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는 옆에서 장난을 걸던 유생 중 한 명에게 웃는 얼굴로 되받아 쳤다. 장난으로라도 그에게는 못 당하겠다는 듯 면박은 당한 유생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나쳤고, 그 옆에서 소리 죽여 웃던 다른 유생 하나가 이도에게 물었다.
“이보게, 이도. 그런데 방금 그는 아는 사람인가? 언뜻 보아하니 조금 전 세자께서 영진당에서 나오시는 것 같던데, 방향이 같은 걸 보니 저 여인이 바로 소문의 그 무녀巫女인 것 같소만.”
“무녀라 하면, 굿을 하고 신을 받는 무당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어찌 궁 안에 그런 이를…”
이도는 그 순간, 머릿속에 할머니와 영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잊고 있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이제 와서 또렷이 생각나는 것도 이상했고, 게다가 왜 영신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자 유생이 말했다.
“자네, 그 소식 못 들어봤나? 재작년부터 궁 안에 떠돌던 소문이었는데, 아마 얼마 전부터 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화가 되어 궁 안에서는 아무리 어린 궁녀라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네만.”
“그게… 무엇입니까?”
“전하께서 재작년 큰 병이 들어 지금까지 병좌에 계시다는 건 알지?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의 문휘 세자이신 맏아들을 후대로 책봉하기로 했다네. 하지만 당시 세자께서는 갓 열여섯 살이 되었고, 아직 중전은커녕 후궁 한 명도 들이지 않아 조정의 반발이 꽤 있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중전 마마께서 이른 나이에 병사하셔서, 문휘 세자는 어려서부터 세자 자리를 지키는 데에 가장 큰 관심이 있으셨다네. 그리고 나도 들은 얘기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자께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한 무녀를 불러다가 별채에 앉혀놓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이야기가 있네.”
“……하지만 어찌 그런 것을 다들 쉬쉬하는 겁니까? 아무리 전하가 병세가 위중하다고 하여도, 대비 마마께서 아직 정정하시고 궁의 대소사에 관여하시고 계신데.”
“내 말이 그 말일세. 들리는 바로는 그 무녀가 나이는 어려도 아주 못 맞추는 것이 없다고 하던데. 처음에는 대비 마마께서도 세자가 그저 후궁을 들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웬걸, 그동안 그 여인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안 대고, 그저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바로 돌아간다고 하던걸. 그리고 그녀가 짚어준 것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니, 대비 마마께서도 이제는 세자의 손을 들어주시기로 한 모양이야.”
“……”
이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유생과 발을 돌려 명륜당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이도는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떠들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머릿속으로 하나, 둘씩 조각들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도가 입을 다문 것도 모른 채, 유생은 이미 터진 입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나 참, 이미 위에 분들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어느 집안 자식인지까지 다 알고 계시다는 소문도 있네. 하지만 뭐 중요하다고 그렇게 다들 꽁꽁 숨겨두는지. 동재에 사는 놈 말로는 그 여인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꽤나 어여쁘다고 하던데, 궁금하지 않나? 막말로 궁 안에서 유생질 하다 보면 모르는 것도 없게 되는데 말일세. 그러니… 응? 이봐, 이도 이 사람, 어디 갔어? 이보게!”
“먼저 가 계십시오! 뒤따라가겠습니다!”
유생은 어느새 이도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에 그만큼 멀리 간 것인지, 이도는 이미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골목을 돌아 나가고 있었다.
유생은 혀를 차며, 이도 저 녀석도 결국 사내놈은 사내놈이었군, 하고 발을 돌렸다.
이도는 턱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 다시 그 여인이 지나쳤던 골목에 다다랐다.
그러나 역시 여인의 옷자락은커녕 쥐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이도는 문득, 유생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머리와 옷이 흐트러지도록 뛰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그래, 정말로 그 여인이 영신이었다면 직접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집에 가면 언제든지 영신은 그곳에서 나를 맞아줄 것인데. 굳이 여기서 그녀를 붙잡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도는 본가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내일 다시 외출 신청을 내고 본가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한 담당관한테 어떤 핑계를 대며 나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이도는 다시 터벅터벅 명륜관으로 향했다.
“누님, 계십니까?”
이도는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조용히 영신을 불렀다. 며칠 전에 성균관으로 돌아갔던 이도가 다시 집에 오자 집안사람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무슨 일이 있느냐며 물어댔지만, 이도는 그저 손을 내저으며 별일 아니라 둘러댔다. 자신의 방에 들르지도 않고 영신의 방 앞까지 바로 찾아오자, 안에서는 무언가 작은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때맞춰 영신이 있을 때 찾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도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누님, 안에 계십니까?”
“……이도니?”
이도가 다시 영신을 부르자, 안에서 나던 인기척이 뚝 끊겼다. 그리고 영신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네, 저 이도입니다. 잠시 여쭐 것이 있어 다시 본가에 왔습니다…… 누님? 안에 계신 것 맞습니까?”
이도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영신은 언제나, 무진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던 그때부터 자신이 방 앞에서 그녀를 부르면 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며, 지금 머리를 빗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또는, 유모 몰래 간식을 챙겨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등 금방 나갈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도가 두 번이나 영신을 부를 동안, 영신은 문을 열지 않았다. 물론 어릴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어릴 때처럼 바로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도는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게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영신의 목소리는 무척 작고 흐릿했는데, 그것은 마치 얇은 창호지가 발린 문 한 겹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불이나 두터운 무언가에 싸인 채 가려져 나는 소리 같았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인가? 그래서 바로 나와 보지 않는 건가. 이도는 잠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입을 열어 영신을 부르려고 했다.
“누…”
“이도야?”
이도는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방 안에 있어야 할 영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나갔다가 돌아온 듯, 외출복 차림에 쓰개치마까지 쓴 채였다. 유모도 같이 동반했던 것인지 그녀도 왜 이도가 여기 있냐는 듯 영신의 옆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방금……방 안에서…”
“……내 방에서?”
이도는 영신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것을 보고, 무언가 자신이 잘못을 한 것인가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분명 영신은 방 안에 있었는데? 방 안에서, 자신이 이름을 부르자 대답까지 했는데. 그러나 영신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쓰개치마를 내팽개치고 이도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이 자그마한 체구에서 이런 힘이 어디서 나는 건지. 분명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이도였지만 순간적으로 영신의 힘에 이끌려 엉거주춤 그녀의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영신은 싸늘한 얼굴로 성큼성큼 자신의 방 앞으로 가 마루 위에 올라섰다. 문을 열려던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유모와 이도를 번갈아보았다.
“이도야, 잠시 사랑채에 가 있으련? 곧 따라갈게. 유모, 유모가 이도 데리고 가 있어줘요.”
“누님, 하지만…”
“유모!”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도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영신은 단호해 보였고, 유모도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으니, 이도는 결국 잠자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모, 영신 아씨와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유모와 이도는 사랑채에 도착했다. 유모가 이도에게 밥은 먹고 온 것이냐 물었고, 먹지 않았다고 하자 유모가 지나가던 한 하인에게 밥상을 준비해오라 일렀다. 그녀의 안내대로 사랑채 안쪽 방에 들어가 앉은 이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채는 언제나 외부 손님들이 왔을 때 그들을 모시기 위해 쓰던 방이었고, 태국의 집에 번듯하게 자신의 처소가 있는 이도로서는 외부 손님을 모셔야 할 일이 없었던 데다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는 생활을 했었기에, 이 집에 온 후로 사랑채에는 처음 발을 들인 셈이었다. 조금 어색하게 사랑채 내부를 둘러보던 이도가 유모에게 묻자, 유모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의원을 보러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아씨의 기침이 멎질 않아서 약도 지어 오고, 다른 약재도 주문해놓은 것이 있어 찾을 겸.”
“아씨가 요즘도… 자주 쓰러지거나 몸이 안 좋습니까?”
유모는 그것이 말이냐는 듯 한심한 눈길로 이도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궁에서만 사시는 분이 이제 와서 아씨가 몸이 좋든 안 좋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안 그래도 아씨 걱정 때문에 이 쇤네 애가 다 타고 있는데… 하여튼, 그게 다 뭐라고 아씨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 마음만 같아서는, 그저 주인마님이 생전 살아계실 적 그랬던 것처럼 하나 있는 우리 아씨 곱고 어여쁘게 키워서 좋은 집에 시집보내고, 아주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사시는 게 제가 바라는 것 전부인데… 대체 왜 아씨는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그렇게…”
“유모,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이도가 언성을 높이자 유모는 찔끔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마치 누가 들을까 염려하듯, 일어나 방문까지 꼭 닫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이보시오, 이도 도련님. 이 쇤네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라고 말하는 유모의 눈은 분명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언제나 그녀는 영신과 이도가 어렸을 때부터 이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더욱이 둘이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이도가 장성해 태국의 마음에 들어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을 때에도 유모는 유일하게 이도에게 까칠하게 뻗대며 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하인들은 감히 그럴 수도 없었지만, 이도는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어려서부터 영신과 지내면서 줄곧 보아온 사람이고, 영신을 친어머니처럼 아끼고 돌봐주는 그녀였기에 유모가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오히려 공손히 대하곤 했었다. 그러니 그런 유모가 이토록 진지하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이도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모가 이도에게 부탁할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영신에 관한 일.
이도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유모는 가만히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조용하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영신이 이상해진 것은 바로 작년부터였다.
그것은 영신이 세자의 부름을 받았던 때와 시기가 일치하기도 했다. 영신이 본가에 돌아온 후, 얼마 후 영신의 부모는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신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고 덤덤한 얼굴로 상을 치르고, 사람들을 마주하고, 단정한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속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테지만, 알더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신을 동정했고, 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고,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그런 영신의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녀로서 얼마나 담담하고 태연한 지에 대해 쑥덕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영신을 두고 그녀가 얼마나 조숙한 처녀가 되었는지, 그녀의 부모가 생전 얼마나 딸을 아꼈는지, 그런데도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부모가 죽어도 곡 소리는커녕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지,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죽어서도 얼마나 적적하겠느냐는 소리들을 해댔다. 영신은 그 모든 이야기들을 전부 들었다. 그녀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이야기까지 전부 다.
“자네가 문영신인가?”
영신은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안채 앞마루에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글씨를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익힌 버릇으로, 마음이 많이 흔들리거나 불안할 때, 또는 생각이 많아질 때면 영신은 언제나 벼루를 놓고 정자세로 앉아 먹을 갈았다.
“……누구십니까?”
먹을 갈며 시끄러운 마음을 정리하던 도중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듯하더니,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영신이 있는 안채로 다가왔다. 퍼뜩 고개를 들자 낯선 청년 한 명과, 그의 사방으로 무표정한 얼굴의 험상궂은 장정이 네댓 명이 서 있었다. 장정들은 한눈에 봐도 예사 사람들이 아니어 보였고, 오히려 그들이 둘러싸고 선 청년은 평범하게 서글서글한 인상의 호남이었다. 희고 단정한 얼굴에 곧은 눈썹, 살짝 쳐진 눈과 웃는 상인 눈에 비해 입매와 턱은 장성한 청년답게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청년이 입은 옷은 제아무리 보는 눈이 없는 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귀하고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참으로 그려놓은 듯 귀공자와 같은 모습에, 난데없이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이방인들임에도 머슴들이나 유모는 차마 그들을 단호하게 막아서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아마 어디 높은 집 자제분 일 것은 틀림이 없었기에 유모가 예를 갖춰 공손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