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공께서는 대체 어인 일로 기별도 없이 찾아오신 겁니까? 그리고 이곳은 문태국 어르신의 조카딸 되시는 문영신 아씨가 기거하는 처소이온데, 어찌 그렇게 외간 남자들을 이끌고 아녀자들이 있는 곳에 무턱대고 들어오신 답니까?”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영신을 건너다보았다. 영신은 갈고 있던 먹을 멈추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선은 똑바로 그 청년을 마주한 채였다. 어느 집안 자제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무례한 행동이며, 경우가 없는 짓이었기에 영신도 고이 돌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아침부터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몸도 기운이 나질 않아, 그저 쓸데없이 소란을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신은 눈앞의 이 청년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분명 스쳐가면서라도 본 적이 있는 듯한데. 게다가 이렇게 자신이 사는 방 앞까지 찾아올 정도면 무언가 사연이 있을 터. 영신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마루에 서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 침묵을 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내 쪽이었다.
"그래, 자네가 바로 문영신이군.”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영신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청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영신이 예민해질수록 더욱 활짝 웃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작자인가, 이 남자는.
“내가 맞게 찾아왔군. 들리는 이야기로는 자네가 꽤 소질 있는 무당이라던데.”
“아니, 그게 무슨…!!”
“놔둬, 유모.”
청년의 말에 유모가 발끈하자, 영신은 그녀를 제지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참…… 해괴망측한 소리군요. 아마 댁을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봐라, 이분들을 가는 길까지 모시거라.”
“10년쯤 전에.”
영신의 명령에 주변에 있던 머슴들이 하나둘씩 팔을 걷어붙이려던 찰나, 사내가 운을 띄웠다. 영신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뒷짐까지 지고 미미한 웃음을 띤 채 물었다.
“이 근방에서 한 달에 걸쳐 어린아이들이 단체로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고 하지.”
그 순간, 영신의 눈이 차갑게 식는 것을, 그녀의 바로 근처에 서 있던 유모는 똑똑히 보았다. 다른 머슴들이나 하인들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치만 보고 있었으나, 유모는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우리 아씨에게 해를 끼칠 인간이다. 대체 뉘 집 자식인지, 대체 그때의 일을 어찌 알고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태국의 귀에 이 사단이 들어가기 전에는 얼른 상황을 종결시켜야 했다. 그러나 유모가 무어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은 그였다.
“아이들의 나이 대는 전부 대여섯 살에서 많게는 열 살. 드물게 열세 살짜리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고 하고. 마치 어느 순간 누군가가 작당을 하고 온 마을에 있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을 잡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참 신기하고 괴이한 일일세. 안 그런가, 문영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저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네.”
“그만!”
유모는 이를 악물고 청년과 영신의 사이를 막아서고 나섰다. 청년의 앞에 유모가 끼어들자 그의 주변에 둘러서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
그러나 청년이 바로 손을 들자, 마치 그것이 어떠한 신호라도 되는 듯, 그들은 다시 칼을 자루에 집어넣었다. 하는 짓으로 보아하니 그들은 청년의 호위무사인 듯했고, 칼을 뽑는 속도며 태도며 그 일사분란한 동작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보통 집안에 고용된 이들은 아닌 듯했다.
“이 무슨 무례한 작태란 말이오! 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건만, 감히 우리 영신 아씨의 앞에서 그런 망발을…!”
“어허, 무엄하다!! 자네야말로 아까부터 우리가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누구 안전이라고 감히!”
“너야말로 이 분이 누구이신 줄이나 아느냐!”
유모의 말에 사내의 옆에 서 있던 장정들이 엄격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사내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들어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서 있던 장정 하나가 엄숙하게 소리쳤다.
“예를 갖춰라!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현조 폐하의 후대이신 문휘 세자이시다!”
“어허, 거 사람 참,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그래.”
세자라고 불린 청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자? 세자라고? 문휘라니, 제아무리 궁에 출입해 본 적 없는 천민들이어도 한양 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문휘 세자. 현 왕의 대를 잇기 위해 후대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궁 밖에서 실제로 그를 보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평생을 궁 안에서만 보냈기에, 그들을 둘러싼 하인들과 머슴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면서도 차마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내 무사의 무례를 용서하게, 문영신. 나는 그저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
영신은 조용히 마루에서 내려와 그에게 걸어갔다. 유모의 옆을 지나칠 때, 걱정스러운 얼굴의 그녀가 영신을 붙잡았지만 영신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세자의 앞에 선 영신이, 조용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영신을 필두로 그녀를 지켜보던 다른 이들, 영신의 하인과 머슴들도 모두 바닥에 납죽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오직 유모 한 사람만이, 입술을 깨문 채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
“명에서 귀하기로 소문난 찻잎이라는데, 맛이 어떤가? 입에 맞는가?”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지요.”
“사람이 사교성이라고는 없군.”
영신은 세자를 노려보는 눈을 그대로 고정한 채, 말없이 제 앞의 찻잔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차를 거절하는 태도에는 아직까지 강한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세자는 혀를 차듯 웃으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자가 태국의 집에 직접 찾아간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부터 근방에서 돌던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 꽤 오래전부터 있던 이야기였으나, 최근 들어서 그것이 거의 확실시되어 세 살배기 어린이라도 알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자는 태어나서 거의 궁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런 저잣거리에서나 도는 소문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큰 병을 얻게 되고, 장성한 아들이 문휘 세자 외에는 없다는 이유로 그는 아버지의 후대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장성한 아들이 그 말고는 ‘아직’ 없다는 것. 실제로 현 왕인 현조는 일찍이 중전을 들였다가 아내를 병으로 잃고, 그 뒤로 세 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첫째 후궁은 딸만 둘이었고 둘째 후궁에게는 어린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아직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왕위 계승자로서 순위에서 밀리게 되었지만 그 아이는 누가 봐도 현조를 쏙 빼다 닮은, 게다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아량이 넓은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작년이 끝나갈 때쯤 현조와 셋째 후궁의 사이에서 또 아들이 태어났다. 아직 갓난쟁이일 뿐이지만 자신의 배다른 막냇동생이 아들로 태어났다는 소식은 문휘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가 된 것이다. 게다가 첫째 후궁의 자식들인 딸들은 또 어떤가. 그녀들은 사실 문휘와 나이 차가 별로 없는 열여섯, 열넷의 나이의 소녀들이었다. 그 장녀인 세진 공주는 어려서부터 문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이가 비슷해서도 그랬고, 원래 현조가 사랑했던 여인이 지금의 첫째 후궁이자 세진의 어머니였으나 대비의 반대로 그녀를 중전으로 앉힐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집안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세진의 어머니는 중전이 죽고 나서야 간신히 후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미 그때 그녀는 현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세진이었다.
아무리 법도 상 공주는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지만 그녀가 일찍 결혼해 부마를 얻는다면 또 골치 아파질 문제였다. 실제로도 세진 공주에게는 현조가 짝지어준 혼인 상대가 있었다. 아마 변수가 없다면 세진은 그와 결혼하고 부마인 그에게 어느 정도 권력이 넘어가게 될 것이었다. 실제로도 관료들은 부마가 될 남자의 집안의 권력 정도와 왕실 간의 사이를 따져보았을 때,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대비에게도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한, 그저 가진 거라곤 나이가 찬 맏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없는 문휘에 비해 세진과 그녀의 남편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문휘도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이 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요소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문휘는 큰 고민에 빠졌다. 내 그동안 평생 아버지와 대비마마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어려운 공부와 무술도 익히고, 어느 것 하나 남들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숨소리마저 조절하면서, 그야말로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짧은 평생을 다 바쳤다. 그러나 문휘의 다른 형제들은 언제든지 그들이 ‘적당한 때가 오면’ 문휘의 자리를 빼앗을 준비가 된 아이들이었다. 자신의 어린 동생들을 보면서, 심지어 이제 막 배 밀기를 하고 옹알이를 하는 막냇동생을 보면서 문휘는 참기 힘든 충동에 시달렸다.
전부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과연 정말 내 안위는 무사해지는 것인가?
그동안 역사 속에 기록된 다른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었던 폭군들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단지 나보다 잘났다는 이유로 남들을 쉽게 없애버리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문휘는 끝끝내 동생들을 죽일 수 없었다. 이제 고작 여덟 살이 된 남동생은 자신은 왕이 되고 싶지 않다며, 그저 형님을 곁에서 보필할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여동생은 그저 언니와 오라버니가 사이가 좋아지기를 바라고, 어머니의 등쌀에서 벗어나 마음껏 공부를 하고 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 관심이 없는, 그저 평범하게 착한 동생들이었다. 문휘는 그것을 잘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초조했다. 언제라도 그 마음은 바뀔 것이고 그것은 그 아이들이 나이를 더 먹으면 분명히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문휘 세자는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가벼이 넘길 수가 없었다.
“자네, 아까 주막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던데. "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싼 의문의 장정들과 한 청년을 바라보며, 나그네는 당황한 얼굴로 끔벅거릴 뿐이었다.
“뭐야? 웬 샌님이 사람 가는 길을 막고…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 돈을 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