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57화 (157/166)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꺼림칙한 얼굴로 선옥에게 무언가를 작게 얘기해 주었다. 필사적인 얼굴로 그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듣던 선옥의 얼굴이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래도……”

“확실한 방법은 아니오. 나도 전해 들은 것뿐이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네. 하지만 정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면…”

“아니… 하지만……그런……”

선옥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을 가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손끝이 차가워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옥의 복잡한 머릿속에서는 노인이 알려준 그 한 가지의 방법이, 점점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방문 너머에 누워 있을 어린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선옥은 심호흡을 했다.

“……하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그저…. 방법만, 알려주십시오. 정확히…어떻게 하면 되는지. 저희가 무엇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선옥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른 채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것은 안쪽에 들어가서 조용히 얘기해야겠네. 필요한 것들만 자네들이 준비해 주면 의식은 내가 진행하지.”

선옥은 떨리는 양손을 꾹 맞잡고는 눈을 감았다.

딸을 살리려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비록, 자신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의 자식들을 희생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영신은 한 달 만에 말끔하게 나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을 낫게 하기 위해 선옥과 승룡은 꽤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하지 않았다. 더 큰 대가를 요구했대도 그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노인은 한 달 동안 그들의 집 뒤쪽에 따로 마련된 별채에서 지냈다. 꼭 한 달이 끝나던 날, 영신은 마치 몇 달 동안 생사를 헤매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몰라보게 회복했다. 아이가 다 나은 것을 확인한 후 노인은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왔을 때처럼 다시 그 집을 떠났다. 떠나면서 그는 종이에 당부 몇 가지를 적어두고 사라졌는데, 선옥은 그 종이를 몇 번이나 읽고는 미련 없이 불에 태워버렸다.

“어머니, 어머니랑 아버지는 저랑 같이 가시는 게 아닌가요?”

“응, 어머니는… 나중에 영신이를 보러 또 가마. 아버지는 일이 바쁘셔서 그래. 가면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계시니 괜찮을 거야. 그렇지?”

“네에……”

영신은 전에 비해 많이 건강해졌으나, 미약할 정도로 피부와 호흡기가 약해져 있었다. 선옥은 어린 영신을 홀로 시댁이 있는 양평 무진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외적으로는 어린 딸이 아직 몸이 약해 동네가 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요양을 보내자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선옥이 당분간 영신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 선옥은 아마도… 자신이 앞으로 딸 영신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으리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매 순간순간이 그녀의 피를 말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선옥은 후회하진 않았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어머니 아버지 없어도, 우리 영신이 밥 잘 먹고, 응? 울지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예, 어머니.”

어린 딸에게 새 옷을 입혀 단장을 시킨 선옥은 머슴들이 가져온 가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주인마님의 분부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선옥은 알았다.

이대로 영신을 보내고 나면 자신은 영신을 이전처럼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무엇 하리. 선옥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영신의 손을 잡고 마루에서 일어났다.

어린 딸은 가마에 타고 가는 내내 몇 번이나 가림 천을 헤치고 고개를 내밀어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손을 빼고 흔들다가 같이 탄 유모에게 제지를 받기도 했지만, 영신은 선옥의 모습이 콩알만 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빼고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선옥과 승룡은 영신을 보러 아주 가끔 무진에 방문했다.

영신의 조부모는 자식 내외가 떨어져 삶에도 그들에게 자주 들르라거나 하는 눈치를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딸을 맡겨놓고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데 부모라는 것들이 한 번도 오질 않으니 심히 언짢아하곤 했다. 물론 그들은 손녀딸을 매우 예뻐했으나, 원래 살던 집에서 억지로 떠나와 부모와 생이별을 하다시피 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옥이 승룡에게 간곡히 부탁해 영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부모님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했던 까닭이다. 어린 영신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에 그저 부모가 일러준 대로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요양 차 온 것이라 대답할 뿐이었다. 무거운 벼슬을 내려놓고 산과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하던 영신의 조부모는, 아직 어리고 창창한 손녀가 원래 살던 큰 고을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영신은 무진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게다가 본가에서의 생활과 다른 무진에서의 일상을 사랑했다. 본가에 있을 때 선옥은 영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영신은 밥을 먹을 때도 고개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하나도 도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저 나중에 좋은 곳에 시집을 갈 때 보여드려야 한다며 그림을 그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이나, 하다못해 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궁중 예법과 온갖 양반집 규수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무진에서는 그런 것들이 필요가 없었다. 가끔 어머니 앞에서는 상상도 못할, 예를 들자면 신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 내려가거나, 할머니가 기르시는 복슬복슬한 개들의 털에 얼굴을 비비며 같이 어울려 논다거나, 뒷집 마당 앞에 열린 감나무의 감을 서리하려고 몰래 담장 위로 기어오른다거나 하는 것들을 하면서, 영신은 그렇게 수년을 보냈다. 게다가 이도를 만났다. 이도는 언제나 영신의 가장 가까운 친우이자 형제가 되어 주었다. 같이 서당엘 다니고, 영신이 버선발로 뛰어나오게 아침부터 놀자며 대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영신이 데리고 나온 개들과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고, 영신이 담을 잘 타고 오르도록 자기 어깨를 밟게 내어주기도 했다. 둘은 언제나 모든 사고를 같이 쳤고, 혼을 나도 같이 혼났다. 둘은 같이 공부하고, 놀고, 우스꽝스럽게 우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줄 수 있었으며, 별것도 아닌 일에 토라져 말싸움을 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서로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도토리를 주우러 가자고 했다.

언제까지나 끝날 것 같지 않던 유년 시절의 막이 내리고, 둘은 서로 가야 할 곳으로 흩어졌다.

물론 영신이 먼저 한양으로 다시 떠나게 된 것이 발단이었지만, 그것은 이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도는 영신을 만나기 전보다 더 메마르고 무뚝뚝한 소년이 되었다. 이따금씩 유별났던 친구와 마을 곳곳을 쏘다닌 어린 시절이 떠올라 조그맣게 웃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예? 영신 아씨의… 부모님이요?”

이도는 태국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늦은 밤, 처소로 이도를 잠시 불러낸 태국은 이미 반주를 많이 한 듯 불콰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봄까지가 딱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네, 그 아이는……그래서 그 애의 조부모께서도 홀로 남은 손녀를 위해 기껏 정리하고 떠나셨던 한양으로 다시 올라오시게 된 것이고.”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이도는 두 해 전에 영신의 조부모가 다시 무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다시 그 집의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그 집에 가는 것은 오로지 영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뿐, 다른 볼 일이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태국이 말한 것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혼란스러운 이도의 머릿속에 문득, 처음 한양에 올라와 영신과 재회했을 때가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병사였네. 아니, 병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도 사람을 시켜 많이 조사를 했었지. 하지만 누군가 억지로 해한 흔적은 없었어. 그저 조용히…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했네. 그때부터였어. 영신이 그 애가 조금씩 이상해지게 된 것이…”

태국의 이야기는 밤이 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도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아, 굳은 얼굴로 태국의 이야기를 전부 귀담아들었다.

영신은 열일곱이 된 후 이전보다 더 궁에 자주 출입을 하게 되었다.

영신이 다시 본가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부모는 영신을 반가이 맞아주었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자신이 집을 떠나기 전과 지금 사이에 몇 년의 간극이 있다는 것쯤은 영신도 모를 리가 없었다. 떠났을 때 자신의 나이만큼 집을 떠나왔던 것이다. 당연히 어렸을 때 기억에 남아있는 뒷마당에 핀 금목서나, 집 담장을 따라 심겨 있던 작은 달맞이꽃 무리들, 심지어 자신이 지내던 방마저 무언가 바뀌어 있음을 영신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연히 달라진 것은 영신을 대하는 승룡과 선옥의 태도였다. 그간의 세월 동안 그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 아주 가끔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영신을 보러 그녀의 부모는 무진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았고, 보통 하루 이틀 밤만 자고 바삐 한양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영신은 자신이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과 실제로 본가에 올라와 마주친 부모의 모습이 퍽 달라 당황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나이가 들어 야트막한 주름살이 생기고, 마냥 젊어 빛나던 눈과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을 가진 시절의 부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정말 달라진 건 세월에 따라 나이가 든 부모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분명히 무언가 달라졌다. 나를 대하는 부모의 눈빛, 말투, 남몰래 흘리는 한숨 소리마저, 몇 년 전 영신이 이 집을 떠났을 때 기억하던 그들과 지금의 그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영신도 알 길이 없어 그저 묵묵히 웃으며 장성한 딸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이왕 공부를 하려거든 그 서당 아이들 중에서 가장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물론 항상 그러지는 못했지만, 이래 보여도 매 시험마다 수석을 놓치지 않았답니다.”

“역시 누구 딸인지, 아주 똑 부러지는구나. 이 어머니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어. 그렇지?”

“그럼요, 제가 누구 딸인데.”

선옥은 자기 전 딸의 머리를 손수 빗질해주며 영신이 무진에서 지내며 있었던 일들에 대해 조잘거리는 걸 들었다. 차마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자신의 괄괄했던 유년 시절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기에, 영신은 언제나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선옥과 모녀간의 수다를 즐겼다. 바르게 등을 세우고 앉아 명랑하게 웃으며 고운 머리칼을 풀어놓은 영신의 이마와 눈은 일곱 살 때처럼 기쁨과 즐거움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선옥도 그걸 무척이나 잘 알았기에, 아무리 영신이 규수로서 하면 안 되는 장난과 사고를 치고 다녔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저 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언제나 자신의 품 안에서 살던 딸아이가 어느새 그렇게 훌쩍 큰 처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선옥은 생각을 고쳤다. 영신이 집을 떠나야 했던 이유, 그 일을 떠올려보자. 이까짓 불안함이나 단지 어린 시절의 딸이 크는 것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아쉬움은, 그저 배부른 투정이다.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했다. 아무런 방법도 써보지 못하고 그저 두 손 놓고, 이 어여쁜 내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뻔했다. 그러니 이렇게 잘 커준 것에 선옥은 그저 감사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자신의 뜻대로 얌전하고 조신한 규수가 되지는 못해도, 그저 건강하고 평범하기만 하다면. 그런 험하고 삿된 것들을 볼 필요 없이, 그저 이렇게……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아이로 지내준다면, 선옥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참, 어머니. 제가 그 애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나요? 이도라는 앤데, 아주 착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었어요.”

“그래? 처음 듣는데.”

“내 정신 좀 봐, 문영신! 어떻게 그 애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는지. 어머니, 보세요? 제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냐면…”

영신은 더욱 신이 나 이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도와 있었던 일, 그리고 아주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직 그와 친구가 되기 전, 그 우물 터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도.

“그래서 이도네 할머님이 거기서…”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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