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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마침
“그래서 영신 아씨의 부모님은…”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그만한 재산과 품을 들이고, 게다가 위험을 감수해가며 그런 미친 노인네의 굿판까지 손수 만들어줬는데. 정확한 건 나도 알지는 못하지만…… 그 일로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들 하더군. 집안 어르신들이 그런 망신이 어디 있냐며 발칵 뒤집혔었어. 아들도 아니고 고작 외동딸 하나 살리겠다고 집안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그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친 노인을 집에 들였다고. 나는 그 당시 삼척에 있는 진지에 가서 벼슬을 지낼 때라 그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전해진 소식만 들었을 뿐이네. 어르신들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며 반대했지만, 그 애들은 듣지 않았네. 그래서……”
그 일로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이도는 잠시 그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영신의 부모님은 대체 무엇을 했던 것이고, 또 영신이 집으로 돌아온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모르는 영신의 인생의 부분들이 아주 명확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같이 지낸 걸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이도는 그런 순진하고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몰랐던 것에 대해 듣게 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며,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영신 아씨랑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
“그러게나. 이거 참… 노인네가 늦은 시간에 자네를 불러서 별말을 다 했구만. 그냥 술주정 한 번 들어줬다고 생각하게. 그리고…”
태국은 술상을 밀어놓고는 오른손을 까딱여 이도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이도가 고개를 숙이자 태국은 목소리를 낮춘 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빠른 시일 내에 영신이를 시집보낼 생각이네.”
“…예?”
“쉬이이, 목소리 낮춰.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봐둔 집안이 있어. 거기 시어른 될 사람들이 영신이를 매우 어여삐 보고 있네. 그 애도 이제 혼기가 찼으니, 어서…”
“어르신, 그런 건 적어도 영신 아씨께 언질이라도 하셔야 하는 일 아닙니까?”
“자네는 아직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그래, 자네 눈에는 내가 그저, 골칫덩이 조카딸 하나 감당 못해 다른 집으로 치워버리려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이도는 처음으로 태국의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태국을 노려보자 이미 술에 취한 그는 손을 내저으며 뒤로 몸을 뺐다. 명백히 퇴장을 요구하는 몸짓이었다. 이도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그가 술에 취했다는 걸 깨닫고 더한 언쟁을 벌이기보다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걸 택했다.
***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밤이었다.
마룻바닥이 끼익거리는 복도를 걷다 말고 이도는 마당을 내다보았다.
달은 아직 둥그렇게 차오르지 못해 어스름하게 살이 올라 있었고, 오늘따라 그 빛도 밝지 못해 구름들이 얼기설기 달을 가린 날이었다. 희미한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에 금방 익숙해지는 이도의 눈에는 원래 한밤중이어도 아주 작은 움직임도 걸려들곤 하였으나, 오늘은 정말 벌레 한 마리도 기어가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도가 발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 풍경을 내다보게 된 걸지도 몰랐다. 마당과 나무들을 훑던 이도의 시선이 안채로 향했다. 그곳은 영신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
낮에 영신이 쓰러지고 나서, 이도는 그녀를 안고 재빨리 의원을 불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 의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짐을 싸 들고 태국의 집에 찾아왔고, 언제나 그랬듯 신경 안정에 좋은 보약 정도만 처방해 주고 다시 떠났다. 그 의원은 이도가 처음 한양에 올라왔을 때부터 오며 가며 몇 번 보았던 사람으로 아마 지금까지도 영신의 전담 의원 노릇을 하는 양반이었다. 의원으로서 한양 팔도에서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이라고야 할 수는 없었지만, 영신과 태국이 계속 그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입이 한양 팔도에서 제일 무거운 덕이었다. 물론 좋은 실력과 세심한 태도도 그의 장점이기는 했다. 그리고 사실상 자신이 의학적으로 영신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와 영신의 상태를 보살펴준다는 것도 한몫했다.
“누님은 좀 어떠신가?”
의원이 돌아가고 나서도 영신은 바로 정신이 들지 않는지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고른 숨을 내뱉으며 편히 잠에 든 것 같았으므로 의원은 다른 약을 더 주지 않고 돌아갔다. 유모와 몸종 아이가 번갈아 가며 영신의 머리맡을 지키며 이따금씩 맑은 미음과 물을 먹여주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아직 유모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영신의 이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이도가 영신의 방에 찾아오자 그녀는 조금 경계 어린 눈으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아씨는 이제 괜찮으십니다. 호흡도 좋아지셨고 아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죽을 몇 술 뜨기도 했으니까요. 도련님이야말로 이렇게 늦은 시각에 아녀자의 방에 출입하시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으응…… 누구야? 이도니?”
“누님, 정신이 드십니까?”
쌀쌀맞은 유모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선잠이 깬 건지 영신이 눈을 떴다. 이도를 알아보고 반가이 입을 열자 이도는 유모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영신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유모가 눈을 흘기든 말든 이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신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보내신 편지… 받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내가 오랜만에 온 애한테 못 보일 꼴을 보였네. 미안해. 유모, 이도랑 오랜만에 할 얘기들이 아주 많네. 잠시 자리를 비켜주면 고맙겠어.”
“하지만 아씨, 어찌 다 큰 아가씨가 외간 남자와 단둘이…”
“이 사람 좀 봐! 유모! 이도가 어디 외간 남자야? 어려서부터 나랑 같이 큰 남매 같은 사이인 거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잠깐이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말고 어디라도 다녀와요. 하루 종일 나 돌보느라 방 안에 박혀서 고생했으니.”
“……하지만……”
“영신 누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저도 그저 안부나 나누러 온 것이니, 아픈 사람 붙잡고 오래 수다 떨 생각은 없습니다.”
유모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러나 마지못해 옷차림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 물이 담긴 통과 명주 천을 들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영신이 이도에게 눈을 돌렸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구나.”
“누님만 하겠습니까.”
“유생 생활은 좀 어떠니? 듣기로는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힘든 건 없니?”
영신은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어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영신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마른 것 같았다. 낮에 쓰러진 영신을 안아 들었을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이도는 이제 확신했다. 몇 달 사이에 영신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나 영신의 웃는 얼굴은 여전히 밝고 따뜻해서 이도는 결국 걱정을 접어두고 같이 웃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낮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주제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 저도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늦게까지 깨어 계시지 말고 어서 주무시지요.”
“잠이야 하루 종일 실컷 잤는걸 뭐. 요즘은 오히려 잠이 많아져서 큰일이야. 머리만 대면 자거든.”
“잘 자는 건 좋은 일이지요.”
이도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신은 물끄러미 몸을 돌려 방을 나서는 이도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이도야.”
“예?”
등 뒤로 문을 닫으려다 말고 이도가 돌아보자, 영신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큰아버지가… 너에게 뭐라고 말하시던?”
“어르신이요? 무슨…”
“아니, 그냥…… 아무 말씀 없으셨니?”
이도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으니 인사만 드리고 오던 참입니다.”
“……그러니?”
영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래,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이불 위로 자신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언뜻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이도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댓돌 위로 놓아두었던 신발을 신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이도는 문득, 자신이 태국을 만나고 오던 길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영신에게 말했던가, 하고 떠올렸다. 아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 것도 같았으므로, 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저 영신이 멀쩡한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