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경월이 할 수 있는 조치와 그녀의 힘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왜 갑자기 이렇게 그것들이 많아진 것인지 경월은 근본적인 이유부터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출몰하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또 마을이나 산이 아니라 주로 자신의 집 주변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점점 좁혀져 가는 가설 중 하나를 경월은 이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이도가 태어난 후를 기점으로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어린 손자가 평범한 팔자를 지니고 태어난 건 아니라는 것쯤은 다른 사람도 아닌 경월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월은 그전까지는 분명, 아니 이도가 걸음마를 떼고 그 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옹알이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경월은 그 작은 몸에 깃든 힘이 분명 아주 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월의 꿈에 나온 흰 용, 그가 경월에게 했던 말. 그 모든 것에서 느껴지던 상서로운 기운. 그것을 다시 떠올리자, 경월은 가슴이 선득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도를 중심으로 점점 좋지 못한 기운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경월이 이때껏 봐온 삿된 것들이나 잡귀들과는 결 자체가 다른 놈들이었다. 경월은 최근 극심한 무력감을 느낄 정도였다. 나름대로 잘 대처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뒷마당에서 이도를 끌어당긴 그 고목 사건 이후로, 경월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린 손자의 몸에 깃든 신.
그 투명하고 반짝거리던 흰 비늘과 푸른 불꽃같던 눈. 허나 용이란 예로부터 아주 대표적인 좋은 상징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분명 그 용은 상제의 이름을 거론하며 경월에게 ‘보답’을 하겠다고 했다. 경월은 잠든 손자의 이마를 천천히 쓸어 넘겼다. 손끝에 닿아오는 아이의 이마는, 또래 아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체온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경월은 천천히 손을 거두고 자신의 저고리 자락을 꽉 쥐었다. 며칠 내내 경월을 괴롭혔던 생각이 이제는 점점 몸집을 불려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삼켜버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이 잘못된 신을 받았던 게 아닐까.
아이는 커가면서 점점 튼튼하고 당찬 소년이 되어갔다.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을 좀 타기는 했지만, 이도는 항상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웃자란 면이 있이 경월을 걱정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경월이 제일 걱정하는 것은 이도가 끌어당기는 것들이었다.
경월은 점점 제정신으로 있는 때가 적어지고, 괴팍하고 날 선 노인으로 변했다. 이도는 그런 할머니를 묵묵히 보살피며 부모 없이 혼자 집안 살림을 꾸려갔지만, 경월도 경월 나름대로 고군분투를 해왔던 것이다. 도저히 경월로서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자의 눈에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완전히 그렇다고도 볼 수는 없었다. 산속 우물 터에서의 그 사건 이후로 이도의 귀문이 트여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미미하고 평범한 수준이어서 그저 보통 사람들이 나 귀신 봤다, 하는 정도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도는 경월이 보는 것들을 전부 보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경월은 점점 닳아가는 신경과 정신을 애써 붙잡으면서도, 그것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들을 보고 살아서는 결국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 그건 경월 하나로 족했다.
그런 경월에게 영신의 등장은 아주 뜻밖이면서도, 그러나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밤마다 천장에서 얼굴을 들이미는 녀석들을 무시하느라 매일 같이 푹 자기 어려웠던 경월은 영신을 만나기 며칠 전 간만에 푹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기분 나쁘지 않은 보통의 꿈을 꾸었는데, 그때 꿈속에서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 잠에서 깨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시 귀인의 모습을 미리 본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 경월은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영신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항상 조용하던 암탉이 청아한 소리로 길게 울던 날 아침, 경월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그나마 덜 낡은 옷을 꺼내 입었다. 그런 경월을 보며 이도는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곤 일을 하러 나갔지만, 경월은 개의치 않았다. 손님을 맞아야 하니까. 제일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말 그날 오후, 비단 옷을 입은 작은 소녀가 사뿐사뿐 그녀의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경월은 한눈에 영신을 알아보았고, 낯선 노인이 자신을 보고 아는 척을 하는 것에 놀랄 법도 한데 영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웃음 지으며 경월에게 다가와 답삭 안기는 것이었다. 경월은 속으로, 마치 관세음보살이 인간도에 내려온다면 꼭 그 자태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신은 한 마디로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경월은 자신의 힘과 수십 년 동안의 경험들이, 영신의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조금만 더 크고 자신의 능력을 다룰 줄 알게 되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될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경월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신은 훌륭하고 탁월한 대신 그만큼 위험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세상 천지에 무서울 것 하나 없이, 그 이름만 대면 조선 사대문 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는 집안의 귀한 외동딸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고생과는 담을 쌓고 지냈을 것인가. 그러나 경월은 곧 알게 되었다.
영신의 인생 또한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선이 남기고 간 편지는 두 개였다.
하나는 한양에서 온 영신의 것, 다른 하나는 오래전 공선과 선호가 이도를 두고 피난을 갔을 때 경월이 그들에게 보냈던 것.
공선은 이도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평범한 부모처럼 이도를 위해 든든한 부모가 되어줄 수 없어서.
아무리 돈이 없고 힘이 없어도 이 세상에서 너만은 꼭 지켜주겠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약속조차 함부로 할 수 없어서.
“……내가 …할머니를 괴롭게 했던 걸까.”
이불 위에 누운 채 이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서늘한 밤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내가 원인이었을까. 할머니의 그 모든 이상과 병에 있어서, 내가… 나 때문에?
아버지는 할머니가 원래는 그렇게 이상한 분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경월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이도가 태어나고부터였다. 점점 오락가락하는 그녀를 보며 이도의 부모는 경월이 결국 정신이 나갔거나, 나이가 들어 치매가 생겼다고 여겼다.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어린 자식과 치매 어머니를 둘 다 부양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버렸나? 할머니와 나를 버리고 가버렸나?
…아, 젠장.
또 그 생각이다.
이도는 이불을 얼굴 위까지 뒤집어썼다. 쓸데없는 생각이 들 때는 얼른 잠들어버리는 게 상책이니까.
“한양에 갈 겁니다.”
아침을 먹던 이도가 돌연 선언한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선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선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두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가서 어찌하겠다는 계획도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일단, 한양에 가서 영신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이도에게.
너에게 직접 말해야 할 것들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해 줘.
내가 기별도 없이 떠나게 되어 많이 미안할 따름이고, 나에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구나.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서툴렀고,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며, 게다가 할머니가 그리되시고 나서 더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주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나의 큰아버지 되시는 분, 이제는 나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 궁에서 큰 벼슬을 지내고 계시는데, 나이도 많이 드신 데다 요즘 많이 적적하신지 후계자를 두고 가르치고 싶어 하셔. 그러나 매우 엄하고 기준이 높으신 분이라 우리 가문은 물론 먼 친척의 남자아이들은 모두 그분 눈에 안 찬다고 하시더라. 그분께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큰 관심을 보이시는 거 있지. 큰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호랑이 같으신 분이지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너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던걸.
물론 네가 한양에 와야 하는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야.
돌아가신 할머니… 그분이 생전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셨고, 내가 은혜를 많이 입었지. 언젠가 할머니가 내게 말씀해 주신 것들을 이제 너에게도 전해줘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마 내 편지를 받았으니,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편지도 너에게 전해주셨을 거라고 생각해.
이도야.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아.
꼭 한 번 보자.
영신이.
◊
“…쟤가 이번에 새로 입소한 녀석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