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예전부터 얘기한 거지만… 아무래도 이도 너를 한양에 보내는 게 맞는 일인 것 같아서 말이다.”
“한양에요? 왜요?”
“…사실 너한테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공선을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경월이 죽기 전, 아직 그녀가 위급하다는 것을 선호와 공선이 몰랐을 때, 그들은 어느 날 밤에 어느 나그네 한 명이 자신들에게 전해준 서찰을 받았다고 했다. 이름도 본적도 숨기고 그저 되는 대로 일을 하고 옮겨 다니며 살던 때인데도 그들이 사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나그네는 그저 훌쩍 서찰만 건네주고 다시 떠났다고 했다. 그는 경월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는데, 자식 부부가 어디에 사는지는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서찰을 열어보자 단정한 필체로 경월의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경월이었기에 아마 심부름꾼에게 대신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필체는 낯설었지만 그 안에 담긴 글을 누가 읽어도 경월의 말투였기 때문에. 선호는 울컥하는 기분에 천천히 서찰을 읽었고, 사실 그마저도 모르는 글자가 많아 공선이 대신 글자를 짚어가며 읽어주었다.
경월의 편지는 그동안 이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영신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우물 터에서 겪었던 일도 전부 다.
선호와 공선은 그제야 이도가 선천적으로 귀鬼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이 낳은 자식이지만 언제나 보통 인간과는 달랐던 느낌을 받은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서찰에는 경월이 그동안 이도를 어떻게 지켜왔는지, 그녀 나름대로 할머니로서, 또는 무당으로서 그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을 충격에 빠트린 이야기가 더 있었다.
‘나는 그 애를 사람들로부터 지킨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을, 그 애로부터 지킨 것이다’
‘영신이라는 아이가 그 애를 도와줄 수 있을 거다’
경월은 이도가 태어날 때 자신이 꿨던 꿈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고 했다.
이도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것 안다. 너를 키우면서… 이상한 일도 많이 있었지. 그럴 때마다 나와 아버지는 너무 힘들었고… 그런데 네 할머니는 너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보신 거야. 그 마음이 어땠을지는 우리도 잘 알아. 그리고 다름 아닌 내 아들이, 우리 자식이 그런…”
“…잠시만요, 어머니. 그러니까… 제가…”
“……못난 어미를 용서하렴.”
공선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이도는 다시, 8살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
경월이 처음 이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도가 막 걸음마를 뗐을 무렵이었다.
“아가, 어디 있느냐? 아이고, 방금 전까지 여기 앉아있던 애가 어디를 간 거람…”
부엌에서 밥을 짓던 경월은 자식 내외가 산으로 쑥을 캐러 간 동안 혼자 어린 손자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밥 지을 물이 떨어져 마당으로 나가 바가지에 물을 퍼 오는 동안,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루 밑에서 조약돌 몇 개로 장난을 치던 아이가 사라진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나 싶어 문을 열어봐도 집 안에는 낡은 이불과 개다리소반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뒷마당으로 갔나. 경월은 집 뒤꼍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여전히 이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새 집을 나갔을 리도 없고. 분명 경월이 앞마당에서 물을 퍼 왔으니 대문을 열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 대체 그 어린아이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아가, 얘, 이도야, 어디…”
경월은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에 이도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길을 멈췄다.
잘못 본 것인가. 경월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아가!”
비명과 같은 날카로운 부름에, 아이는 천진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이는 다시 아장아장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이도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처럼 허공의 한 지점을 빤히 올려다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양 팔마저 벌린 채로 종종 걸어가는 아이의 앞에는 거대한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월과 그녀의 가족이 사는 낡은 집 뒤쪽으로는 산으로 올라가는 험한 바위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바위들을 사이에 두고 정돈되지 않은 오솔길과 나무들이 들쑥날쑥하게 자라 있었다. 어른이 걷기에도 경사가 위태롭고 돌이 많은 데다 길이 험해 산길에 능숙한 선호도 굳이 그 길로 다니지 않을 정도였다. 그 나무들 중 가장 커다랗고 제일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경월은 언제나 그 나무를 보면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운 기분과 음침한 기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꺼려 했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아들 내외도 그 나무는 이상하게 가까이 가면 한여름에도 유독 서늘한 기분이 든다고 할 정도였다. 경월은 가끔 삿된 것들을 보기도 했지만, 차라리 흐릿한 형태만 눈에 보이는 것이 낫지, 그 나무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계속 사람의 마음을 찜찜하게 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언젠가는 뒷마당에 있는 장독대에서 장을 퍼내다가, 시야 끝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게 자꾸 스치듯 보여 고개를 들어보면 언제나 그 나무가 눈에 걸리곤 했다.
솨아아아-
바람이 불고 경월의 창백한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어린 손자는 마치 누군가에게 안아달라고 하듯 팔을 뻗은 채 웃는 얼굴로 그늘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늘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 뒤에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가!”
경월은 들고 있던 바가지를 팽개치고 달려 나가 아이를 낚아채듯 안아 들었다. 어린 이도는 영문도 모른 채 칭얼거리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자꾸만 나무 뒤로 손을 뻗으며 쳐다보는 모습에 경월은 소름이 돋았다. 애써 고개를 숙이고 나무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경월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림자가 울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이도를… 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절대 그것을 보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품 안의 아이는 자꾸만 뭐라고 옹알대며 팔을 뻗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나무 그늘이 코앞이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경월의 시야 끝자락에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경월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경월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그것의 신발 끝도 한 발짝, 하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경월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신는 짚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발이 아니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두 발의 양옆으로, 퉁퉁 부은 채 시퍼렇게 변한 두 개의 손이 동시에 바닥을 짚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두 개의 발과 두 개의 손.
평범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것.
경월은 절대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며 뒷걸음질을 해 나무 곁을 떠났다. 그 손과 발은 그늘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마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늘을 경계로 양옆으로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치고 속이 울렁거렸다. 다시 한번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탁탁탁-
충분히 나무와 거리를 벌리자, 경월은 몸을 돌려 아이를 안고 집으로 뛰어갔다. 대문을 닫고 방문을 걸어 잠근 뒤 경월은 놀란 속은 추스르려 떠다 놓은 물을 들이켰다. 손자는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제 손가락을 빨며 경월의 소매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월은 갈수록 신경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전에도 자신의 신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고, 꿈을 꾸던 적이야 많지만, 지금은 그 빈도와 느껴지는 기운의 종류가 확연히 달랐다. 거의 매일 같이 집 근처에서 목격되는 것들을 못 본 척하며 외면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보는 것 자체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월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천진한 얼굴로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는 어린 손자였다.
그러던 중 경월은 어느 날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