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은 고집이 셌다. 어떨 때는 어릴 적 선호보다도 더 그랬다. 경월은 한숨을 쉬며 공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공선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경월의 불안한 예감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었다.
공선의 아버지 최원석은 고을에서 십 수년째 사또 노릇을 하고 있던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몇 해 전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공석이 된 사또 자리를 최원석의 측근 부하였던 이방이 대리로 맡아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을에 정착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그런 사정을 잘 몰랐던 경월과 선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사또가 독살을 당했다는 것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고, 죽은 사또의 가족과 측근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공선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이방은 탐욕스럽게도 아버지의 자리를 꿰차고는 마을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댔고, 세금으로 내는 물자의 양을 늘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사또의 외동딸인 자신이 장성하자 자신과 혼인을 올리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화를 내는 법이 없고 진중하던 선호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분개했고, 경월도 침통한 얼굴로 공선을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홀어머니인 공선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입지를 그러모아 공선이 아직 어리니 딸의 키가 집안 대들보에 난 흠집만큼 크게 되면 시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러나 공선의 어머니는 머슴 하나를 시켜 달마다 한 번씩 대들보에 난 흠집을 메우고 그 위에 새로운 흠집을 내게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선은 아직까지 시집을 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데, 얼마 전 이상함을 눈치 챈 이방이 말하길, 이제 누가 보아도 공선은 아이를 가질 수도 있을 만큼 장성하였으니 다음 달에 혼례를 올리겠다고 한 것이다. 공선의 어머니는 그날 밤 공선을 안고 울면서, 마지막 남은 패물을 싸주고 이대로 멀리 도망쳐서 다신 이 고을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이나 몸종도 없이 그저 홀로 도망친 공선은 길눈이 어두워 산 속에서 빙빙 돌기만 했고, 이대로 짐승의 먹이가 되어 죽나 하던 순간에 기적처럼 선호가 나타난 것이다. 공선은 다부진 얼굴로, 선호는 하늘이 제게 내려준 사람이며, 아무리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든 상관없이 그와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이라 확언했다. 옆에서 선호의 얼굴이 속절없이 빨개지는 것을 보며 경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과 걱정의 한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결국 경월은 둘의 사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선호와 공선은 조촐하게나마 혼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몇 달 후 경월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집 마당으로 나가보니 웬 작은 백룡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크기로 보아 생긴 것으로 보아 왠지 새끼인 것 같아 가여운 마음에 피를 닦아주고 약수를 떠다 먹이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더니 백룡은 금세 몸집을 불려 쑥쑥 자라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용과 산 것이 체감 십 년은 넘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꿈에서 깨보니 아주 잠시 잠에 들었다며 공선이 웃는 게 아닌가. 경월은 기이하다 기이해, 하며 잠시 그 꿈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 꿈속에서 다시 그 백룡이 나타나 말하길, 자네의 보살핌이 나를 살렸으니 상제의 명령대로 인간도에서 자네를 도와주겠네, 라고 경월의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경월이 놀라자 백룡은 순식간에 한 줌의 빛으로 변해 경월의 품 안으로 스며들었고, 경월을 꿈에서 깨운 것은 입덧을 하며 쓰러진 공선의 신음 소리였다.
그리고 꼭 아홉 달 후, 공선의 부른 배 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공선과 선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선호의 성을 따 강 씨가 되었다.
이도가 세 살이 되던 해 다시 한 번 큰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그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전쟁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왕이 궁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고, 각 지방의 고을이란 고을은 다 피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경월의 가족이 사는 곳도 무사하진 못했다. 게다가 공선이 선호와 혼인을 올린 후,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띌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제 갓 걸음을 뗀 어린 아들을 안은 공선과, 이젠 나이가 들어 험한 길을 멀리 떠날 수 없는 경월, 그리고 묵묵한 얼굴로 간소한 짐과 약간의 재산을 챙긴 선호는 다시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나라는 어디를 가든 황폐했고 민심이 흉흉해져, 선호가 어릴 때처럼 낯선 이들을 마을 안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다시 산 어귀에 조악한 집을 짓고 화전민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다행인 것은 팍팍한 그들의 살림살이에도 이도는 쑥쑥 자랐고, 당차고 튼튼한데다 어린 주제에도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져 누가 봐도 잘생긴 장군감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어린 부부와 경월에게 더 이상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전쟁이 복이라는 것 한 톨까지도 전부 빼앗아버린 것만 같았다. 경월의 신기는 더 이상 신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헛것과 잡귀에 고통 받았으며, 공선은 안 그래도 약하던 몸이 더욱더 약해지기만 했다. 결국 공선이 큰 병이 들어 앓아 눕던 날, 선호는 크게 마음먹고 마을로 나가 의원을 데려오거나 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경월은 그런 아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거의 정신도 차리지 못할 만큼 아파하는 며느리를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경월의 걱정과 달리 선호는 다행히도 약을 제대로 구해왔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을에 나갔다 온 선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을 분위기가 더 나빠졌습니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병력을 늘리기 위해 더 어린 소년들까지도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는데…이대로라면 저도……”
“그럴 수가…이 어미는 절대 반대다. 너를 그 전쟁 통에 내보내느니 차라리…”
“하지만 어머니, 전쟁에 자원하면 남은 가족들을 위한 식량과 재산을 지원해준다고 합니다. 선이도 저렇게 계속 아프고, 이도는 아직 어리니 저라도…”
“하지만…”
이도는 밤이 늦도록, 등잔불 하나만 켜 놓은 채 아버지와 할머니가 소리 죽여 대화하는 것을 이불 속에 숨어 엿들었다. 너는 이만 일찍 자라고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며 어머니 옆에 이불을 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도는 이상하게 말똥말똥한 눈을 반짝이며, 전쟁이니 보상이니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옆에 누운 어머니의 힘겨운 숨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아직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며칠 후 공선은 운이 좋게도 건강을 회복했다. 선호가 구해온 약이 차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선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또 다른 병치레를 할까 겁나 선호와 경월은 공선에게 당분간 집에서만 있으며 이도를 돌보는 데 전념하라고 했다. 어린 이도는 그저, 언제나 해가 뜨면 집을 나서 밭일과 논일, 심지어 열매나 나물 따위를 채집하러 산으로 쏘다니던 바쁜 어머니가 집에 있어 좋을 뿐이었다. 언제나 건강한 혈색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공선이 조용히, 그리고 나날이 수척해지는 것은 서너 살짜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
“어머니, 어디엘 가십니까? 할머니는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은 선호가 마을 장에서 어렵사리 구해온 쌀과 고기로 오랜만에 가족들이 배부르게 포식을 한 날이었다. 공선은 경월을 도와 고깃국을 끓이고 밥을 지었으며, 경월도 간만에 웃는 얼굴로 이도를 대했다. 언제나 찌푸린 얼굴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어린 손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무서운 할머니가 방긋방긋 웃자 이도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그녀들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난다. 평소와 달리 경월은 이도에게 매우 상냥했고, 공선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광주리 하나도 번쩍 들며 집안일을 도왔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우울과 긴장을 읽어내기엔 아직 이도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오히려 그날따라 선호는 아무 말도 없었고, 웃거나 찌푸리지도 않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어린 아들을 쳐다보았다. 이도는 그런 아버지가 어딘가 무서우면서도, 건강하게 움직이는 어머니와 밝은 얼굴의 할머니가 좋아 종종거리며 그녀들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음울한 눈이 자신을 쫓는 것을 무시하면서.
즐거운 저녁식사를 한 뒤 가족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할머니가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덩달아 졸려진 이도가 어머니의 저고리 깃을 꼭 쥐고 잠들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거의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한참 뒤 인기척에 눈이 뜨인 이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치 도둑처럼 조용히 짐을 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하느냐 묻자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무서운 사람들처럼, 그들은 재빠르고 소리 없이 보따리를 챙겼다. 그 모습은 이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부모의 모습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도는 잠을 뿌리치고 상체를 일으켜 다시 아버지, 어머니, 하고 불렀다.
“…아가, 나중에… 나중에 꼭, 다시 데리러 오마.”
“어머니, 아버지, 어디를 가요? 나도, 나도 데려가요.”
“할머니가 함께 있을 거야.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금방 다시 데리러 오마.”
망설이는 공선의 손을 잡아챈 선호가 이도에게 속삭였다. 공선은 차마 어린 아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절박하고도 순수한 얼굴로 부모를 연신 번갈아 보았다. 다시, 데리러, 온다. 그 말은 지금 자신과 같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어딘가로 가고, 나는 여기에 남는다는 뜻이었다. 어린 머리로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선호가 눈짓하자 공선은 망설이다가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기세에 작게 켜놓은 등불이 흔들려 선호의 등을 비춘 그림자가 크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이도에게는 무척 두려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방을 나서기 전, 잠시 몸을 멈춘 선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너를 버린 게 아니다. 어머니랑 아버지랑, 이도랑, 그리고 할머니랑 다 같이 잘 살려고…그래서 지금 떠나는 거야. 잊지 말거라. 우리는 꼭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할머니를 잘 부탁한다.”
“아버지, 저도 같이 가요. 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말 잘 들을게요. 울지도 않고 당과가 먹고 싶다고 조르지도 않을게요. 밥도 조금만 먹을 테니까, 저도 데려가세요. 예?”
선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어린 이도의 눈에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이, 어린 아들을 숨겨두고 잠시 도망 길에 나서야 하는 부모의 타 들어가는 마음이 아닌, 그저 화가 나 일그러진 얼굴로 비쳤다. 그래서 이도는 더럭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가 나에게 화가 난 게 분명하다. 내가 못되고 나쁜 아이라서 나를 버리고 어머니랑 둘이서 도망을 가는 거다. 난 이대로 버려져서… 할머니가 없으면 나는…
“…약속하마. 꼭 너를 다시 데리러 올 거라고. 그때까지 이걸 가지고 있거라. 어머니가 내게 시집왔을 때 매고 있던 거다.”
선호는 보따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던, 어머니가 귀한 것이라며 가끔 꺼내어 보기만 하고 장 속에만 꽁꽁 넣어두었던 노리개였다. 어린 눈에 보기에도 귀하고 좋아 보여, 한 번만 갖고 놀면 안 되냐고 졸랐지만 유일하게 공선이 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곤 했다. 반짝거리는 자개와 금색과 자색 실로 만들어진, 언제나 이도가 가지고 싶어 하던 그 노리개. 이도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야, 꼭 기억하렴. 너는 신이 주신 아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과분한, 귀한 아이야. 어머니와 아버지는 너를 무척 사랑한다. 그것만은 꼭 기억해 주렴.”
“아버지!”
“절대 잊지 마.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잊지 말거라. 지금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지지만… 우리 집안은 언젠가 크게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너는 훨씬 더 훌륭하고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야. 그 누가 무시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귀한 운명을 타고난 아이야.”
선호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열린 문 사이로 휘영청 뜬 달이 남의 속도 모르고 밝기만 했다. 이도의 커다란 눈에 구슬같이 눈물이 맺혔다. 언제나 넓기만 했던 아버지의 등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그 사실을 의심하지 말되, 언제나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더 굳세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살거라. 너는 하늘이 주신 아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항상 너를 사랑한다는 걸 절대 잊지 말고 살아주렴.”
그것이 선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이도는 이불 속에서 흐느끼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문득, 옆자리에 누운 할머니가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쓸어주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는 그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도는 할머니인 경월의 손에 이끌려, 좀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자 경월의 고향인 무진에 도착했다. 그곳은 훗날 영신이 요양 차 방문한 마을이기도 했고, 또 영신과 이도가 처음 만나 친해진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중의 일이지만, 이도가 영신에게 깊은 연정을 품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
영신은 거의 밥 먹듯 이도의 집에 놀러 왔다.
정확히는 이도의 할머니인 경월을 보러 들르는 것이었지만, 이도는 그런 영신이 한편으로는 귀찮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영신의 공부가 끝날 때에 맞춰 서당으로 마중을 나와 있곤 했다. 이도의 집까지 가는 길 정도야 영신은 눈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경월은 굳이 이도를 시켜 영신을 마중 나가게 시켰다. 어차피 이도가 땔감을 놓아주러 들르는 집들 중 영신이 다니는 서당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영 헛걸음은 아니었다. 훈장 영감은 무뚝뚝한 면은 있었지만 이도 같은 이들에게는 꽤 잘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특히 새로 땔감을 배달하러 왔다며 처음 인사를 드리던 날, 훈장은 드물게도 그 눈가 주름이 활짝 펴지도록 눈을 크게 뜨며 이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렇게 어린애가 벌써부터 나무일을 한단 말이냐,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혼자 헛기침과 한숨을 반복하던 영감은 이도가 야무지게 지고 온 땔감들을 창고에 부려놓자, 자신의 옷 안쪽에 숨겨두었던 약과 하나를 건넸다. 훈장 영감은 이도가 나이에 비해 똘똘하고 야무진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고, 이도가 가끔 그가 글을 외는 방 앞에서 몰래 귀를 기울이며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그려본다는 것을 알았다. 훈장은 다른 돈을 내고 공부를 하러 오는 아이들과 똑같이 이도를 대해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도가 서당 개 노릇을 한다는 것을 눈감아줄 정도는 되는 사람이었다.
서당을 파하고 다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간 후, 마지막까지 남아 질문을 하던 영신은 문밖에 이도가 와 있다는 부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당을 나서는 영신을 배웅해 주러 나온 훈장 영감에게 이도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리곤 영신의 앞에서 멀찍이 떨어져 먼저 걷는 이도를 보며 영신은 물었다.
“얘, 이도야, 너도 서당엘 다니고 싶니?”
“그런 곳에 제가 다녀서 무얼 합니까?”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지는 않으니? 글을 배우는 것 말이야.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글을 배우면, 거의 모든 책이나 글을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된다고. 나도 지금은 어려워서 나머지 공부를 하긴 하지만… 너보다 어린 애도 지난달부터 글자를 배우러 새로 왔단다.”
“제가 글을 배워서 어디에 쓰겠으며, 오히려 그런 걸 배워서 화를 부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자꾸 귀찮게 하지 마시고 조용히 따라오기나 하시죠.”
“…내가 할머니께 말씀드려볼까?”
이도는 걸음을 멈췄다. 영신도 덩달아 걷던 발을 멈추고 소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이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분명히, 뭔가를 참는 듯한 말투였다.
“…제발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 마세요.”
내내 종알거리던 영신은 입을 다물었고, 이도와 영신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얼마간 떨어진 채로 조용히 숲길을 걸었다.
그 무렵의 이도는 영신에 대해 여러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도는 영신이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싫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도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전부 뭔가를 바라고 있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새벽 그의 부모가 이도를 할머니 곁에 놔두고 사라진 후부터, 그리고 경월의 고향에서 낯선 마을에 적응하며 푼돈을 벌기 위해 되는 대로 잡일을 배울 때부터, 부질없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남들의 곱지 못한 시선과 한편으로는 동정 섞인 시선이 어린 시절의 이도를 자라게 했었다. 그런 어두운 감정들은 독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이도를 성장하게 했다. 부정적인 외부의 압력에 반항이라도 하듯 이도는 더욱 속이 깊고 진중한 성격으로 자랐지만 그것은 정말로 독과도 같아서, 소리 없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새에 아주 조용히.
부모의 부재에 따른 세상의 시선으로 어린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고 할머니는 믿음직한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부모의 얼굴은 이제 가물가물해지고 자신을 버리고 가던 뒷모습만이 선연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린 녀석이 할머니와 먹고살아보겠다고 궂은 나무일이나 잡일, 잔심부름도 해내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찼다. 일부는 불쌍하다며 이도에게 일거리를 나눠주었지만 재수가 없다느니, 어린 녀석이 되바라지다느니 하면서 밀쳐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일을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한 명분의 몫을 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결국에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보다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는 일이, 식용 뿌리를 캐고 열매를 따고 산짐승들과 가끔씩 교감하며 쏘다니는 일이 이도에게는 더 즐겁고 편한 일이 되었다. 공부를 하고 글을 배우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공부는 돈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읽어서 뭐에 쓴단 말인가. 더 복잡하고 힘든 일들, 굳이 이도가 알지 않아도, 이도에게까지 닿지도 않을 일들에 대해 굳이 알아내서 뭐가 좋단 말인가. 그런 것들은 당장 고픈 배를 채우게 도와주지도 않았고, 갈증으로 마른 입을 단물로 적셔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영신은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셌다. 훗날 이도는 그런 영신의 고집 센 모습마저도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 영신은 경월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경월은 이도를 불러 사흘 후부터 서당에 가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할머니?”
“잔말 말고, 그런 줄 알고 있거라. 공부하면서 필요한 붓이나 종이는 영신 아씨가 쓰던 것을 나눠준다는구나. 이제 아침에 같이 서당에 가고, 집으로 올 때도 같이 오면 되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