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이는 지금 어디 있지?”
선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옥자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러나 바삐 방을 나서는 주인마님을 따라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나섰다.
“어머, 마님, 어쩐 일로 그리 급하게…”
선옥과 옥자가 영신의 방이 있는 복도 앞으로 막 모퉁이를 돈 순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진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눈치만 보고 있는 옥자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선옥을 번갈아 본 진례는 필시 옥자 이 년이 또 입 방정을 떤 모양이구나, 하고 눈치채고는 몰래 옥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선옥은 마룻바닥이 쿵쿵거릴 정도로 체통 없이 막무가내로 걷다가 누군가를 맞닥뜨린 것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다가 진례에게 물었다.
“유모, 영신이는 게 안에 있는가?”
“영신 아씨요? 예, 방금 전까지 깨있으셨다가, 막 잠에 드셔서 빨랫감 들고 나오던 참입니다.”
“…저…. 유모, 혹시 간밤에… 영신이가 내 방에 왔던가?”
“마님 방에요?”
진례는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옥자와 선옥을 번갈아 보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영신 아씨가 자다가 깨기는 했습니다. 아마 축시쯤이었나… 간밤에 아씨 주무시는 거 한 번 보고, 요강 갈아드릴 겸 방에 왔는데 번듯하게 깨서 앉아 계시는 게 아니었어요? 무얼 하시냐 물었더니, 마님이 부르셨다고 하던데. 아씨가 그냥 잠꼬대를 하신 건가요, 아니면 정말 마님이 부르셨던 건가요?”
선옥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진례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조마조마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난 부른 적 없네. 그 밤중에 애가 갑자기 깨서 혼자 나가겠다고 했는데, 자네는 그냥 도로 재우지 않고 뭣하러 내보냈는가?”
“아, 안 그래도 아씨가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시기는 했지만… 혼자 보낸 것은 아닙니다, 마님.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소인이 무슨 낯짝으로… 당연히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영신이가 어디를 갔나?”
“마님이 주무시던 안방 앞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진례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옥이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짓하자, 그녀는 주변 눈치를 보며 그녀들 외에는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것이… 소인이 봤을 때 뭔가 이상해서…”
“무얼 봤지?”
“…영신 아씨가… 한동안 마님이 주무시는 방 앞에 우뚝하니 서서 가만히 계시더군요. 왜 그냥 서계실까, 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씨가 방문을 스르르 열더니, 가만히 서서 방 안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뭡니까.”
“뭐? 왜?”
“아유, 저도 모르지요, 그런데 참말 이상한 게… 분명 우리 아씨가 맞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웃고 떼를 쓰며 나갔던 분이, 마님 이부자리 앞에서, 오도카니 서서 마님을 내려다보는데… 이상하게 모골이 송연해지지 뭡니까. 저도 숨죽여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안되겠다, 가서 그만하시라고 막아야겠다, 하는 순간에 다시 방문을 닫고 나오시더니, 그냥 뚜벅뚜벅 걸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 쭉 아침까지 푹 주무셨구요.”
선옥은 할 말을 잃었다. 영신이 간밤에 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이상한 잠버릇이나 자는 엄마를 한 번 보고 간 것이라고 치부할 법한 행동이었지만, 선옥에게는 아니었다.
밤새 자신의 방 앞에 서서 자신을 괴롭힌 그것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선옥은 눈을 뜨자 보였던 흰 두 개의 버선과 딸의 작은 발이 겹쳐 보였다. 그녀는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선옥은 바로 다음날, 영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용하다는 인물을 수소문해 데려오라 명했다.
그러나 선옥이 찾은 사람은, 이번에는 의원이 아니었다.
머슴이 데려온 노인은 아주 왜소한 체구에 안색도 거뭇하고 차림새도 허름한 작자였다. 이상하게 비실비실 웃는 모양도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데 도가 튼 사람처럼 보였다. 문승룡은 아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선옥은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필사적이었다. 노인은 이름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박수무당, 무당 노인, 박 거사, 더러는 그냥 산 오두막에 사는 미치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 거사는 집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에잉, 쯧. 물 비린내가 아주 고여서 썩다 못해, 아주 온 집안에서 흘러넘치고 있구만.”
누가 봐도 불쾌한 행색에 쾨쾨한 냄새마저 나는 초라한 노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서는 아무렇게나 대하기 힘든 기이한 기운이 잔뜩 넘실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그를 그저 미치광이나 괴팍한 노인 취급을 하며 자리를 뜨거나, 더 심할 때는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그만큼 아무도 박 거사를 살갑게 대해주는 법이 없었고, 그것은 처음 그를 마주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승룡은 기분 나쁜 노인네라며 대놓고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선옥은 담담한 얼굴로, 옥자의 미약한 만류에도 마당에 내려가 노인의 앞에 가 섰다.
“어르신, 제 딸이 많이 아픕니다.”
“이이, 그런 것 같소잉. 냄새가 아주 지독하다 못해 코가 떨어질 것 같구만. 안타깝지만 이 집 아기는 오래 못 살 거요.”
“……당신이 지난해에 건넛마을에 사는 김 진사 댁에서 했던 일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집 열 살 난 아들이 갑자기 어느 날부터 밤마다 깨서 물구나무를 서고, 마당에 나가 나무에 머리를 박고, 급기야 곡기마저 끊고 제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보고 포악해졌다지요. 어떤 의원도 그 애의 병을 낫게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당신이 그 애를 봐주자마자, 다음 날부터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노인은 코를 벌름거리며 흥흥, 하고 웃었다. 단아한 외모에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든 귀부인이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는 모습도 쉽게 볼 일은 아니었기에, 그도 원래였다면 잔뜩 어깃장을 놓고 침이나 뱉으며 그 집을 떠났을 테지만 조금 더 이야기나 들어볼까, 하던 참이었다.
“당연하지, 그건 병이 아니니 의원이 고칠 수 없었을 뿐이네.”
“저희 딸도 한 번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보상은 넉넉히 해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어르신께서 홀몸 건사하시며 남부럽지 않게 사실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듣기로는 산속에서 작은 오두막에 직접 꾸리며 사는 밭이 있다고 하시던데, 누가 침입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신다지요? 원하시면 온 고을에 명령을 내려 그 산 전체를 어르신의 토지로 임명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선옥의 담담한 제안은 확실히 노인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뒤에서 승룡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선옥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노인의 눈을 마주했다.
그깟 선산쯤은. 그깟 아무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 조상의 뼈와 시체가 묻혀 썩어가는 산 따윈, 내 딸 영신을 살릴 수 있다면.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동안 선옥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애매한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인의 거뭇한 얼굴이 불쾌할 법도 했지만, 선옥은 가지런하게 손을 모은 채 잠자코 있었다. 한참 후에야 노인이 입을 열었다.
“딸아이를 한 번 보여주게.”
집안사람들과 선옥, 승룡을 대동한 노인은 영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른 기침을 하며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방 한가운데에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에 인형처럼 누워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동그란 이마와 앙증맞은 콧날, 조용히 감은 눈과 꼭 다문 입술은 어린아이임에도 크면 꽤 미인이 될 상이라는 것과, 그리고 노인의 뒤에 서 있는 선옥을 꼭 닮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노인은 아이가 누운 이부자리의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불 위로 나와 있는 아이의 오른 손목을 잡고 맥을 짚던 노인은 아이의 이마와 코밑, 목과 머리통을 천천히 짚어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했다. 잠시 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영신의 방을 나왔는데,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노인이 절대 뒤를 보이지 않고, 누운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뒷걸음질을 쳐 방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하던 집안사람들 중 유모가 결국 참지 못하고 노인에게 물었다.
“이봐요, 어르신, 우리 아씨 상태가 대체 어떠하우? 뭘 좀 알긴 아시겠소?”
“으으음…”
노인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그 자리에 서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곧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저 아이는 죽을 거요.”
“뭐라고?!!”
“여보!”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승룡이 화를 벌컥 내며 달려들자, 선옥과 유모가 그를 간신히 제지하며 노인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았다.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는 남편을 머슴들을 시켜 멀리 떨어지게 시킨 선옥은, 숨을 가다듬으며 노인에게 정중히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 또한 바들바들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르신, 그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영신이가 죽을 거라니요.”
“말했잖아. 저 아이는 죽을 거야. 이대로 가다간 올해를 못 넘겨. 확실히 의원들이 고칠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네. 아주 지독한 신병인 것은 알겠지만…”
“그런… 하지만……!”
“이보시오, 부인. 나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이건……큼, 그래,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외다. 이 정도로 심한 건 나도 본 적이 없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저희보다는 더 아시는 게 있을 게 아닙니까? 제발 조금이라도 뭔가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지금 저희더러 생때같은 외동딸이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선옥은 이미 평정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손이 더러워지든 말든 노인의 낡은 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며 그녀가 간곡하게 청하자, 노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