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왜지?”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감히 나한테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강요한 자는 아버님 외에는 없었는데 말이지.”
영신은 정말 성가시다는 듯 몸을 휙 돌려 선 안으로 넘어가 버렸다. 세자는 어깨를 으쓱하곤 뒤에 서 있던 신하들을 물렸다. 잠시 당황하던 그들은 세자의 눈빛이 차가워지는 것을 보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열댓 명이 넘던 사람들이 우루루 대문을 지나 영진당의 밖으로 나가자, 문휘는 영신을 돌아보며 보란 듯 웃었다.
영신은 이미 조금 전부터, 이 터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저절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도저히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발을 들이던 것과 동시에 저 안쪽, 살짝 열린 안쪽 방의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분명한 모습에 사람인가 싶었으나,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영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썩은 흙과 짚단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건 죽은 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눈을 크게 뜬 채 문틈 새로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는 이는 얼굴 반쪽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젊은 여성이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영신은 느껴졌다. 보통 저토록 사람과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모습이 뚜렷하고, 내가 자신을 본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똑바로 이 쪽을 쳐다본다는 것은……
영신은 슬쩍 이마를 눌렀다. 머리가 벌써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궁 안에 이 정도로 역한 귀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문틈으로 비치던 얼굴이 사라진 것은 영신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저 어린아이가 장난스럽게 훔쳐보다가 모습을 숨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신은 뒷골이 찌르르 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알아봤다는 소리네. 영신은 천천히, 하지만 똑바로 걸어 마루 앞에 가 섰다. 조금 전 영신이 엄포를 놓으며 발로 그어 만든, 가로로 죽 그어진 금 밖에 서 있던 문휘가 뒷짐을 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진당 뒤에 드리워진 느티나무들의 늘어진 잎들이 산들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건가. 문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멀리하여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고 하는 건가.”
맑던 하늘 위로 한 겹, 아주 미미한 먹구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는 떠 있었고, 습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을 뿐이었다. 아직 해는 밝고 하늘도 맑은데, 왠지 문휘는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게 깔린 묵직하고 밀도 높은 공기가 그의 뺨과 어깨를 역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영신은 천천히 댓돌 위에 올라섰다가, 마루로 올라가 허리를 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안에는 가재도구를 치워 넓고 텅 빈 방 안이 보였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들어 방바닥에 길게 창살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던 영신의 눈에, 그림자의 가장 안쪽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잡혔다. 흰 발 두 개가 나란히 서서 그림자 안쪽 그늘진 곳에 있었다. 발의 방향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영신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신은 그 흰 발과 발목, 소복의 끝 단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두 개의 발이 놓여있는 모양이 이상했다.
두 발의 모양이… 서로 똑같았다. 영신은 눈에 힘을 주었다. 분명 사람의 발은 왼쪽과 오른쪽이 있어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거울을 보듯 반대 형상을 띄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러나 그 발을 둘 다 왼쪽 발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영신은 휙 고개를 들었고,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눈앞에서 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게 무슨 소리지?!”
거의 광풍이 일 만큼, 큰 소음을 내며 쾅 닫힌 문짝 소리에 문휘 세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영신이 소리쳤다. 그녀의 단호한 외침에 세자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슬아슬하게 디딘 발끝이, 영신이 그어둔 선에 딱 걸려 있었다.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선을 넘지 마세요.”
“방금 그건 바람인가? 아니면 자네가…”
“바람도 아니고, 저도 아닙니다.”
영신은 천천히 몸을 굽히더니, 방문 앞 마루에 그대로 정좌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단정한 뒤통수가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세자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영신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세자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영진당 밖에 선 이들을 모두 물려주십시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장정 열두 명을 데리고, 작은 고사 상을 마련해 가져와주십시오. 스무 살보다 어린 궁녀는 모두 자신의 침소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영진당 근처에는 부녀자 한 명이라도 돌아다니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가 지고 제가 이만 되었다고 할 때까지 모두 자신의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금해주시고, 그리고…”
영신은 잠시 말을 멈췄다.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지시를 귀담아듣고 있던 문휘가 고개를 치켜들자, 그녀가 덧붙였다.
“……저희 집안에 기별을 넣어, 유모와 의원을 불러 영진당 앞에 대기하도록 해주십시오. 영신이 의원을 불러달라고 했다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해가 조금씩, 조금씩 산 너머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사방 천지에 붉고 따스한 빛이 점점이 녹아들고, 그림자의 길이가 그에 맞춰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여염집 아낙들은 밖에서 노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새로 지은 밥 냄새와 연기가 집 곳곳마다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리고 논과 밭, 산과 들에서 젊고 늙은 남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을 하다가 손발을 씻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때이기도 했다. 을씨년스럽게 비어버린 골목과 공터에는 아이들이 갖고 놀다 버린 나뭇가지와 돌, 풀잎들이 뒹굴고, 주인도 없고 집도 없는 들개가 멀리서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문휘 세자가 긴급으로 내린 지령에 궁 안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젊은 궁녀와 상궁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저마다 침소로 숨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세자가 명령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고, 그의 뒤를 따라 선별된 열두 명의 무사들이 영진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들은 저마다 그 소문이 진짜였다며 쑥덕대기 바빴다. 궁 안은 삽시간에 텅 빈 것처럼 조용해졌다. 해가 지기 전에 모두 들어가 있어야 했으므로 설거지를 하던 이들도,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하던 이들도 모두 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두근대는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수다를 떨었다. 왠지 무섭고 재미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여인들이 모두 방 안에 들어간 후 남자들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중에서도 갑작스러운 긴급 통금에 나이가 지긋한 관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이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했다. 토끼 굴에 불 붙인 짚단을 넣은 것 마냥 저마다 부산스럽게 치마가 뒤집히는 줄도 모르고 방으로 들어가는 궁녀들의 흉을 보기도 하고, 괜히 겁을 먹고 기가 죽은 젊은 유생들과 무사들을 조롱하고, 대체 세자 저하는 무슨 생각이길래 이러시는 것이냐며,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한탄을 해댔다. 늙은이들이 이리 퉁 저리 퉁 어깃장을 놓으며 불평을 해대는 동안, 해의 머리통이 어느덧 산기슭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밤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상궁이나 나인 대신 고사 상을 든 장정 한 명이 영진당 앞에 상을 내려두고 물러났다. 그들은 영신이 지시한 대로 영진당을 둘러싼 담벼락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각자 제 자리를 맡아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되며, 잠에 들어서도 안 된다. 밤을 새는 것쯤이야 단련된 무사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이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조용히 입을 닫고 애써 안에서 들리는 것을 듣지 않으려 노력하며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문휘 세자만이 영진당 안에 서서, 영신이 그어 놓은 금 바로 앞에 발을 댄 채 서 있었다. 낮과 똑같이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약간 고개를 치켜들고는 덤덤한 표정 그대로 말이다.
그러나 낮과 다른 것은, 그의 앞에 오색빛깔 음식과 과일, 그리고 부적까지 올린 고사 상이 놓여있다는 것이고, 영신이 마루 앞마당에 다시 내려와 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탁대로 영진당 대문 밖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유모와 영신의 의원이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신의 소매가 움직이자 그녀가 들고 있던 방울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 가냘픈 미동과는 달리, 방울은 사방을 가득 채울 것 같이 청명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영신의 방울 소리가 들리자, 내내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적막을 찢고 아주 조금, 열리는 것이 보였다. 안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방 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방울을 울렸다.
***
“아씨, 저 들어갑니다?”
“응.”
영신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열리고 유모의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스러움과 반색이 얼룩진 얼굴로, 유모는 누운 영신의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머리는 좀 어떠신지요?”
“이제 괜찮아. 약이 잘 드네.”
“다행입니다… 에휴, 정말…… 이게 다 무슨 난리라고……”
“괜찮대도, 유모. 지난번에 소막산 앞에서 고사를 지내던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닌걸. 그때는 터줏대감이었던 산 영감 때문에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
“그런 망측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 아씨 때문에 이년 속이 성할 날이 없습니다…… 에휴, 내가 돌아가신 마님 얼굴을 어찌 보려고……”
“또 운다. 그러지 마.”
영신은 상체를 일으켜 말갛게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날, 영진당에서 영신이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오직 세자와 유모만이 알았을 뿐이고, 그마저도 그들은 드문드문 기억이 비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중간에 구멍을 내기라도 한 것처럼, 잘린 기억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유모는 그런 일에 익숙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나, 문휘는 그렇지 못했다. 영신은 고사 상을 준비해달라고 했을 뿐, 그녀가 그날 저녁 한 것은 고사를 지내는 것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누구보다도 영신에게서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음에도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았다. 그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영신은 쓰러졌고, 그 뒤로 사흘을 앓았다. 집안사람들은 그녀가 밥 먹듯 쓰러지고 앓았기에 별다른 놀람도 없이, 쓰러진 영신을 업고 온 무사를 이부자리로 안내했다. 그 무사가 훗날 말하기를, 분명 다 큰 여인을 업었는데 그토록 가벼웠던 적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세자 저하께서 지난 사흘간 매일 찾아오셨습니다. 묻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하셨지만 아직 아씨는 눈도 뜨지 못했으니 다음에 오시라며 제가 돌려보냈지요.”
“나는 괜찮은데… 유모 또 그러다 경을 칠라.”
“호호, 괜찮습니다. 제가 살면서 세자 저하를 문전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있겠어요?”
금방 울음 기가 가신 얼굴로 샐쭉 웃는 유모의 짓궂은 태도에, 영신도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