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은 그림자에 구속되지 않는 건지, 천천히, 아주 조금씩 길어져 그림자를 벗어나 이도와 영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도는 본능적으로 저 머리카락에 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다!’

“……!”

그것의 손이 잠시 뒤로 돌아가는 순간, 영신은 이도의 팔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이도 또한 직감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아이가 움직이면서 난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와 발자국 소리에도 그것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우물의 뒷부분을 긁어대고 있었다. 여전히 숨을 죽인 채 머리카락으로부터 빠르게 몸을 피한 영신과 이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돌려 풀숲을 달려 나갔다.

아니, 달려 나가려던 참이었다.

부스럭-

“….!”

“악!”

“이도야!”

정신없이 우물을 벗어나 달리려던 바로 그 찰나, 이도의 왼쪽 어깨로 솔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잔뜩 긴장된 어깨에 닿은 낯선 감각에 이도가 고개를 돌리자, 솔방울을 떨어뜨린 범인인 갈색 다람쥐 한 마리가 이도의 얼굴 쪽으로 뛰어들었다. 가볍고 날쌘 털 짐승이 솔방울을 잡아채며 이도를 습격한 탓에 영신과 이도는 놀라 짧은 비명과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찾았다

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삭

“으아아아악!”

“이도야!!”

“영신 아씨는 물러서 계십시오. 제가 저 애가 이 고을에 올 때부터 누누이 말했던 것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을 지금 어기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겝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제 손자는 물론 영신 아씨도 무사하지 못했을 게요.”

“하지만, 이도는 볼 수 없는 눈을 가졌지 않습니까? 만신님이 할머니로서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같이 보이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도의 귀안鬼眼을 깨우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는 것보다야…”

“잠깐, 두 분 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되게 좀 말해 주십시오!”

이도가 불만스러운 듯 외치자, 영신과 그의 할머니는 잠시 난감한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영신의 눈짓에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이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여기서 이렇게 서서 할 말은 아닌 듯하니.”

이도는 그날, 왜 그의 할머니가 그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공포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는지,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된 영신이 어쩌다 자신과 할머니의 집에 들락거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다시피 하고 사라진 이유도.

이도의 할머니, 경월은 슬하에 자식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숱한 전쟁과 이유 모를 전염병, 그리고 사고로 자식들과 어린 손주를 몽땅 잃었다. 그 중 딱 한 명, 늦둥이 아들이었던 선호가 살아남았는데, 그 아들이 커서 이도의 아버지가 된다.

선호는 성정이 곧고 매우 어른스러운 아들이었다. 어려서 아버지와 누이들, 형, 형수와 생떼 같은 갓난아이 조카들까지 잃고, 반쯤 미쳐버린 어머니를 모시면서 꿋꿋하게 잘 자랐다. 경월도 수년은 정신을 놓고 살다가 어린 막내가 스스로 마당을 비질하고 물을 길어오는 것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다. 저 어린 것이라도 살아야지. 산 사람끼리라도 잘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경월은 어린 선호의 손을 잡고 오랜 터전을 떠나 이 고을 저 고을 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고 살았다. 그나마 경월은 처녀시절 신 내림을 받아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마저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소싯적 무당으로 동네에서 만신 노릇을 한 가락이 있어서인지 그녀는 어찌 저찌 남들의 대소사에 굿을 해주고, 점을 봐주고, 때로는 한풀이도 들어주며 돈을 받아 선호를 키웠다.

선호가 열일곱이 되던 해, 관아에서 포졸들이 고을을 한바탕 휩쓸고 간 날이었다. 그 동네에서 열여섯이 넘은 장성한 청년들을 모두 데려다 곧 있을 전쟁에 징집시키기 위해서였다. 원래 고을에서 토박이로 살던 이들도 아니었고, 또 조용히 산기슭 밑에 오두막을 짓고 거처를 삼아 지내서인지, 병사들은 선호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그들이 단지 잠시 살다가 떠나갈 이방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몰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경월은 상관없었다. 그 미친 지옥구덩이나 다름없는 전쟁터에 하나 남은 자식을 내보내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을 치라는 것이 경월의 생각이었다. 경월의 걱정과 달리 다행히도 관아에서는 선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은 한동안 나라에게 뺏긴 것이나 다름없는 아들, 형제에 대한 슬픔으로 푹 잠겨 있었다. 그들 눈 밖으로 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경월은 선호에게 당분간 마을 쪽으로 다니지 말고 숨어 지내자고 일러두었다. 선호도 알겠다며 더 깊은 산 속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날 선호가 한 아가씨를 데려온 것은, 이상하게 그날따라 경월의 꿈자리가 뒤숭숭해 하루 종일 집 주변을 돌며 기도를 올리고 있던 날이었다. 잔뜩 지친 기색에 손발에 긁힌 상처까지 가득한, 순한 얼굴의 귀티 나는 아가씨였다. 한 눈에 봐도 옷 차림새하며 말씨하며, 이 고을에서 아무렇게나 큰 어느 집 여식일 리는 없었고, 분명 어딘가 말 못할 사연을 가진 양반 댁의 딸일 것이라 생각한 경월은 누가 볼 새라 일단 소녀를 집 안에 들여 보살펴주었다.

소녀의 이름은 공선. 선호의 말로는 산 속에서 나무를 하다가, 다친 채로 굴 안에 피신해있던 공선을 발견해 데려왔다고 했다. 사람을 만난 게 오랜만인지 공선은 꾀죄죄한 몰골에 오히려 반색하며 선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웬 귀신인가 했다며 반쯤 놀리는 선호의 말에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공선을 보니, 경월은 오호라, 하는 마음에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우연히도 동갑이었고 같은 이름 글자를 쓰고 있었으며, 정말 우연히도 둘 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호와 공선은 빠르게 친해졌고, 공선의 몸이 다 나았을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둘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경월은 공선의 출신지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공선이 고집스럽게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입을 다물어 그녀가 무슨 집안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보통 양반집 여식이라면 이렇게 산 속에 홀로 나다닐 리가 없었고, 누가 봐도 도망친 게 분명한 행색이라 혹여 숨죽여 살고 있는 경월과 선호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 경월의 걱정에 공선은 눈을 빛내며 경월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머니, 그럼 제가 어느 집 자식인지만 아신다면 저를 내치지 않고 며느리로 삼아주실 겁니까?”

“얘, 선아. 너도 우리 집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 내 사십 평생 우리 막내 선호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 혹시 저 애한테 무슨 불행이라도 닥치면 나는 제 명에 못 살 것이다. 선이 너도 이제 혼기가 찬 어엿한 규수지 않니? 이제 투정은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아주머니,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선호랑 아주머니랑 살 겁니다. 떠나시려거든 저를 데리고 가셔요. 저를 두고 가신다면 저도 다시 산 속으로 도망쳐 버릴 겁니다. 처음엔 운이 좋아 들짐승에게 먹히지 않고 선호가 구해주었지만, 두 번 운이 좋을 수는 없겠지요. 곰에게 죽든 들개에게 먹히든 저는 절대 제 본가로는 가지 않을 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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