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50화 (150/166)

“제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왜 그 아씨가 쓰던 걸 씁니까?! 그리고 돈이 어디서 나서 그 비싼 서당엘 다녀요?! 돈이 어디서 막 굴러 들어온답니까?”

이도는 처음으로 경월에게 벌컥 화를 냈다. 경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 썩을 놈아, 할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나 죽어 없어지면 너는, 너는 혼자 무얼 하며 살려고 그러느냐! 평생 이 할미처럼 까막눈으로 살면서, 남의 수발이나 들고 심부름이나 하고 돈에 종종거리면서 사느니, 글줄이라도 읽을 줄 알아야 훨씬 인생이 나아진다는 걸 왜 몰라! 돈은 네가 걱정할 거 없다. 그 정도 돈이야 내가 금방 마련할 수 있으니까.”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무슨 돈을 구합니까? 혹시 그 아씨가 이상한 말로 할머니를 꼬드긴 거면…”

“예끼, 말조심해!! 네가 함부로 말할 그런 분이 아니야, 그 아가씨는! 그리고 그 아씨가 한 말이 다 맞다. 너는 아직 어리니 무당질이나 하며 사는 노인네의 손자로 괄시나 받으면서 살 수는 없다. 그건 네 아비와 어미에게도 못할 짓이야. 네가 우리한테… 우리한테 어떤 아이였는데… 그런 궂은일을 하면서…”

경월은 갑자기 목이 메는지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그녀의 기침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에 도진 고질병 때문인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도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선 뒤 부뚜막 위로 내려가 통에 퍼 왔던 물을 한 그릇 떠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경월은 가쁜 숨을 가다듬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

“…이도야. 네 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있는지 이 할미도 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언젠가 더 나은 날이 필시 올 것이야. 이거 하나는 믿어주려무나. 이 세상의 사람 모두가… 모두가 너를 멸시하고 비웃어도, 너는 그런 비참한 짓을 당해도 될 아이가 아니다. 지금은 아무리 힘들어도… 적어도 나와 네 어머니, 아버지는 온전히 너의 행복만을 위하고 있다는걸… 콜록, 콜록!”

경월은 다시금 기침을 했다. 이도의 커다란 눈망울이 원망과 슬픔,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도는 알고 있었다.

경월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그래서 더 성질을 부리고 난폭하게 군 것이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마저 죽으면 나는 어떡하냐고, 할머니마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 세상 천지에 오직 나 혼자만이 남는 일인데. 아직 죽지 말라고, 나를 혼자 두고 할머니마저 가지 말라고. 이도는 갓난아기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 티끌만 한 자존심이 대체 뭔지, 아직 어린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 꿋꿋하게 울음을 참았다. 눈물이 스며 나와도 기어코 입으로 울음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경월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그래서 더욱 마른 가슴을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공부를 하거라.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더 보고, 듣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보거라.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라. 너는 무엇이든지 잘 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하고 의미 있는 사람이 될 것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할미는 알았다. 그러니 절대로 꺾이지 말고, 남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결국 이도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월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린 손자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도는 할머니의 작은 품 안에서 눈물을 감추며 입술을 깨물었다. 꼭 성공하고 말리라. 많이 배우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서,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야 말 것이다.

어린 시절, 이도는 할머니의 품속에서 그런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세 달 후 경월이 숨을 거두고, 찾아와주는 지인들 없이 홀로 옆집 영감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장례를 치르면서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도는 그 뒤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우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도를 영신은 말없이 도와주었다.

***

“…그러고 보니… 그런 시절도 있었네.”

“예? 뭐라고 하셨어요?”

“…됐다, 임마.”

혜리가 싱겁다는 얼굴로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 앉은 혜리의 손끝이 벽을 통과하면서 희게 빛나고 있었다. 갈 곳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 영혼을 하나 거두게 된 이도는, 내가 어쩌다 이런 보모 노릇을 하고 있나 잠시 자책했다. 난데없이 영결화靈結化는 왜 배우고 싶다고 난리인 건지. 저 멀리서 학교가 끝난 건지, 책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다렸던 그 소년도 그 특유의 시무룩하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학교를 나서고 있었다. 그다지 특출나게 잘난 얼굴도, 키가 큰 것도, 화려한 인상을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한 소년. 어찌 보면 유약해 보이는 인상마저 가진, 조금 빠른 걸음걸이를 가진.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 어디에서도 이도는 영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어, 저기 영서다!”

“오늘 야자 아니었냐?”

“영서는 학원 때문에 야자 안 해요.”

“그랬나.”

혜리는 옥상 위에서 풀쩍 사라지더니 어느새 영서의 옆에 가 있었다. 이도는 그대로 옥상 난간에 걸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이 흩날릴 일이 없는데도, 이도는 자신의 몸이 흔들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서야, 하고 부르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까만 뒤통수가, 고개를 돌려 혜리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흰 소년의 얼굴이 목련 꽃이 피듯 탁, 하고 밝아지는 게 보였다.

“…언제 봐도 참 닮았단 말이야.”

이도는 웃을 때마다 꽃봉오리가 활짝 열리는 것 같던 그리운 얼굴을 하나 떠올렸다. 언제나 그렇게 웃기만 하면 좋을 것 같았던. 더는 울 일도 없게. 하지만 이도는 목련 꽃이 얼마나 나부끼는 바람에 쉬이 떨어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금방 짓밟혀버리는지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이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그 웃는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이란 때때로 야속해서,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 것은 도저히 기억이 안 나곤 한다.

이도는 왠지, 아주 오래전 자주 태웠던 담배가 그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호와 공선은 경월의 죽음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그녀의 장례가 끝나고 한 달 후에 이도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도는 처음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이도가 그들과 헤어졌던 나이의 딱 곱절을 더 먹을 만큼 시간이 흐른 탓도 있고, 선호와 공선이 이전과는 다르게 확연히 나이가 들어 보인 탓도 있을 것이다. 자식을 낳고 고생을 해도 앳된 티가 남아있던 얼굴은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 상해 있었다. 그러나 이도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보고 눈물을 터뜨리는 것은, 매서운 세월에 가려질 수 없는 일종의 어미로서의 본능이었다. 공선은 들고 있던 보따리를 떨어트리고 한 걸음에 다가와 이도를 끌어안았다. 첫인상에 그들이 자신을 두고 간 부모라고 알아볼 수 없었던 이도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훅, 하고 끼쳐오는 익숙한 체취와 이름 모를 감각에 등줄기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손이 먹먹하고 발밑이 푹 하고 꺼질 것 같았다. 자신을 붙들고 울기 시작하는 여인의 몸은 기억보다 더 마르고 가냘펐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공선을 끌어안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더 칙칙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허름한 차림을 한 남자가 서서 모자를 지켜보았다. 이도가 아버지, 하고 작게 부르자 고생과 시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곧 그 얼굴은 수년 만에야 처음 펴진다는 듯, 천천히 표정이 바뀌었다. 선호는 공선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울고 있었다.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분명히,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이도는 어느새 자신의 눈에 가득 찬 눈물 때문에 얼룩진 시야로, 그가 결국 우는지 아닌지 볼 수 없었다.

경월이 무덤에 묻히고 한 달 후, 그녀의 무덤 풀 위에 작은 흰 꽃이 피었다.

“아기씨, 영신 아기씨!”

“어디 계세요, 아씨!”

유모와 몸종 아이 하나가 혼비백산한 상태로 온 거리를 뒤지고 있었다. 언제나 점잔을 빼며 양반집 주인을 모신다는 걸 온몸으로 티 내고 다니던 유모는 곱게 틀어 올린 머리가 흐트러져 잔머리가 삐져나온 것도 모르는지, 허둥지둥 길거리를 헤매며 누군가를 간곡하게 찾고 있었다. 그 옆에서 같이 따라다니며 연신 아기씨를 외쳐대는 몸종 아이 또한 어린 나이에도 새초롬한 구석이 있어, 제 주인아씨 곁에 졸랑졸랑 붙어 다니며 괜히 누가 말을 걸세라 먼저 앞을 막아서며 엄포를 놓곤 하는 되바라진 아이였다. 그들이 찾는 아기씨란 바로 문 영감 댁 외동 손녀 영신을 의미했다.

문영신.

조부모가 계신 시골 무진으로 요양 차 이사 와 지내기를 5년, 올해 열다섯 살이 된 소녀.

“영신 아씨, 또 어디 숨어 계세요~?”

“아기씨! 아휴, 이번엔 어디를 가신 거람!”

15살이 된 후, 영신의 새로운 취미는 ‘가출’이 되었다.

“…갔나?”

“갔습니다.”

“다시 한번만 봐줘.”

“정말 갔어요.”

“정말이지?”

지푸라기로 엮은 빈 쌀가마를 덮은 채, 눈만 빼꼼하게 내놓은 영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엌 아궁이 옆쪽에 쌓아둔 빈 쌀가마와 멍석 더미에 몸을 숨긴 영신의 팔을 잡고 일어나는 걸 도와준 이도가 한숨을 쉬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누님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코흘리개 아이들처럼 술래잡기를 하고 논답니까? 어차피 동네에서 누님이 숨을 만한 곳은 유모 아주머니가 다 꿰고 계신데, 못 찾으면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올 게 뻔한 것을…”

“그러니까 그전에 다시 나가면 되지! 아무튼 숨겨줘서 고마워,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들고 올게!”

“그러게 됐대도…”

이도는 무뚝뚝한 말투로 중얼거리면서도, 영 싫지는 않은지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영신을 배웅해 주었다.

공선과 선호는 경월의 장례를 치른 후 이도를 찾아왔고, 셋은 다시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도는 또래보다 훨씬 무럭무럭 자라 언제나 제 나이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고,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짐짓 어른스러운 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도가 열두 살이 되자 언제나 영신보다 작았던 키는 드디어 영신을 뛰어넘었고, 껑충하니 먼저 커버린 키를 열심히 따라잡기라도 하듯 자잘한 근육도 붙어 열두 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장성한 소년이 되었다. 영신은 항상 자기보다 작던 꼬맹이가 어느덧 자신의 키를 따라잡자 내심 심술 맞은 얼굴을 하다가도, 이전보다는 자신과 더 어울려주고 놀아주는 이도와 함께 산이며 들, 동네 구석진 곳까지 이곳저곳 쏘다니며 놀러 다니기 바빴다. 이도는 지난해에 영신과 같은 달에 서당을 졸업했고, 다시 터를 잡아 조그마한 땅이나마 농사를 시작한 선호를 도와 나무일과 농사일, 게다가 공선 대신 집안일까지 동시에 돕고 있었다. 공선은 여전히 몸이 약했지만 예전처럼 다시 웃는 얼굴로 잔소리를 하며 조금씩 삯바느질이나 집안일을 도울 수 있었다. 영신을 처음 보았을 때 공선과 선호는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았으나, 곧 영신이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말벗이자 제자 노릇을 했다는 것과, 자신들이 없을 때 이도를 많이 도와주고 곁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무척이나 영신을 환대했다. 게다가 공선은 지금은 처지가 많이 나빠졌지만 본디 태어나길 양반집 규수였던 몸인지라, 영신을 매우 예뻐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자주 떨곤 했다. 영신의 집안은 공선의 처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명망 있는 집안이었지만 영신은 언제나 겸손했고, 그 나이 대 그만한 집안의 여식이 흔히들 그러는 것처럼 얌전을 떨거나 새침을 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자잘한 사고를 치며 이도와 놀러 다니거나, 유모에게 크게 혼날 것 같은 날이면 아예 집을 나와 혼자만의 공간에 쏙 숨어 있다가 해가 질 무렵에나 슬쩍 나와 이도의 집 문을 두드리곤 했던 것이다. 민망한 웃음을 짓는 영신에게 다 큰 처녀 운운하며 잔소리를 하기보다, 공선은 언제나 따스하게 웃으며 그녀를 딸처럼 대해주었고 그것은 무뚝뚝한 선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부모의 반응과 자연스럽게 구는 영신의 태도에 껄끄러워하는 것은 오히려 이도였다.

“영신 누님, 이제 슬슬 철이 들 때도 된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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