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60화 (160/166)

“…나한테 거짓말을 하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

영신은 멍한 얼굴로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벽 가운데가 울렁거리는 것처럼 찌그러지더니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한 것이 점차 솟아올랐다. 킥킥거리며 웃던 그 얼굴이 마치 노래를 부르듯 벽을 빙글빙글 돌며 외쳤다.

-멍청한 년, 멍청한 년! 내가 뭐랬어! 내가 뭐랬어!

“시끄러워.”

-하하하하하, 내가 뭐랬어!

웃음소리는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방문 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영신은 잠시 놀라서 문 쪽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그 발자국 소리가 돌아온 유모의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씨, 일어나 계셨습니까?”

“벌써 왔어?”

“밤이 늦었습니다. 주무실 준비해야지요. 잠시 처소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오는 길입니다.”

“…있지, 유모.”

유모는 영신의 머리를 빗겨주고 자기 편하도록 옷을 새로 갈아입혀 주었다.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던 영신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 선옥이 자주 자신의 머릴 빗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유모는 영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영신을 돌봐주며, 한양에서든 무진에서든 상관없이 영신의 곁을 지켜주며 언제나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영신은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가끔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동안 영신은 주변인, 적어도 영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을 주로 했다. 물론… 그 반대의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영신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들을 감내해오면서, 자신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기꺼이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 많은 목숨을 살리고, '그'의 명령대로 시키는 일들을 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나의 가족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나는…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고 뺨을 어루만져 주는 유모의 손이, 어느덧 세월의 풍파를 피하지 못해 가슬가슬하게 주름이 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신은 왠지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유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모, 나는…!”

“아씨…?”

그러나 영신은,

차마 다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왜? 왜 그러면 안 되는데?’

‘ ’

‘…거짓말.’

‘못 믿겠으면 한 번 해 보든가.’

영신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자 저하 납시오-!!”

“세자 저하 납시오!”

영신은 글씨를 쓰던 붓을 내려놓았다. 이렇다 하게 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세자의 등장을 알리는 신하들의 목소리에 방 안의 분위기마저 바로 바뀌는 듯했다. 그러나 영신은, 고요히 앉은 채로 붓을 내려놓고 벼루의 뚜껑을 닫아놓았다. 쳐놓은 발 너머로 그림자가 움직이며 그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것이 보였다.

“간만이군.”

“……”

남자의 목소리는 상냥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시할 수 없는 진중함과 권위가 서려 있었다. 분명 영신과 같은 또래일진대 목소리나 말투로만 봐서는 열 살은 더 먹은 사람같이 구는 남자였다. 물론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니 그가 어려서부터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왔는지 안다면 더 이상 첨언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뒤로 줄지어 늘어선 신하들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나인 두 명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비단 방석을 놓았다. 제아무리 귀하고 호화로운 천을 쓴 방석이래도 그래 봤자 방석일 뿐이어서, 그의 처소나 편전에 으레 마련되어 있는 크고 화려한 옥좌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정한 태도로 익숙하게 단출한 방석 위에 털썩 앉았고, 그의 눈짓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들 앞에서 물러났다.

“모두 물러갔으니 이제는 입을 열어도 되지 않겠나?”

“…언제나 저는 주어진 말을 할 뿐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하자 이거군. 그래, 지난번에 자네에게 전해 들은 요령으로 아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지. 지난달에 진해로 더 많은 수의 해군을 보내라는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몇 해 전에 무찔렀다고 생각한 오랑캐들이 몸집을 불려 밤을 틈타 몰래 주둔지로 기습했다고 하더군. 다행히 자네가 미리 기별을 보내놓은 덕에 큰 화를 면했고, 오히려 그 치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지.”

“……”

영신은 침묵했다. 영신은 세자와 자신의 사이를 가리고 있는 나무와 옥으로 만들어진 발이 오늘만큼 고맙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오늘만큼 표정관리를 하기 힘든 날이 없었으니까.

“대비마마께서도 이제는 내 말을 믿고 자신의 능력에 신뢰를 갖기 시작하셨네. 아마 더 눈에 띄는 성과를 낸다면 엄하기 그지없는 그분도 나와 자네를 인정하시겠지. 이미 관료들과 궁 안의 분위기는 진작 넘어온 지 오래지만…… 알다시피 나는 확실하게 마무리를 내는 걸 좋아하니까.”

세자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마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발 너머의 그의 얼굴도 웃음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사흘 후 제가 편전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영신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자 세자는 푹 웃음을 터뜨렸다.

“이틀.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좋습니다. 이틀 후에.”

“언제나 자네가 노고를 내가 높이 사고 있다는 것, 알고 있을 것이라 믿네. 그럼 이틀 후에 보세나.”

세자는 들어왔을 때처럼 단정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문을 열고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세자가 지나가는 길마다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줄지어 그를 따라 나갔다. 영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가 완전히 별채를 벗어난 것을 깨닫고 그제야 살짝 발을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세자가 오기 전과 같이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었다. 영신은 다시 발을 치고 뒤로 물러나 앉아 한숨을 쉬었다.

***

“…누님?”

이도는 걸어가다 언뜻 눈에 스친 익숙한 여인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그 여인이 골목을 돌아가며 흩날린 치맛자락만이 잠시 보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가다 말고 멈춰서는.”

“…방금 아는 사람이…”

“뭐야, 문이도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멈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여인만 보면 눈 돌아가는 사형만 하겠습니까. 그러는 사형께서도 어젯밤 기방 앞에 얼씬거리다가 김판석 나으리와 딱 마주쳐 된통 혼쭐이 났다고 하던데, 벌로 닷새간 외출 금지를 처분 받았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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