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66화 (166/166)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신 표정이셨으니, 아씨가 깨어나셨다는 기별을 들으면 내일이라도 다시 오실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해가 뜨자마자 오셨다 가셨거든요.”

“그래? 딱히 전할 말은 없다고 하던가?”

“아씨를 직접 만나서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구나…… 알겠네, 이제 신경 쓰지 마. 세자께서 오시면 그냥 내 방으로 안내해 드리면 돼.”

“그럴게요.”

유모가 물러가고 나서, 영신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대고 천천히 누웠다. 아직 온몸에 으슬으슬하게 오한이 들었다. 영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보통 사람들은 눈을 감으면 밤과 같이 캄캄하다고 했지. 영신은 어렸을 때부터 눈을 감으면 시야가 차단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어릴 때는 그래서 잠을 못 이루는 날도 많았고,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금방 적응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무던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눈을 감고, 여전히 어두운 시야 너머로 넘실거리는 것들을 깔끔히 무시한 채 잠을 청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유모를 보내고 나자 순식간에 졸음이 몰려왔다. 분명 사흘 동안 내리 잠만 잤는데도 말이다. 영신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는 또…어디지……”

얼마나 잤던 걸까. 영신의 눈이 저절로 뜨이고, 이상하리만치 주변이 밝은 기분에 머릿속으로 빛이 탁, 하고 켜지는 기분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영신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방 안에서 잠들었을 텐데, 이곳은 대체 어디지. 실내인지 실외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도, 심지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도 베고 있던 베개도 없었다. 영신은 자신이 잘 때 입었던 옷이 아닌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은 의외로 가볍게 움직였다. 최근 들어 이렇게 몸이 가뿐하고 힘이 났던 적은 없었는데…… 영신은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팔다리를 뻗어보다가, 문득 어디선가 물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물이 참방대는 소리, 나무가 지끈거리며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마치 안개에 싸인 것 같이 어스름하게 어떤 형상이 보였다. 호기심이 일어 가까이 다가가 보자, 영신은 그게 곧 작은 조각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누군가가 우뚝 선 채 노를 젓고 있었다.

끼이익- 촤아아-

끼이익- 촤아아-

영신은 홀린 듯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오래지 않아 배의 모습이 분명해지고, 점점 가까워져 이내 소리치면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를 좁힌 영신은 손을 흔들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영신의 목소리에 배 위에 서 있던 사공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배 위에 선 그의 밑에서 영신이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퍽 기이한 일이었으나, 왠지 영신은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기에, 영신은 노를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ㅡ그러나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정말 자신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ㅡ사공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오? 내가 길을 잃은 것 같아 말 좀 여쭈고자 하오.”

“……이름이 무엇인가?”

사공의 목소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꼭 다른 제3의 존재 같은, 귀로 들리는 건지 머리로 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독특한 목소리였다. 영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문영신이라 하오. 한양에 있는 문태국 어르신의 조카인데, 그분의 이름은 아시리라 생각하오.”

“이름이 무엇인가?”

“……방금…”

영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나? 영신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잔잔하던 조각배가 기우뚱했다. 영신이 놀라 배를 내려다보느라 시선을 내리자, 머리 위쪽에서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때, 영신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답하면 안 된다. 절대로. 그러나 그 순간 영신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자,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분명하게 그것을 사람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마치 긴 뱀의 모가지가 쭈욱 나오는 것처럼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어떡하지. 영신은 잠시 갈등했다. 몸을 돌려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앞뒤도 구분 가지 않는 곳에서 과연 제대로 뛸 수나 있을까. 머리 위에서 다시 그것이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네 이놈, 잡았다!!!”

영신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려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휙 잡아챘다.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는 순간 뒤에서 영신을 잡아챈 이가 앞으로 불쑥 나섰다.

“계속 모습을 바꾸고 도망쳐 봤자 이게 끝이다. 삼도천을 건넌 이상 이쪽이 저쪽이 되고, 저쪽이 이쪽이 되는 법. 더 이상 힘 빼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영신과 사공의 사이로 끼어든 그 남자가 무어라 외치자, 그의 왼쪽 손에 흰빛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영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으므로 그에게 가려져, 조금 전까지 영신의 이름을 재차 묻던 사공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신이 느꼈던 것처럼 그것은 긴 대가리를 쭈욱 내밀고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영신이 기겁하자, 앞에 선 남자의 어깨 위로 대가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눈코입도 없는 얼굴 주제에, 그것은 분명히 영신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영신은 직감했다.

이건, 그동안 내가 봐온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그것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영신은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로, 영신이 차마 일어서지도 못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걸음이 너무 빠르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강림 도령.”

앞에 나선 남자의 목소리와는 다른, 그러나 좀 더 차분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녀석은 뱃사공 주제에 제 배를 빼앗기면 어쩌겠다는 거야? 다리도 없어서 배 없이는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다리는 없지만 다리가 되어줄 아이들이 있으니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저거나 잡아가시지요. 벌써 도천 건너편에 망자가 수천 위位나 묶여 있으니까요.”

"쯧, 귀찮은 일 맡기 싫어서 몰래 나왔더니 더 귀찮은 일만 떠맡았군. 이름은?"

"그슨대. 진명은 불명입니다."

"그거면 됐어."

강림 도령, 이라고 불린 남자가 손을 뻗어 그것의 얼굴로 보이는 부분을 콱 잡았다. 길게 빠진 목이 요동치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꼭 커다란 뱀이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아 영신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몇 번 더 외는가 싶더니, 금속이 긁히는 듯한 비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더니 뚝 끊겼다.

"이보시오, 괜히 운이 나빠 못 볼 꼴을 보았군. 이제 다 끝났으니 눈을 떠 보시오."

나지막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영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영신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던 남자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손에 어떤 책을 들고 팔락팔락 소리가 나도록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왔던 이가 고개를 기울인 채 바닥에 주저앉은 영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신은 저도 몰라 화들짝 놀랐는데, 그는 조금 전 저 배에 타고 있던, 그러나 고개가 뱀처럼 휘어져 영신을 해하려 했던 그 뱃사공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한 가지가 달랐다. 그것의 얼굴은 마치 구멍이라도 뻥 뚫린 것처럼 온통 까맣고 어둡기만 했었지만, 눈앞에서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 영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뱃사공의 얼굴에는 검은 천이 씌워져 있을 뿐이었다. 얇은 천 뒤로 언뜻 흐릿하게나마 이목구비가 비치는 것을 보아하니 아까 그놈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영신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새나 머리 모양은 영신이 그동안 흔히 봐왔던 일반적인 사내의 차림과는 조금 달랐다. 특히 복식이 아주 오래전 것 같기도, 아니면 아예 다른 나라의 복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구나. 영신은 뭔가 허탈한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헛기침을 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소. 방금 그건……"

"그슨대, 라고 했던 놈인데, 진짜 이름은 모르겠소."

뱃사공 차림을 한 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슨? 그은대? 그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신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영신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불쑥 되물었다.

"그리고 보니, 죽지도 않은 이가 어찌된 연유로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건가?"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가 어디인데 그런…"

"뭐? 망자가 아니야?"

뱃사공의 질문에 당황한 영신이 대꾸하려던 순간,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도령이라고 불린 것치곤 누가 봐도 나이가 적지 않은 어른으로 보였다. 평균적인 남성들보다도 건장한 체격의 그는 반듯하고 유려한 외모를 가지긴 했지만, 시종일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전부 귀찮다는 듯한 눈을 한 남자였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허리를 숙여 영신과 눈을 맞추자, 영신은 짐짓 기가 죽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라, 진짜잖아. 아직 안 죽었네?"

"종종 있습니다. 수명이 남은 이들이 잘못 거둬져서 삼도천 앞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일이."

"뭐? 하, 이 자식들 이거 안 되겠네. 그러면 그동안 왜 나한테 보고 들어온 건 하나도 없어?"

"그거야 도령님이 지난 100년간 징계를 받아서 아귀도로 유배를…."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너는 얼른 가서 네 배나 수습해라. 도대체 삼도천의 사공이라는 놈이 영혼 하나한테 홀려서 배를 뺏기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홀린 게 아니라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그 녀석이 저인 척 행세하면서 배를 훔쳐 달아난 거지요. 그리고 제가 자리를 비워야 했던 이유는 도령께서 염라대왕님 몰래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만, 그만! 하하하, 이 친구 농담도 참."

매우 어색한 태도로 사공의 말을 막은 도령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어서 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영신은 잠시 상황 판단을 위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인지 가르쳐 주실 분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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