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 얘기니? 나보다 어린 게 까불어. 왜, 너도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인간한테 냉큼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말은 아니잖습니까! 나는 그저…”
이도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늙은 소에게 먹이던 여물을 한 아름 안아다 여물통에 집어넣고 외양간의 문을 닫은 후 대꾸했다.
“저는… 영신 누님이 시집이나 가서 누군가의 아내로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또 모르지. 멋지고 잘생긴 데다 나한테 잔소리도 별로 안 하는 장군님이 있으면 덥석 시집가버릴 지도.”
“…제 말은 진지한데요.”
“아무튼 나는 당장 누구랑 혼인을 올리거나 할 생각은 없다는 거야. 우리 유모 봤지? 올해 들어 아주 나만 보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 큰 아가씨가 그러면 안 된다, 이러면 안 된다. 복도에서 뛰면 안 돼, 밥을 먹을 때도 빨리 먹으면 안 돼, 흙바닥에 함부로 내려가도 안 돼… 대체 왜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은 거래?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전부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들이, 이제는 내가 나이를 먹었으니까 하면 안 되는 거래. 위신이 안 산다나 뭐라나.”
“저는 천한 것이라 그런 고민은 별로 공감이 안 되네요.”
“또, 또 그런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왜 자꾸 스스로를 천하니, 못난 놈이니 그렇게 부르는 거니? 신분이 그렇다지만 자기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하면 못써. 남들은 뭐라 할 수 있어도, 두고 봐, 언젠가는 그런 고리타분하고 비합리적인 신분 같은 것도 쓸모 없어지는 날이 올 거야.”
이도는 가끔 영신이 하는 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비록 같은 서당을 다니고 둘 다 공부를 잘했지만, 영신은 그런 공부나 성적과는 다르게 어딘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밤을 새워 글자를 외우고 숙제를 하느라 낑낑대던 것과는 달리 영신은 언제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영신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 순간이. 이도는 누가 뭐라 해도 영신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형제와 같은 관계였고, 그리고 또… 아무튼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건 이도도, 영신도, 심지어 그들을 보는 다른 어른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도는 종종 조바심이 들었다. 영신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 분명 언제나 같은 동네에 있고, 매일 얼굴을 보고, 지금도 옆에서 자신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 발 장난을 치고 있지만, 정말 이상하게 어느 순간 훌쩍…
그렇게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다시 한양으로 가기 싫다.”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도는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지게와 날붙이들을 정리해 광 안쪽에 넣어두었다. 그가 뒷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영신이 불쑥 물었다.
“이도야, 그때 우리가 본 것, 기억나니?”
“무엇 말입니까?”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알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본 것, 이라고 하자마자, 이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아직도 생생했다.
그 습하고 축축하던 우물, 손바닥에 닿았던 차갑고 습한 우물 벽, 빛이 들지 않아 잘 보이지 않던 어두컴컴한 그 안쪽, 그리고 끝도 없이 흘러나오던 검은 머리카락.
“…아니다, 됐어.”
영신은 싱겁게 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는 들고 있던 호미의 손잡이를 꾹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마당에 드리운 땅거미가 짙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에 대해 잊을 수 있겠는가.
“…있지, 이도야.”
“예.”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것… 전부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아.”
할머니가 영신에게 뭐라고 말을 한 것일까. 이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신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듯 치맛단을 탁탁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걸어 나갔다.
“내일 또 보자.”
영신은 언제나 했던 인사를 건네며 살짝 웃어 보이곤 낡은 대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도는 다음 날, 그다음 날, 그다음의 다음 날도 영신을 볼 수는 없었다.
“그거 들었어? 문 영감 댁 손녀 말이야, 이름이 영신이었던가. 오늘 아침 꼭두새벽부터 급하게 짐을 싸서 한양으로 돌아가 버렸대.”
“갑자기? 문 영감이 많이 적적해하시겠네. 그 아가씨 참 밝고 예의 바르고, 양반이라고 재는 것도 없이 아주 착했는데.”
“원래 몸이 안 좋아서 요양 차 와 있었다고 했던가. 올 때도 기별 없이 갑자기 오더니 갈 때도 갑자기 훌쩍 갔네.”
“옆집 만수가 새벽에 물 길러 가다가 봤다는데, 옷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가마를 지고 와서는 한양에서 영신 아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하고 문 영감 댁 문을 두드리더라는 거야. 그중 한 비단옷을 입고 갓을 쓴 사내가 문 영감한테 서찰 하나를 전해주더니, 문 영감도 그걸 읽고는 아무 말 없이 손녀를 보내버렸다고 하던데.”
“아유, 이제 동네가 다시 적적해지겠구만.”
***
이도는 그저 살았다. 딱히 변할 것은 없었다.
영신이 왔던 것처럼 다시 갔다고 해서 이도의 인생이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뒤뜰에 난 풀을 베어 소를 먹이다가, 이제는 가지 않게 된 우물 터를 빙 돌아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 터로 가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물을 길어오다가, 그저 그렇게 한 번씩, 생각하는 것이다.
인사 한 번 하고 갈 수는 없었나.
가면 간다고, 그냥 한 마디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면 되는 일 아니었나.
그러나 들리는 얘기로는, 영신 그녀도 사정을 미리 전해 들을 수는 없었던 모양일 테니 이제 와 원망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이도는 생각했다. 영신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이 곧 무진을 떠나고, 이도 곁을 떠나게 될 것을 영신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영신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사그라져갔다.
“이도야, 아직 안 자고 뭐 하느냐?”
달이 흉흉하게 밝아 잠 못 이루던 밤이었다. 이도는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아예 자리를 제치고 일어나 등불을 켜고 글을 읽던 참이었다. 서당을 졸업한 지 한참 되었지만 훈장 영감은 아직도 이도를 보면 제 손자를 대하듯 등을 툭툭 쳐주거나 남들 몰래 책 한 권씩을 쥐여주곤 했다. 아직 형편이 어려운 이도가 마음껏 장에서 서책을 사다 읽거나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책은 때로는 남녀 간의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책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서당 시절 배웠던 옥편을 펴놓고 글자를 찾아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글자들로 쓰인 책도 있었다. 어느 책이든 이도는 고단한 일 사이에 짬을 내어 읽을 수만 있다면 좋았다. 영신과 죽은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글을 배우고 서당을 다니기는 했으나, 이도는 아직도 스스로가 신분도 없는 천민이기 때문에 글을 배워 이것으로 어찌해볼 작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한 일상에 짬짬이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책들을 읽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아… 잠이 안 와서, 글을 좀 읽고 있었습니다.”
자다가 깬 건지, 아니면 이도처럼 영 잠에 들지 못한 건지 공선이 피곤한 얼굴로 이도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도와 할머니가 같이 살던 집은 낡기는 했으나 선호와 공선이 온 후 나름대로 집을 수리하고 집을 정돈하니 세 가족이 살만한 공간이 되기는 했다. 게다가 이도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선호는 아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방을 갖는 게 좋다고 판단해, 원래는 창고로 쓰던 딸린 방을 비워 작게나마 이도를 위한 방을 만들어주었다. 낮에 같이 식사를 하거나 생활을 할 때는 큰 방에서 부모와 지내는 이도였지만, 혼자 공부를 할 때나 잠을 잘 때는 자신의 방에 붙박여 지내곤 했다. 이도의 이부자리와 작은 앉은뱅이책상, 등불 하나만으로도 작은방은 거의 꽉 차는 정도였기에, 작은 몸집의 공선조차도 애매하게 다리를 접은 채 앉아야만 했다. 이도가 옆으로 책상을 치우자 공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한양으로 간 영신이 말이다.”
“…예.”
이도는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영신이 말없이 한양으로 돌아간 후, 이도는 아주 미묘하게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부모인 공선과 선호는 아들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한양에서, 너한테 서찰이 왔단다.”
공선이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품 안에서 꺼내 이도에게 내밀었다. 겉에는 아무런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도가 서찰을 펼치자 안에는 낯익은 글씨로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고, 보낸 이의 이름 또한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도는 글씨체의 주인이 누구인지 한 눈의 알아볼 수 있었다.
삼 년 동안 같이 서당에 다니면서 옆에서 봐온 글씨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이도는 잠시 종이와 공선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그것을 곱게 접어 책상 위로 밀어두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서찰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영신이 보낸 게지?”
“……예.”
공선은 답지 않게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등잔불이 어른거리며 그녀의 마른 등 위로 그림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